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03 18:54:21

김기복

김기복 관련 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김기복의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클럽
파일:전북 버팔로 휘장.png

초대
파일:대전 시티즌 로고(방패형).svg

초대
파일:경찰 축구단 엠블럼.svg

2대
}}} ||
김기복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대한축구협회 로고.svg
1969 · 1970
}}} ||
}}} ||
대한민국의 축구 감독
파일:김기복.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김기복
金基福 | Kim Ki-Bok
출생 1944년 5월 22일 ([age(1944-05-22)]세)
황해도 해주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인천창영초등학교 (졸업)
강문중학교 (졸업)
동북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65 / 학사)
신체 미상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중앙대학교 축구부 (1965~1967)
양지 축구단 (1967~1970)
해병대 축구단 (1970)
중앙대학교 축구부 (1970~1971)
한국신탁은행 축구단 (1971~1972)
감독 대륜고등학교 축구부 (1972)
중앙대학교 축구부 (1982~1991)
전북 버팔로 (1994)
대전 시티즌 (1997~2000)
경찰 축구단 (2001~2005)
행정가 대한축구협회(1992 / 경기 이사)
한국프로축구연맹(1995~1996 / 사무국장)
한국실업축구연맹 (2006~2016 / 부회장)
한국실업축구연맹 (2016 / 회장 직무 대행)
한국실업축구연맹 (2017~2019 / 회장)
국가대표 1경기 (대한민국 U-20 / 1964)
37경기 21골 (대한민국 / 1966~1971)
{{{#!wiki style="margin: 0 -10px -5px"
정보 더 보기
{{{#000000,#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eeeeee><colcolor=#000> 서명 파일:김기복 서명.png
}}}}}}}}}}}} ||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행정가5.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한국실업축구연맹 최후의 회장.

전북 버팔로, 대전 시티즌의 초대 감독이기도 하다.

2. 선수 경력

파일:2017-10-26-21;28;43.jpg

인천 창영초에서 처음 축구를 시작한 김기복은 강문중[1]과 동북고, 중앙대를 거쳐 양지와 신탁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고등학교 1학년에 1964년 베트남 AFC U-20 챔피언십을 통해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1965년에 처음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어 1971년까지 주전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체격조건이 좋지는 않았지만' 감각이 뛰어나고 킥이 빠르고 정확했으며, 탁월한 킥 능력을 바탕으로 한 중거리 슛이 강점으로 손꼽히는 선수였다.

특히 1967년 10월 일본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1968 멕시코 올림픽 아시아 예선 일본과의 경기에서 3:3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 속에서 후반 막판 회심의 왼발 중거리 슛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만약 김기복의 슛이 1cm만 밑으로 갔어도 골대 맞고 안으로 들어가는 가면서 한국이 일본을 대신해서 올림픽에 나갈 수 있었다.

이후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전에 출전했으나, 끝내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였고,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 참가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전에만 출전했다. 그리고 1971년 제 1회 박스컵에서 김기복은 미얀마와의 결승전에 교체 출장하며 국가대표로서의 마지막을 장식했으며, 28살의 젊은 나이에 선수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였다.

3. 지도자 경력

파일:Screenshot_2018-09-22-10-24-40-1.png

은퇴 후 대륜고등학교의 감독을 시작으로 중앙대학교 감독을 맡았으며, 1987년 베오그라도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며, 대통령컵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는 대한민국 B팀의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

1994년 전북 버팔로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해 팀이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팀 선수단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였으나, 끝내 팀은 1년만에 해체되었다.

전북 버팔로 해체 이후 주로 행정가로 활동해오다가 1997년 신생팀 대전 시티즌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3년계약에 계약금 1억5천만원,연봉8천만원을 받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부임 이후 김은중, 장철우, 최은성 등의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였으며, 대전을 이끌고 창단 첫 해 7위를 하는 등 끈끈한 팀컬러를 보여주며 K리그에 대전을 잘 장착시켰다고 평가받는다.

이후 2001년부터 2005년까지 경찰청 축구단의 감독을 맡았다.

4. 행정가

1992년 대한축구협회의 경기 이사를 맡으며 행정가러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전북 버팔로 해체 이후 대전 시티즌 감독직에 선임되기 전까지 프로축구연맹 사무국장을 맡았다.

2005년부터는 실업축구연맹 부회장을 맡았는데 2016년 7월 동일인이 2개 이상 단체장을 맡을 수 없다는 대한축구협회 방침에 따라 프로축구연맹 총재를 겸하고 있는 권오갑 회장이 실업연맹 회장직을 사임하면서 실업축구연맹 회장 직무대행직에 올랐으며, 2017년 대의원 만장일치로 실업축구연맹의 10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5. 여담


##대한민국의 축구 감독 분류가 있으므로 중복 분류 추가는 지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1] 현 용문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