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otka Island
L'île Nootka
1. 개요
캐나다 서부 브리티시컬럼비아 밴쿠버 섬에 인접에 있는 섬.거리로 보면 사실상 밴쿠버 섬(Vancouver Island)의 일부로 보아도 무방하다. 섬의 면적은 510km²고, 섬 내에 에워트, 크로피쉬 호, 오와 싯사 호 등 여러 호수가 존재한다. 남쪽으로 누트카 만(Nootka Sound)이 있다. 섬의 이름은 이 지역 원주민이 쓰는 누차눌스어(Nuu-Chah-Nulth)에서 유래되었다. 사실 섬의 유래에 별 뜻이 있는건 아니고 1778년 영국의 제임스 쿡이 이곳에 당도했을때 원주민들이 '함께 모이자' 란 뜻의 누차-눌스에서 섬 이름이 유래되었다 한다.
2. 역사
1774년 스페인의 주앙 헤르난데즈가 북서아메리카 항해 도중 처음 발견하였으며, 이후 쿡 선장도 누트카 섬에 발견하여 처음 상륙한 곳에 프렌 들리 코브라는 이름을 지었다.작은 섬이지만, 서부 캐나다에서 최초로 유럽인의 발길이 닿은 곳으로 산타크루즈 데 누카(Santa Cruz de Nuca)이란 이름의 서부 캐나다 최초의 정착지가 스페인에 의해 건설되었다. 스페인은 누에바에스파냐 북쪽 오리건 경계에서 북위 61도(현재 알래스카와 캐나다 유콘 준주 남부)까지를 스페인령으로 선포하고, 산타크루즈 데 누카를 스페인령 누트카의 중심지로 삼았다. 물론 이전부터 북서항로에 관심을 두고 탐험대를 보냈던 영국 역시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고, 아시아와 아메리카, 유럽을 오간 전설적인(?) 무역상 존 미어스(John Meares, 1756 ~ 1809)가 이름을 올린것도 이 시기였다. 그는 스페인이 본격적으로 이곳에 진출하기전 원주민과의 거래를 통해 땅을 사들였다고 주장했다.
어쨌건 1789년 초 마르티네즈(Martinez)가 지휘 하는 전함 라 프린세사(La Princesa)와 곤살로 데 하로가 지휘하는 보급함 산 카를로스로 구성된 스페인 원정대가 누트 카 해협에 도착했다. 마르티네즈는 이 지역을 뉴스페인(Nueva españa)의 영토로 선포한 후 1789년 5월 15일 누트카 섬의 프렌들리 코브 입구를 요새와 정착지를 건설할 부지로 선택했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5월26일에 포병을 배치하고 막사와 화약 창고를 건설 할 수있었다. 새로운 정착지에는 주택과 병원이 포함되었다.
3. 누트카 분쟁(Nootka Crisis / La crise de Nootka)
그런데 마르티네즈가 도착할 무렵 이미 누트카 해협에는 월동을 마친 3척의 선박이 정박하고있었다 . 로버트 그레이가 이끌던 콜롬비아 레디비바(Columbia Rediviva)와 존 캔드릭이 이끄는 레이디워싱턴(Lady Washington) 미국 선박 2척과, 영국인 존 미어스와 윌리엄 더글라스가 이끌던 이피게니아(Iphigenia) 였다 . 존 미어스는 스페인이 요새를 짓기 한 해 전 자신들이 이미 누트카 해협에 당도해 원주민들과 토지거래를 했다고 주장했다.[1]이 선박들은 스페인군에게 나포되었고 선장은 체포되었으며 존 미어스가 함께 데려온 중국인 노동자들도 억류되었다. 며칠 후 스페인군은 이들에게 경고를 주고 선장은 석방시켰지만 얼마 후 누트카 해협을 찾아온 영국 선박 노스아메리카(North America)와 프린세스 로얄(Princess Royal), 아르고나우트(Argonaut)는
영국 선박이 나포되고 선원이 억류되었다는 소식은 곧 영국으로 전달되었다. 당시 총리 소(小) 윌리엄 피트는 스페인 영토에서 영국이 원하는 무역을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스페인은 스페인 탐험가들이 정식으로 땅을 차지했을 때 내려진 1493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근거로 아메리카 북서부 연안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은 그 지역을 실제로 차지하고 있어야만 주권이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쨌건 영국과 스페인은 1790년 부터 세 차례의 협상에 들어갔는데 이 때 영국 대표로 참석한 사람이 다름아닌 조지 밴쿠버(George Vancouver)였다. 밴쿠버는 1차 협상 후 서해안 탐험중에 프레이저 강 하구를 발견했고 이 지역은 훗날 밴쿠버의 기원이 된다.
