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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5 23:54:30

노예의 길

파일:노예의 길 책 표지.jpg
<colcolor=black> 노예의 길
The Road to Serfdom
<colbgcolor=#F0C420> 저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한국 발행일 2018년 4월 20일
번역가 김이석
쪽수 328쪽

1. 개요2. 상세3. 평가4. 비판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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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1944년에 영국의 로트렛지 프레스 사를 통해 출판한 저서로써,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집산주의적 계획은, 결국 정치적인 자유도 잃게 만들게 된다는 주장을 골자로 한다.

2. 상세

자유주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책으로써, 해당 저서에서 하이에크는 영국과 미국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인적/정치적 자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경제적 자유'를 "버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를 위하여, 하이에크는 "자본주의에 입각한 자유경제"는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자유"에 기반하여 성립된 것이며, "개인적/정치적 자유" 없이는 "자유경제" 또한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또한,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내지 못하는 한, "어느 특정한 이념/체제/정부"등에 의해 주도되는, 즉 "집산주의적" 계획은, 반드시 "정치적 자유는 물론 개인의 자유 까지 붕괴시킴"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지적하며, "자유경제는 인민의 투쟁으로 쟁취한 자유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도출된 '그나마 나은' 대안"인 고로, 자유경제를 부정하는 집산주의적 계획이 곧 인민의 자유를 파괴하는 반동주의임을 역설한다.

이 책의 제목인 The Road to Serfdom은, 곧 농노의 길[1] 이란 뜻으로,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집산주의적 정책은, 결국 정책의 주체 스스로가, 그들이 그토록 싫어한다고 난리친 지주가 되게 만들 것, 곧, "중세가 가톨릭이라는 공통 가치 하에 영주(지주)가 농노(인민)를 갈취하고, 그 구조 자체도 붕괴한 (앙시앵 레짐)[2]" 것처럼, "공산주의라는 공통 가치 하에, 공산당이 인민을 갈취하고, 그 체제 자체도 결국 붕괴할 것"이라 비꼬는 노골적인 제목이다. 그리고 실제로 80년대 후반부터 공산권 붕괴가 일어났다. 한술 더 떠서, 하이에크는 책 내내 "집산주의는 파시즘이 가면을 쓴것에 불과하다"는 암시까지 하고 있다.즉 파시즘이랑 공산주의랑 본질적으로 같다는 뜻.[3]

3. 평가

이 책은 자유지상주의 고전으로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당대에는 반응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오히려 세간에서 하이에크를 시장을 시대착오적으로 옹호하는 꼴통(...)으로 인식하는 원인이 되어버렸다. 당연하지만 영국의 노동당 하의 영국 정치에서는 인기가 없었으나,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시대, 1980년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의 시대가 열리면서 재평가받았다.

이 책은 단순히 신자유주의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 공산주의를 비판했다고 보기에는 굉장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실의 소련이 농민을 쥐어짜서 얻은 발전의 끝이 결국 소련 해체라는 파멸로 이어진 것에서 노예의 길은 예언서가 되었으며, 이를 넘어서, 이미 전례가 있듯이, 이오시프 스탈린을 그대로 따라한 것에 불과한 이후의 수 많은 "개발독재"의 말로 또한 대부분이 처참한 실패로 마무리됨으로써 노예의 길에서 하이에크가 지적한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적 의도 조차도 초월하는 중이다.[4]

몇 없는 성공 사례 또한, "집산주의적 계획, 곧 개발독재"를 행한 장본인의 의도와 관계 없이 어떠한 식으로던, 자신의 정권 및 그 후예에 의해서든, 아니면 그 반대에 의해서든, 지지한 인민에 의해서든, 반대한 인민에 의해서든, 결국에는 "피 흘려 쟁취한 자유를 파괴하고, 인민을 다시 농노로 전락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노예의 길에서 하이에크는 "우리가 이룩한 경제 성장은 결국 피 흘려 투쟁해 쟁취한 자유가 선물한 것"이기에 "자유 없이는 발전도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4. 비판

허나 노예의 길은 파시즘과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이해도가 대단히 떨어지는 글이다.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파시즘 또한 생산 수단을 공유화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이탈리아 파시즘에서 일어난 생산 수단 공유화 운동은 국가의 강력한 사유화 정책에 의해 짓밟혔으며 나치 독일 역시 정경유착은 있을지언정 생산 수단의 공유화는 없었다. [5]

그리고 하이에크는 소련이 능력에 따른 보상을 해 주지 않았기에 몰락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소련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던 하이에크가 만들어낸 상상이다. 소련은 실적에 따라 임금을 지불했고 인센티브 제도는 이미 스탈린 정권의 산업화 과정에서 확대된지 오래였으며 돌격 노동자나 스타하노프 운동가들, 전문가, 기술자, 공학자, 과학자들은 일반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임금을 수령했다. 이러한 정보는 하이에크가 노예의 길을 쓰던 시점에서 충분히 확보 가능한 것이었기에 이는 하이에크의 조사 부족이나 의도적인 누락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또한, 사상적으로 전혀 다른 파시즘과 사회주의를 결부시킨 것은 상당한 무리수였다. 사회주의는 계급 투쟁을 통해 최종적으로 계급과 국가, 민족이 소멸되어 더 이상의 투쟁을 할 필요가 없는 모두가 평화로운 사회를 꿈꾸지만, 파시즘은 영원한 투쟁을 부르짖고 민족주의를 강조했으며 사회주의의 국제주의 사상을 비판했다. 사회주의에서 영웅주의는 비판의 대상이지만, 파시즘에서는 숭배의 대상이다. 역사학적으로도 사회주의 사가들은 영웅주의 사관을 강력하게 비판한 반면, 파시즘에서는 영웅주의 사관을 강조했다.

