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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5:15:42

김병곤(사회운동가)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

2. 생애

1953년 2월 24일, 경상남도 김해군 이북면[1]에서 출생했다. 한림초등학교, 개성중학교,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 후 한국사회연구회에 가입하는 등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같은 해 광주대단지 사건이 일어나자 광주대단지 실태조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에서 일어난 반유신 시위[2]를 주도했다가 붙잡혀 구속됐고 2개월 후 석방되었다. 이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에 가입하여 여러 대학들과의 소통과 유인물 인쇄 등을 담당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3]받았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75년 2월 석방되었다. 이때 군 검찰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은 후 현대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최후진술을 남겼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라는 영광스런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에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1974년 6월 15일, 민청학련 사건 공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후 최후진술
1978년 2월 한국기독청년협의회 간사를 맡으며 다시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같은 해 동일방직 오물 투척 사건이 발생하자 현장 사진 등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유인물을 제작 및 배포한 혐의로 다시 구속되었으나 이듬해 10.26 사건이 일어나자 2개월 후 석방되었다.

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시행되자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4개월 후 풀려났다. 같은 해 12월에는 '무림 사건'으로 다시 연행되어 한 달간 구금되었다.

1981년 3월 박문숙과 결혼했고 1984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상임위원장을 맡으며 일선에 복귀하였다.

1985년 7월, '전두환 방미 반대 기자회견'을 주도했다가 국가모독 혐의로 구속되어 춘천교도소에 수감되었다.[4] 이때 대학가의 학생운동 조직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삼민투)의 배후로 지목되어 장기간 복역했고 1987년 7월 출소했다. 출소하자마자 구속청년학생협의회에 가입했고 같은 해 9월 민청련 부의장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정책실 차장을 맡았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선거 감시단 활동을 지휘했다. 같은 해 12월 16일, 구로구청 선거부정 항의 점거농성 사건이 일어나자 투쟁지도부 상황실장을 맡아 농성을 주도하였다. 이후 6번째로 구속되어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88년 6월 건강에 이상을 느껴 교도소를 상대로 외래진료 요구 투쟁을 벌인 뒤 병원을 찾아 위암 3기 판정을 받고 병보석으로 출소했다. 이후 두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90년 12월 6일, 신천연합병원에서 향년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3. 여담



[1] 현 김해시 한림면.[2] 10월 유신 이후 첫 시위였다.[3] 당시 사형을 선고받은 인물들 중 최연소자였다.[4] 이때 재소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교도소에 외부진료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