영국과 스페인은 견제를 위해 강력한 함대를 서로에게 출항시켰다. 사실 이 분쟁의 키는 프랑스가 쥐고 있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이후 스페인 - 프랑스는 보르본(부르봉)으로 이어진 혈맹을 유지해왔으며, 사국동맹전쟁 같은 몇몇 불협화음이 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양국은 서로의 외교정책을 지지해왔다.[2] 프랑스 - 스페인 양국의 연합 전력은 영국으로서도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런데 누트카 분쟁이 발생한 그 해 7월, 우리가 잘 아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대사건이 벌어졌고. 루이 16세 대신 국정을 장악한 국민의회는 프랑스군을 원군으로 파병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번복하여 이 사태에 개입하지 않을것을 천명했다. 스페인은 단독으로 영국과 전쟁을 치르기에는 부담스럽다는 판단을 내렸고, 더군다나 네덜란드와 프로이센도 영국을 지지하자 결국 입장을 바꿔 협상장으로 나왔다.
3.1. 누트카 협정
이렇게 해서 3차례에 걸친 1795년 누트카 협정(Nootka Sound Conventions (Nootka convention), Nootka Agreement / La Convention de Nootka)끝에 양 국의 자유로운 항해권과 어업권, 무주지에 대한 항구건설권을 보장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이 협정으로 "지리적으로 처음 발견했다""교황의 동의가 있었다"같이 타국이 동의하지 않는 국가 일방의 '관습적' '선언적' 주장만으로는 영유권을 주장하기 불충분하다는 것과 거주지건설 같은 물리적인 활동을 동반한 "실효적인 영토점유" 가 있어야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국제법적 원칙이 성립되었다.그러나 스페인 누에바에스파냐의 북쪽 경계는 해결되지 않은 애매한 문제로 남아있었으며, 이 지역에서 영국 상인들의 활동은 계속해서 스페인 제국에 의해 제약받았고, 영국정부 역시, 유럽 대륙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발발로 북미에서 해군과 탐험대를 파견하고, 식민지를 개척할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또한 북서항로를 통한 직교류도 사실상 어렵다는 결과가 밝혀지자 자연스레 관심이 식었다. 이후 영국이 적극적으로 개발한 곳은 프레이저 강 하구의 (오늘날 밴쿠버)와 1849년 밴쿠버 섬 남쪽에 건설한 포트 알버트(오늘날 빅토리아)였다. 스페인 또한 이어진 식민지 독립전쟁으로 캐나다에 대한 관심이 식었고, 1819년 오리건, 워싱턴, BC, 유콘을 포함한 북위 42도 이북의 모든 권리를 미국에 팔았다.스페인의 바톤을 이어받아 미국은 알래스카 남부 북위 54까지 명백한 미국 영토라는 주장을 했고, 1845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제임스 포크진영의 선거 구호도 54도 40분이 아니면 전쟁이다(54° 40' or Fight) 였다. 그러나 이듬해 멕시코와의 전쟁 기운이 감돌자 양면전쟁을 우려한 미국은 영국과 오리건 협정(Oregan Treaty)을 통해 북위 49도를 경계로 국경을 정했고, 누트카 섬이 위치한 서부 캐나다는 영국령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49도 이남 밴쿠버 섬도 미국령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결국 밴쿠버 섬 전체를 영국령 캐나다 땅으로 인정하고 미-캐 국경분쟁을 끝냈다. 덕분에 후방의 위험이 없어지면서 바로 이듬해인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을 치르게 된다.
