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장강순열사 겸 안휘독군 | ||
본명 | 예육계(倪毓桂), 예육풍(倪毓楓) | |
정체 | 倪嗣沖 | |
간체 | 倪嗣冲 | |
한국식 독음 | 예사충 | |
영문 | Ni Sichong | |
자 | 단침(丹忱) | |
호 | 대포(大炮) | |
출생 | 1868년 2월 6일 | |
청나라 안휘성 영주부 부양현 삼탑촌 (현 중국 안후이성 푸양시 잉저우구 싼타지진 싼타촌) | ||
사망 | 1924년 7월 12일 | |
중화민국 톈진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
학력 | 청나라 수재 | |
직업 | 정치가, 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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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말의 군인, 중화민국의 군벌.2. 생애
2.1. 초기 이력
1868년 2월 6일 청나라 안휘성 영주부 부양현 삼탑촌[1]의 관료 집안에서 아버지 예숙(倪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예회증(倪會曾)과 조부 예걸지(倪杰之)는 모두 청나라 관료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예숙으로 청나라 거인 출신인데 위안스카이의 가정 교사를 지낸 일이 있었다. 니쓰충 본인 역시 과거시험을 보아 수재가 되었으며 회군에 입대하면서 군생활을 시작한 후 1895년 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에 들어갔다. 이후 철량이 그를 지부, 흑룡강제법사에 임명하였다. 이후 흑룡강 민정사를 거쳐 동삼성 민정사장이 되었으나 위안스카이가 파면된 이후 비리로 지탄을 받아 면직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복직되어 하남시정사방판군무에 임명되었으며 돤즈구이, 장석란 등과 함께 내각총리대신으로 복직한 위안스카이를 보좌하여 혁명군 진압을 위해 남하하였지만 혁명군과 위안스카이의 협상이 타결되면서 중화민국에 합류, 육군상장으로 승진했다.1913년 계축전쟁이 발발하자 안휘성을 점령하여 그 공으로 안휘도독에 임명되었다. 이후 토비들을 적극적으로 모아 정규군으로 편성하였다. 1915년에 위안스카이가 제제운동을 진행하자 이를 적극 원조했으며 그 공으로 홍헌제제 단행 이후 장쉰, 펑궈장, 강계제, 돤즈구이와 함께 1등 공작에 책봉되었으며 이어 안무장군에 책봉, 휘하의 군사들을 안무군으로 불렀다.
2.2. 호국전쟁에서 장훈복벽
1915년 탕지야오, 량치차오, 차이어, 리례쥔이 호국전쟁을 일으키자 용제광, 장쉰, 펑궈장, 리춘, 돤즈구이, 루룽팅과 함께 연명으로 차이어, 탕지야오 토벌을 통전했다. 하지만 호국군의 세력은 날로 거세져서 위안스카이는 3월에 제제를 취소하고 호국군과 협상해야 했다. 니쓰충은 청나라의 복벽을 원했기 때문에 1916년 위안스카이의 죽음이 다가오자 쉬스창, 장쉰 등과 연락하여 선통제 복위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청실에서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이후 장쉰과 함께 위안스카이의 명을 받고 국내 안정을 명목으로 위안스카이를 임시로 대총통직에 유지시키기 위하여 난징회의를 개최하였으나 펑궈장이 아예 대권을 노리고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그외의 각 성의 대표들이 모두 위안스카이 하야를 요구하는 통에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1916년 6월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리위안훙이 총통이 되자 7월 6일 안휘성장에 임명되었으며 안휘독군 장쉰과 함께 독군단 회의를 개최, 성구연합회를 조직하여 리위안훙을 위협하고 돤치루이를 지지했으나 묘하게 돤치루이에게도 고분고분한 것은 아니라서 장쉰과 함께 수차례 독군회의를 개최하여 사법총장 장소증과 외교총장 탕사오이의 하야를 요구하면서 정부를 위협했고 결국 탕사오이 하야를 이끌어냈다. 이후 뇌진충, 장쉰 등과 함께 복벽에 대해 논했다. 1917년 부원지쟁의 결과로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해임되자 하남의 자오티, 직예의 차오쿤, 산서의 옌시산, 산동의 장회지, 섬서의 진수모, 절강의 양선덕, 복건의 리허우지, 봉천의 장쭤린 등과 함께 독립을 선포하고 돤치루이의 톈진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그러던 중 장쉰이 선통제를 복위시키는 장훈복벽이 일어나자 토역군남로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복벽을 진압했다.
