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화랑세기 필사본으로 알려진 남당 박창화(朴昌和)가 남긴 30여 권의 문집. <고구려사초>, <고구려사략> 등 역사서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도 있으나 나머지는 한문 소설이다. 특히 <을불대왕전>, <어을우동전> 등은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쓰인 한문소설이다. 현대 한국인은 대부분 한문 문장을 읽기 힘들고 작가든 독자든 더 이상 한문소설을 쓰고 읽을 수요도 능력도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2. 내용
역사를 바탕으로 썼지만 박창화 본인도 그냥 역사소설로 쓴 책이고, 유족들이 진짜 역사책이라고 주장하는 필사본 화랑세기와 달리 이건 애초에 역사책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전혀 논의도 없었다. 역사물로서 내용을 읽으면 그 질은 상당히 부실하고 교차 검증되지 않는 내용도 많다.그런데도 남당유고가 진짜 역사서라고 신봉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신봉자들은 필사본 화랑세기처럼 남당유고의 다른 책들도 박창화가 일본 궁내청에서 몰래 필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필사본 화랑세기조차 박창화가 창작한 위서로 파악 되는데 남당유고가 진서일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고구려 역사를 다룬 책으로 추모경, 고구려사초, 고구려왕기, 고구려사략 등이 있다. 고구려 역사가 수상할 정도로 자세하게 나와 있다. 사실 생각보다 별 내용 없지만, 그래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보다는 많이 풍부하다. '추모경'에는 북부여의 황제들 뒤에서 3명부터 시작하여 주몽의 삶과 그 주변의 나라들, 동부여의 황제들과 여러 인물들 등등이 나와 있다.
고구려사 중에서 태조대왕이 신명선제 고재사와 태조황제 고궁 두 명으로 분리되어 있다. 물론 태조대왕이 118살을 살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뢰도가 낮으며, 여러 초기 왕들을 합쳤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추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태조왕의 지나치게 긴 수명에 대한 학계의 정설은 원래 별개의 왕가였던 동명성왕계와 태조대왕계의 혈통을 인위적으로 잇다가 발생한 오류라는 설이다. 참고) 실제로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비석의 왕사 기록과 삼국사기의 세대 기록이 다르고 북한에서는 아예 고구려가 기원전 200년에 세워졌다는걸 정사로 삼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태조대왕이 신명성제, 태조황제라는 명칭을 가진 두 사람으로 나누어진 게 확실한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 책을 위서로 보는게 현재 견해이므로 의미는 없다.
백제사는 백제왕기라는 제목으로 나와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구지왕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1]
신라사는 신라사초라는 제목으로 나와있고, 삼국사기보다 60년 기년이 낮다. 남당유고 신봉자들은 김부식이 신라를 사랑하고 고구려와 백제를 싫어하여 고구려의 건국 연도를 의도적으로 줄였다고 주장하나 이는 신빙성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신라가 고구려의 역사를 끌어내렸다고 보기보다는 신라가 자신들의 역사를 이른 시기로 소급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물론 고고학적으로는 고구려 지역 정치체의 등장이 기원전 3세기까지 올라가긴 하나, 고구려 고자묘지명의 기록[2]을 보면 당대 고구려인들이 인식한 고구려의 존속기간은 삼국사기와 크게 차이나지는 않기 때문.
고려사 또한 있는데, 여사열전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개소문전, 을불대왕전, 달문대모기, 오황정기 등의 소설이 있다.
근친 내용과 상세한 성묘사가 많다(...). 동성애도 보인다. 예를 들면 두로가 모본왕의 남첩으로 나온다. 거기에 '상장돈장'은 엄청난 양의 신라인들의 족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