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9-11 11:41:41

김려중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빨치산 1세대 출신 북한의 정치가.

2. 생애

1902년 10월 10일에 함경북도 은덕군에서 출생했다. 1930년부터 반일 혁명에 가담했다고 하며 1933년에 빨치산에 가담했다. 1935년 봄 시점에서 1로군 산하 훈춘부대 4단 연장이었다. 해방 이후 조선인민군에 참여, 평양 독립여단의 박격포대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여단정치위원까지 승진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검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8년 12월 2일, 림춘추의 뒤를 이어 알바니아 대사로 임명되었다. 1959년 6월, 최용건의 알바니아 방문을 수행하였다. 1961년 2월 16일, 안영에게 대사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하였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검사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1962년 11월 21일, 장익환의 뒤를 이어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임명되었다. 1963년 10월 쯤 귀국하였는지 박용진이 임시 대리대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전임 검열위원장 김익선이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면서 조동 조치됨에 따라 신임 검열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검사위원장 자리는 리봉수에게 물려준 것으로 보인다. 1967년,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최고인민회의 법제위원장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검열위원장에 재선되었다. 1971년 10월, 박문규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조국전선 의장으로 은퇴하였고 1977년 6월, 강장수 장의위원을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1978년 12월 27일 19시에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중앙인민위원회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해방후 당 및 국가기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면서 당의 통일단결과 당대렬의 순결성을 고수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동지는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혁명위업에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공화국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건설과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라고 하였다.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이후 반신상이 제작되었다. 항일 빨치산 1세대 치고는 정말 눈에 안 띠는 삶을 살다가 조용히 갔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