상술했듯이 경제에 대한 양자 간의 이해도 달랐다. 게다가 하이에크는 의도적인 왜곡도 저질렀다. 마르크스가 단 한 번도 개념화하거나, 서술, 발언한 적 없는 "우파 사회주의"란 개념을 자기 마음대로 창시해 마르크스가 우파 사회주의를 말한 바 있으며, 나치즘도 우파 사회주의에서 기원하기에 소위 공산주의와 같은 "좌파 사회주의"와 파시즘은 뿌리가 같다고 서술했다.

따라서 노예의 길은 자유주의의 명저나 베스트셀러로 칭송받고 있지만, 파시즘과 사회주의를 빈약한 논리로 결부시키고, 사회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다양한 왜곡을 저지른 문제가 있다. 당대에 반응이 안 좋았던 것도 당연하며 80년대 신자유주의의 발흥과 맞물려 크게 인기를 끌게 된, 시대를 잘 타고난 책이라 할 수 있다.

버몬트 대학 강사였던 에릭 젠시는 자유방임주의 경제는 자원이 무한하게 존재하는 행성에만 적용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지금 지구에서는 경제와 자연, 인간의 문제에서 중앙집권적 방식이 자유방임적 방식보다 더 유용하다고 말하고 그를 유토피아주의자로 말하며 자신의 저서 "노예로 가는 다른 길"에서 비판한 바 있다.[6]

미국의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의 경우에도 노예의 길의 서문에서 복지국가 또한 천천히 노예의 길을 만든다고 비판한 것을 반박하며 스웨덴과 같은 국가들은 복지국가이지만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적이며 자유주의적이고 오히려 완전한 자유방임주의적 사회보다 이런 복지국가 사회가 더 자유시장경제를 보장할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7]

5. 여담

디스토피아 서류처리 인디 게임 Papers, Please는 노예의 길의 논지를 정확히 반영한 가상의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플레이어는 아스토츠카라는 가상의 공산 국가에서 "노동 복권"에 당첨되어 국가가 배정하준 입국 심사관으로써 일하게 되는데, 아스토츠카는 일단 게임 내 등장 국가 중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나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상은 필히 파국으로 갈 것임을 확실시하고 있음으로써, 얼핏 매혹적으로 보이는 집산주의적 계획을 비판하는 하이에크의 저서와 동일한 묘사를 한다.

당대에는 평이 매우 구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이 책을 첫 출간 때부터 극찬(!)한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8] 나치 체제에서 목숨이 오락가락하던 젊은 유태인 청년을 영국에 정착시켜준 보람이 있었던지, 아니면 단순히 브레튼우즈로 가면서 심심하던 차에 흥미진진하게 잘 읽었다는 감사일 뿐인지 알 수는 없지만(...) 케인스의 사상적 후예들이 봤다가는 뜨악할만한 호평을 보냈다.
"이 책은 대단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중요한 것들을 잘 언급한 점에서 감사를 표한다. 이 책의 경제학적 의견 모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덕적, 철학적인 면에서 동의하는 부분이 많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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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의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동명의 책에서 따온 책 제목이다.[2] 본래 교회도 세금은 냈다. (그저 명문법으로 정하지 않았을 뿐. 왜냐면 정해놓으면 필요할때 교회를 ATM으로 못 쓰거든) 영주는 군사력을 세금으로 냈다. 그러나 어느순간 최상위권 귀족들이 주교직을 돌려먹으며 무제한적 면세 혜택을 받아 완전 탈세하는 상황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프랑스는 전대 태양왕의 예산 낭비와의 컴비네이션으로, 돈도 인력도 없는 파산국가로 전락하고 이는 프랑스 대혁명을 불러일으켜, 자유주의를 위한 초석이 되었다.[3] 공산주의의 프라이드 중 하나가 반-파시즘인걸 생각해보면 엄청난 모욕을 시전한 것.[4] 다만 소련의 붕괴의 시초는 고르바초프가 시도한 급진적 개혁과 그에 따른 정치적 사건 때문이었다.[5] 출처:Benito Mussolini parlando di De Ambris con Yvon De Begnac sui "Taccuini mussoliniani"[6] 출처: "The Other Road to Serfdom" The Daily Kos. 20 April 2010.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3 October 2006.[7] 출처:Greg Mankiw (27 November 2006). "Why Hayek Was Wrong: Sachs Responds to Easterly". Greg Mankiw's Blog – Random Observations for Students of Economics.[8] 둘이 매우 다른 경제적,정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사실 고전적이냐 사회적이냐 차이만 있었을 뿐 둘다 보수주의나 공산주의와 거리를 둔 자유주의에 기반한 학자라는걸 기반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9] 하이에크와 케인스의 나이차이는 의외로 16세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케인스는 젊은 시절 1차대전(!)기부터 정계의 주목을 받더니 전간기와 2차대전 중에도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과로하는 바람에 건강이 많이 망가져서 2차대전 종전 얼마 후 60대 초반의 비교적 이른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하이에크는 케인스의 입장에서는 똘똘한 동생(?) 뻘이지만 케인스와 달리 90세 이상 장수하며 쭈글쭈글한 할아버지가 되어서까지 왕성한 정치경제 평론 및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그 결과 사상사적으로는 거의 반세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는 케인스가 비교적 일찍 사망해서 그렇지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호형호제를 할만큼 가까운 선후배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