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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22:34:47

김승한(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07년 12월 19일[1]
경상북도 봉화군 와단면 소로리
(현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소로리 588번지)[2]
사망 1935년 6월 9일 (향년 27세)
사망지 미상
본관 신 안동 김씨[3]
학력 대구고등보통학교[4] (퇴학)
묘소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소로리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 생애

1907년 12월 19일 경상북도 봉화군 와단면 소로리(현 봉화군 춘양면 소로리 588번지)에서 아버지 김성진(金聖鎭, 1878. 5. 11. ~ ?)[5]과 어머니 창녕 조씨(?. 10. 22. ~ 1959. 3. 20.) 사이에서 3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상북도 대구부 동운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 38-2번지[6] 조병학(曺秉鶴)의 집에 거주했다.[7]

대구고등보통학교[8]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2월 26일,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소재 백대윤(白大潤)의 집에서 윤장혁(尹章赫)·상술상(尙戌祥) 등과 같이 조선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신우동맹(新友同盟)을 비밀리에 조직하였고, 강령을 만들었다. 이후 약소민족의 해방과 일본 제국 타도를 내세우며 각 학급별로 조직을 확대하며 동맹휴교 등을 협의했으나 1928년 6월 11일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대구고등보통학교로부터 퇴학처분을 받았으며, 1929년 8월 7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의 예심에서 공판에 회부되었고, 같은 해 10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미결 구류일수 중 50일 본형에 산입)[9],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사의 공소로 2차례의 구류갱신이 이뤄졌고, 1930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 형사부에서 검사의 공소 이유 없음으로 공소가 기각되어 출옥하였다.##2

출옥 후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35년 6월 9일 사망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판결문에는 12월 10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수형인명부[3] 참봉공(參奉公) 시좌(時佐)파 27세 한(漢) 항렬.[4]경북고등학교[5] 자는 성서(聖瑞).[6] 2024년 현재 이 자리에 엑소디움 센트럴 동인 105동이 들어서 있다.네이버 지도[7] 형사사건부[8]경북고등학교[9] 법정 미결구류 통산일수 13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