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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1-12 22:40:09

남만기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윤서(胤緖)
본관 영양 남씨[1]
출생 1892년 1월 23일[2]
경상도 영해도호부 오서면 삼계동
(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삼계리)
사망 1974년 10월 5일[3]
경상북도 영덕군
묘소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조금리 우물골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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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남만기는 1892년 1월 23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오서면 삼계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삼계리)에서 아버지 남병희(南秉熙)와 어머니 진성 이씨 이만규(李晩圭)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숙부 남학희(南學熙)에 입양되었다.[4]

그는 1919년 3월 19일 신기동 구장 이현설(李鉉卨)과 이수각(李壽珏)·이현우(李鉉祐)·권재형 등이 주도한 창수면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고, 오후 4시경 창수면 경찰주재소에 이르러 군중과 함께 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과 서류를 파기한 후 객사 및 주임순사 타카기 이사부로(高木伊三郞)의 숙소와 소유물 등을 파괴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된 뒤 약 3개월 동안 미결수 상태로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영덕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4년 10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남만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회령공파(會寧公派) 15대손 만(萬) 항렬. 영양 남씨 23세.[2] 음력 1891년 12월 24일.[3] 남씨대동보 5권 밀직공파(영양 본관)-회령공파 43쪽에는 11월 22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4] 양부 남학희는 본래 생부 남병희의 친동생이나, 남병희가 5촌 당숙인 남수악(南壽岳)에게 입양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6촌지간으로 멀어졌고, 남만기에게도 남병희는 족보상으로 7촌 재종숙(再從叔)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