2.3. 호법전쟁
돤치루이 내각 복귀 이후 안휘독군, 장강순열사에 임명되었으며 1차 호법운동이 벌어져 쑨원이 광저우에서 호법정부를 세우자 돤치루이의 무력통일정책을 적극지지하여 호법전쟁에 참여, 1917년 11월 호남 전선에서 패한 돤치루이가 하야하고 왕스전 내각이 출범하여 호법정부와의 협상을 꾀하자 쉬수정의 사주로 차오쿤, 장회지 등과 함께 텐진에서 독군회의를 소집, 남쪽과의 재결전을 주장하며 구체적인 출동병력의 수까지 제시하였고 이에 옌시산, 장쭤린 등 10여명의 독군들이 호응했다. 결국 1918년 3월에 돤치루이가 복직, 내전이 재개되었으며 우페이푸와 차오쿤이 지휘하는 정예부대가 호남성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했다.하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직예군벌이 더 이상 전쟁하길 거부하였고 이 때문에 니쓰충이 파견되어 청첸, 탄옌카이의 상계군벌 및 루룽팅의 계계군벌과 교전했으나 직예군벌의 대타로 투입된 봉천군벌도 군비 배분의 문제로 불만을 품어 장쭤린이 동삼성 순열사에 임명되자마자 전쟁에서 빠져버렸다. 1918년 10월 쉬스창이 대총통에 당선된 이후 장건, 차이위안페이 등의 명사들이 전쟁 중지를 호소하고 량스이 등 교통계 인사들도 가세하였다. 1918년 10월 23일 슝시링, 차이위안페이, 장건 등이 평화기성회를 수립하여 전쟁 중지를 호소하자 먼저 전 대총통 펑궈장이 이를 지지했고 니쓰충 역시 기존의 주전론을 버리고 주화론을 주장하면서 1918년 11월 호법전쟁이 종결되었다.
2.4. 몰락과 말년
이후 안휘성의 지배자로 잘 나갔으며 1919년 5.4운동이 벌어지자 군경을 동원하여 탄압했으나 1920년 7월 안직전쟁에서 안휘군벌이 패배하면서 끈떨어진 신세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니쓰충은 병이 깊어 정무를 보지 못하고 북대하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9월 안휘독군, 장강순열사 직에서 면직되었다. 장쭤린은 그 후임으로 장쉰을 추천했으나 차오쿤은 장문생을 추천하였고 대총통 쉬스창은 장문생을 신임 안휘독군에, 리춘을 신임 장강순열사에 임명했다.면직된 이후 정치에서 은퇴하여 톈진의 조계지에 은거하다가 1924년 병환으로 사망했다.
3. 여담
소설 단에 나오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래 이름은 이사충이고 조선의 구월산에서 수행하다가 중국에 돌아가 성을 예씨로 고치고 호북성의 총독이 되어 수십만 군사를 거느렸고 대충 1930년대 후반에 죽었다고 하는데 실제 니쓰충과는 너무 달라서 별 의미를 찾긴 어려울듯... 이씨였는지, 정말로 조선에서 수행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실제 니쓰충은 안휘성의 지배자였고 호북은 왕잔위안의 지배지였다. 그냥 우스갯소리로 넘어가면 된다.4.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直皖戰爭과 奉天軍閥의 關內進出, 송한용, 중국사연구 28권 28호, 중국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