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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김일(金一) |
출생 | 1896년 10월 17일 |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장계리 | |
사망 | 1975년 10월 14일 (향년 78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491호 |
서훈 | 대통령표창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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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6년 10월 17일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장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충청북도 지방의 임정특파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8월, 그는 김순호(金順浩), 안교일, 신봉균(申鳳均)[1], 신현구, 유득신, 이길용(李吉用) 등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철혈단(鐵血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서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 1919년 9월에는 혈복단(血復團)을 조직하기도 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공채를 팔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광주(廣州) 수원(水源) 오산(烏山) 등지를 돌아다니는 등 활동을 하였다.1920년 3월에는 혁신단(革新團)이라는 단체와 제휴하여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기도 하였으며, 4월에는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과 제휴했다. 5월에는 김상옥, 한훈, 동순(金東淳) 등 20여 명과 함께 암살 행동반을 조직하여,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의 내한을 기회로 하여 일본 총독을 암살하고 각 관서를 파괴하여 민족의 진의를 전세계에 표명하려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5년 10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