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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01:45:58

김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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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한 (金光漢)
1946년 11월 9일 ~ 2015년 7월 9일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대한민국팝송 DJ 겸 방송인이다. 팝송을 독학하여 1980년대 당시 대한민국에 드문 팝 전문가였다.

2. 생애

서울에서 5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며 신문배달을 하며 고학했다고 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중앙대 연극영화과의 전신)을 졸업했다. 혼자서 미 8군에서 나오는 팝 관련 잡지를 읽으며 팝을 독학했다고 한다.

1966년 서울 FM[1]에서 DJ로 데뷔한 그는 1년 2개월 남짓 활동한 후, 월남전에 정훈병으로 참전했다.

제대한 후에는 바로 방송에 복귀하지 않고 음악감상실의 DJ를 하다가, 1978년 MBC FM의 "박원웅과 함께" 를 통해 방송계에 복귀했다. 1980년 TBC에 입사하여[2] "탑튠쇼'를 진행했다.

1980년대가 그의 전성기다. 이 때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의 활약으로 팝송 팬들이 대한민국에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도 팝 전문가로서 활약하게 된다. 그리하여 KBS 2FM의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 그리고 TV에서 팝송 관련 진행자를 맡기도 했다.

그는 이종환이나 김기덕과 달리 라디오에만 머무르지 않고, 유머 1번지쇼 비디오 자키 등의 개그 프로그램에 나와서 팝을 해설해 주기도 했다.[3]

팝송 전문가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 프로그램 진행 능력도 있었기 때문에, 팝송 관련 프로에만 머무르지 않고 1990년대 초반에는 가요 프로그램인 가요톱10을 진행하기도 했다. 본인도 진행을 맡으며 "저는 가요에 전문가가 아닙니다만, 이 기회에 가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그는 여러가지 활약을 했지만 1992년부터 대한민국에서 모든 것을 바꿔 버린 서태지가 완전히 가요판을 새로 짜고 댄스음악이 주류가 되면서 대한민국에서 팝송의 위세는 줄어들고, 이렇게 되자 활약이 뜸해졌다.[4] 그리하여 슬롯이 거의 없어진 팝송 전문 프로그램이 아닌, 일반 프로그램의 DJ로 방송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 후반에는 서울교통방송의 밤과 음악사이를 진행하기도 했고, 2000년대 초에는 KBS 2FM으로 돌아와 아침 11시에 방송했던 "골든팝스"의 진행을 맡았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는 경인방송 라디오(iFM)에서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진행하도 했고,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TBN 인천교통방송 낭만이 있는 곳에를 진행하기도 했고, 2013년~2014년에는 CBS 표준FM에서 "김광한의 라디오 스타"[5]를 진행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는 등 소탈함을 보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정치색을 강하게 내비치면서 진보정치인을 비난하고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을 미화하면서, 이를 비판하는 팬들을 빨갱이라고 욕하는 극우적인 발언을 자주 하기도 했으며, 대체로 진보적인 성향이 많은 팝송 팬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김광한이 전두환 정권 시절에 황금기를 보냈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우편향이 될 수 있겠지만, 연예인의 입장에서 다양한 성향의 팝송 팬들과 소통하는 부분에는 굳이 SNS에 강한 정치색을 내비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연예인이나 공인들이 팬들을 위해 자신의 정치성향을 굳이 밝히지 않으려고 하는 2020년대와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2015년 7월 6일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7월 9일에 타계했다. 만 68세였다. 전술한 월남전 참전 경력으로, 국립이천호국원에 안장되었다. 2015년 5월에 방송한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출연한 게 대중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인 모습이 됐다.

팝 전문가 1세대로서, 1980년대 젊은 세대에서 팝송 붐을 일으키는데 활약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세대의 한계로, 그의 팝 지식은 이종환이나 김기덕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크게 대단한 것은 아니고 오류도 많았다. 예를 들어 베트남전 참전용사를 홀대하는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브루스 스프링스틴Born in the U.S.A.(노래)를 애국주의 노래라고 완전히 반대로 소개하였다. 그밖에도 원래 정치적 성향이 보수적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진보적인 팝 아티스트에 대한 설명도 생략하거나 잘못 해설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6] 이러한 이유로 김기덕과 황인용은 각각 미국에 있는 나영욱 통신원과 권오규 통신원을 매주 또는 격주 국제 전화로 연결하여 미국 팝송과 가수의 최신 근황은 물론 앞선 한국 측 DJ의 방송 내용 중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는 코너를 마련하는 등 당시의 PD/DJ는 그와 같은 나름의 참신한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한때 그의 해설을 들으며 팝송에 입덕하던 팬들이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고, 해외 유학으로 해외 팝 정보를 두루 접하면서, 그들의 해설이 진정한 본좌급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다만 당시 제대로 된 팝송 지식이 미 8군에서 흘러나오는 잡지가 전부였던 제한된 여건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팝송 전문가 1세대로서 대한민국에 팝 문화를 정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3. 기타


[1] 주파수는 89.1MHz. 원래는 독립적으로 탄생한 민영 FM 방송이었지만, 운영난에 부딪히면서 동양방송에 흡수되어 동양 FM 방송이 된다. 따지고 보면 현재 KBS 2FM의 조상이기도 하다.[2] 애초에 그가 방송 DJ 경력을 시작한 곳이 동양 FM이었기에, 친정으로 돌아왔다고도 볼 수 있다.[3] 당시 유머 1번지와 쇼 비디오 자키에서 해외 최신 팝의 뮤직비디오를 소개해주는 코너가 있었는데, 혼자 나와 진행하거나 주병진이 같이 출연해 팝 소식과 소개하는 곡에 대해 입담을 나누기도 했다.[4] 사실 1990년대부터 팝송의 위세가 줄어든 데에는 국내 가요판이 새로 짜진 것 보다는 다른 이유가 크다. 1987년 한국이 국제 저작권 협회에 가입하고 저작권법이 개정되자 그 전까지 마음대로 해외 음악을 틀었던 관행에 제동이 걸리게 되고, 저작권자와 정식 협의를 거쳐야 했는데, 초창기에는 어떤 식으로 협의를 하고 로열티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반하면 어떤 페널티가 돌아오는가에 대한 레퍼런스가 없어서 일단은 방송국들이 몸을 사리게 되고, 해외의 팝 음악 방송이 급감하게 되며, 이런 공백 시기에 상대적으로 방송국이 '갑'의 위치에서 협상이 쉬운 국내 음악 위주로 노선을 급변하는데,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힐 동안 이런 시기가 몇 년 지속되고 영미권 팝 음악은 대중들과 멀어진다. 팝송의 위세가 줄어든 데에는 이 점이 가장 크다(사실은 현지의 RNB 득세와 빌보드-아메리칸TOP40 결별이 크다). FM라디오 외에 별다른 음악 청취 플랫폼이 없고 피지컬 미디어의 가격 또한 국민소득 대비 비쌌던 당시, 방송에서 어떤 노래를 트느냐는 절대적이였다.[5] 이후에 라디오 3.0과 오후의 향기를 거쳐 지금은 이봉규의 어떤가요로 이어진다.[6] 사실 미국인들 중에도 이렇게 잘못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