4. 19, 20세기
이후 누트카섬은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에서 벗어나...다시 조용한 섬으로 돌아갔으며 원주민의 행사나 여름기지로 사용되었다..사실상 캐나다의 행정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영국, 그리고 이를 승계한 캐나다 자치령도 이런 서쪽 구석 벽지의 개발은 잊은듯 보였다(...)이후로도 쭈욱 스페인이 처음 개척하던 때와 별 반 다르지 않은 상태로 이어지고 있으며, 아름다운 풍경, 수려한 경관과 온화한 기후로 은퇴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섬 북동쪽을 중심으로 임업이 활발하다. 주요 교통은 밴쿠버 섬 서부 골드리버와 유콧항과의 정기 페리(UCHUCK社), 경비행기, 혹은 기상이 좋으면 카약으로 해협을 횡단하는 용자들도 있다.
세계 1차대전 후 1923년 브리티시컬럼비아 최초의 캐나다 국가사적지(National Historic Sites of Canada)로 지정되었다.
1933년 최초의 국제적인 자연보호구역 협정이 이루어졌다.
1996년 이 지역의 역사성과 자연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Protected Area(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3] Protected Areas는 내에서는 공통적으로 건설, 건축 및 허가받지 않는 상업적 행위, 화기사용을 금지하며 동물사냥, 식물 채취, 및 지정목적에 반하는 자원채취나 토지이용을 배체하여 자연생태계와 인류를 위한 영구적인 보존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강력한 규제 덕분에 이 지역은 그리스의 아토스 산(카테고리 3), 몽골 복드칸 산(카테로리 1B) 등과 함께 자연과 결합된 인간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있다. 또한 원주민과 스페인이 함께하는 강력한 전통적인 규범조직(Normative)이 유지되고있다.[4]
캐나다 남서부 누트카섬 유캇 인근 카톨릭 교회 건축에도 스페인이 관여했고, 스테인드 글라스와 내부장식도 만들었다. 원주민과 스페인의 문화가 결합한 지역으로 현재도 원주민들이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원주민들의 요청으로 스페인이 관리에 참여하고 있다.[5]
5. 기타
- 누트카를 둘러싼 열강들의 대립을 그려낸 드라마로 타부(드라마)가 있다. 톰 하디 주연.
- O Canada가 현 캐나다의 공식국가로 지정되기 이전, 캐나다의 비공식 국가 "The Maple Leaf Forever"에도 누트카란 지명이 등장한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에서 교역소를 건설 시 양성할 수 있는 원주민 중 하나로 누트카 곤봉병이 등장한다.
[1] 존 미어스는 아일랜드계 영국인 무역업자로 모피교역을 위해 북서 태평양을 탐험하기도 했다. 1786년 알래스카 케나이 동쪽을 발견했으며 1788년 중국 청나라의 광저우와 마카오에서 중국인 선원 50명을 모집해 누트카 해협에 도착했다. 기록상 존 미어스와 함께 도착한 중국인들이 캐나다에 도착한 첫 중국인이다.[2] 스페인의 미국 독립전쟁 참전도 프랑스의 동맹국 자격으로 참전한 것이다.[3] 전 세계에는 약 16만4천개의 보호구역(Protected Area) 존재하며 지구 면적의 15%를 차지한다. 1946년 설립된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이러한 보호구역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단일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별 보호구역은 IUCN 분류와 연동되어 관리된다. 누트카 섬의 남동부와 북서부 지역은 IUCN 분류 중 카테코리 2로 분류되어 관리,보호를 받고 있다.[4] 스페인은 이미 누에바에스파냐 시절부터 광범위한 전통적 규범조직이 형성된 바 있다. 상당수는 현재 독립한 남북아메리카에 언어, 종교, 문화의 형태의 약한 전통으로 지속된다.Declaración normativa 255[5] 다만 스테인드 글라스의 내용물에 대해서는 캐나다 정부 일각에서 좀 비판이 있는듯하다. 정복자처럼 보이는 중앙구도와 주변부에 국한된 원주민들 등. 원주민들의 자치권을 배려해서 공식적인 이의제기는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