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김성집 金晟集 | Kim Seongjip | |
출생 | 1919년 1월 13일 |
경기도 경성부 필운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 |
사망 | 2016년 2월 20일 (향년 97세) |
학력 | 청운공립보통학교[1] (졸업)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보성전문학교 (상과 / 졸업) |
종목 | 역도 |
체급 | 미들급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3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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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역도선수. 현역 시절 별명은 미스터 올림피언이었다.한국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로서[2] 1948 런던 올림픽 역도 종목에서 기념비적인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메달을 수확했다. 이후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도 동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체육계에 있어서도 여러 족적을 남겼다.
2. 생애
1919년 1월 13일 경기도 경성부 필운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서 아버지 김순정과 어머니 송석녀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청운공립보통학교(現 서울청운초등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3년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였다.3. 선수 경력
휘문고등보통학교 2학년 때 대한민국 "역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서상천[3] 교사의 권유로 역도를 시작했다. 당시 역도를 통해 민족정신의 고취에 앞장선다는 서상천이 설립한 중앙체육연구소에 들어가 역도훈련을 시작하였다.휘문고보 3학년 때에는 각종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하기 시작했고, 1936년 5월에 개최된 일본선수권 대회 및 1936 베를린 올림픽 참가 선수 선발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러나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 입문 1년 만에 일본을 제패하고 여러 차례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세우자 일본역도연맹은 아예 1936 베를린 올림픽 역도종목 출전을 포기했다.(...)
1938년에도 올림픽 후보 선수 선발전과 전일본 역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였다. 그러나 1940년 예정된 올림픽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무산되었다. 이로써 올림픽 메달을 향한 그의 꿈은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다가 일제에서 해방이 되자 전성기를 지난 만 29세의 나이로 1948 런던 올림픽에 참가했다. 여기서 역도 미들급 동메달을 획득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메달을 획득하였다.[4][5] 그 후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도 미들급에서 동메달을 따내 대한민국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2회 연속하여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는 기록을 남겼다.
1954 마닐라 아시안 게임에서는 금메달을 획득했고, 1956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만 37세 노장인데도 5위에 입상하였다.
4. 은퇴 이후
만 39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대한역도연맹 전무이사, 부회장, 대한체육회 이사, 사무총장, 아시아경기대회 및 올림픽경기대회 임원으로 활약했다. 1968년부터 1974년까지 8년간 체육회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며 어떤 청탁이나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한 덕분에 '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972 뮌헨 올림픽과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는 한국선수단 단장을 역임했고, 체육회 사무총장에서 물러난 후에는 1976년부터 1994년까지 중간에 다른 직책 맡은 기간 빼고도 13년 7개월 동안이나 태릉선수촌 촌장으로 국가대표 선수들을 육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선수촌장 시절 '호랑이', '염라대왕', '시아버지' 등의 별명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선 체력, 후 기술' 지론대로, 태릉선수촌 시절 지옥훈련으로 악명 높은 불암산 크로스컨트리를 활성화 시켰다.[6] 선수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모두 31개의 올림픽 금메달을 캐냈다.
1970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1984년에 체육훈장 최고등급인 청룡장을 수상하였으며 IOC에서도 올림픽 훈장을 수여한 바가 있다.
2016년 2월 20일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스포츠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점이 인정되어 2019년 10월 25일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5. 수상 기록
올림픽 | ||
동메달 | 1948 런던 | 미들급 |
동메달 | 1952 헬싱키 | 미들급 |
세계선수권 | ||
동메달 | 1947 필라델피아 | 미들급 |
아시안 게임 | ||
금메달 | 1954 마닐라 | 라이트 헤비급 |
6. 여담
- 한국일보의 스포츠 담당 기자이던 오도광(1937~2012)은 김성집이 올림픽 선수단 단장이던 시절 그를 항상 돌 단장이라고 불렀다.[7] 평소 신문사 내에서 직급에 님을 안붙이고 국장, 부장 이라고 부르는 기자 특유의 습관 탓이었는지 모르겠으나, 한참 연상인 김성집을 김 단장도 아니고 돌 단장이라 호칭하는 것에 주변 사람들이 눈총을 주곤 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김성집은 허허 웃으며 받아주었고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김성집이 태릉선수촌장이 되자 오도광의 호칭은 돌 촌장으로 바뀌었다고...
[1] 現 서울청운초등학교[2] 한국인 최초의 메달리스트는 1936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동메달리스트인 손기정, 남승룡이지만 당시 한반도는 일제강점기로서 일본 국적 신분으로 출전한 것이기에 공식적으로는 일본의 메달로 기록이 된다. 다만 IOC에서도 공식적으로 손기정이 한국인이지만 일본 국적으로 출전한 특수성을 약력에 명시하면서 해당 금메달을 국가 기록과는 별개로 한국인이 획득한 메달로 인정하고 있다.[3] 일찍이 유진 섄도우 사진을 보고 감화되어 이른바 '보디빌딩'의 세계에 눈뜬 바, 외국 서적 등을 필사적으로 참고하고 해외 각지에서 웨이트 기구들을 사들였다고 한다. 그로 인해 한국에 중량 운동의 개념이 보급되었다. 다만 그는 실력양성론자였지만 1930년대가 지나며 일제 선전 인사가 되어 비판을 받기도 한다.[4] 영국 BBC 방송 라디오 전파를 빌려 하루 15분씩 한국에 경기 결과를 전하던 서울중앙방송국(現 KBS의 전신)의 민재호 아나운서는 방송 내내 흐느끼다시피 보도했다. 서울과 전국에서 난리가 났다. 3년 전 광복을 재현한 듯한 감동이었다.[5] 해당 올림픽에서 한수안도 복싱 플라이급 동메달을 따면서 한국은 첫 올림픽 참가에 총 2개의 메달을 획득한다. 참고로 해방 이전 조선인 최초의 메달리스트는 많이들 아는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덜 알려졌지만 함께 동메달을 딴 남승룡이다.[6] 태릉선수촌은 불암산 아래에 있고 선수촌 바로 뒤가 불암산인데, 쉽게 말해 선수촌 운동장에서 시작해 불암산 산자락을 그대로 뛰어서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지옥의 체력훈련이었다. 종목을 불문하고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모든 선수들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지옥훈련이었는데, 보통 복싱 선수나 레슬링 선수들이 1등을 차지했고 반대로 체력과 큰 상관이 없는 양궁 선수들이 최하위권에 있었다고 한다. 근데 왜 성적은 양궁이 젤 좋은..읍읍 다만 이는 종목에 따른 특성의 영향이 큰데,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몸을 격하게 써야 하는 복싱 선수들과 레슬링 선수들은 기술 훈련 외에도 기초 체력 훈련을 강하게 하기에 크로스컨트리에 최적화된 반면 사선에서 조용히 집중력을 다듬어 활을 쏴야 하는 양궁의 경우 뜀박질이 필요없는 종목이다. 참고로 축구선수 박지성이 시드니 올림픽 대표로 태릉에 입촌했을 때 전체 선수 중 3위 혹은 4위(기사마다 순위가 다르다)로 크로스컨트리를 완주한 적이 있었는데, 체력 꽤나 쓴다는 다른 종목 선수들도 박지성의 체력엔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7] 머리가 돌이라는 뜻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항상 강직하고 원칙적인 성격 때문에 붙은 별명인 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