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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2 00:57:47

니코스 자카리아디스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니코스 자하리아디스
Νίκος Ζαχαριάδης | Nikos Zachariadis
파일:Zachariadis.jpg
출생 1903년 4월 27일
오스만 제국 아드리아노폴리스
사망 1973년 8월 1일 (향년 70세)
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수르구트
국적
[[그리스|]][[틀:국기|]][[틀:국기|]]
가족 파나기오티스 자하리아디스 (아버지)
에라토 프로토파파 (어머니)
누나 2명
남동생 1명
학력 초등학교 (졸업)
중학교 (중퇴)
종교 무신론
직업 정치인
소속 그리스 공산당
서명
파일:니코스 자하리아디스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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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코스 자카리아디스(그리스어: Νίκος Ζαχαριάδης, 러시아어: Ни́кос Захариа́дис, 1903년 4월 27일 ~ 1973년 8월 1일)는 그리스공산주의자이자 그리스 공산당의 서기장이다. 그리스 공산당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니코스 자카리아디스는 1903년 4월 27일,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동부 트라키아의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태어났다. 자카리아디스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타어냈다. 그의 아버지 파나기오티스 자하리아디스는 오스만 담배 독점기관의 감독관으로 일했고, 어머니 에라토 프로토파파는 아르카디아와 키오스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킬리키아의 아다나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직업 특성상 가족은 자주 이사를 다녔으며, 니코스는 여러 도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오스만 제국에서 교육을 받던 부친이 사망하자 15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 노동자로 살았으며,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함께 협상국의 콘스탄틴노플 점령을 목격했다. 최종적으로는 고향인 아드리아노폴리에서 학교를 다녔고, 1917년 중등교육 1학년을 마친 후 학업을 중단했다.

이후 그는 담배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이어서 이스탄불에서 하역 노동자, 흑해 지역의 선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 시기에 그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접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선박노동자였던 자카리아디스는 1921년 콘스탄틴노플에서 공산청년단체의 서기가 되었으며, 소아시아 재앙[1] 이후 소아시아를 떠나 1923년 중반 소련에서 극동노동자공산대학에 다니는 한편 소련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다.

1923년, 니코스 자하리아디스는 튀르키예 공산당 당원이기도 했으며, 같은 해 소비에트 연방으로 가서 모스크바의 동방 노동자 공산주의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24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그는 그리스로 파견되어 그리스 공산주의 청년 연맹(OKNE)의 조직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자카리아디스는 그리스 공산당 간부로 5년을 보냈다. 이후 1927년까지 OKNE에서 활동한 그는 피레우스와 테살리아의 공산당 조직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여러 차례 체포되었지만, 감옥에서 탈출하여 모스크바로 도망쳤다. 따라서 그는 1929년 소련으로 돌아가 레닌대학을 다녔다.

1931년 10월, 코민테른의 개입으로 그는 다시 그리스로 파견되었고, 내부 분열이 심각했던 그리스 공산당을 안정시키기 위해 당의 지도부를 맡았다. 1934년 1월, KKE 중앙위원회는 그를 공식적으로 당의 총서기로 선출했다. 자카리아디스는 1931년부터 1941년까지 그리스 공산당의 서기를 지냈으며, 그 당시 그리스 공산당은 자카리아디스의 지도 아래 탄압에 맞서 지하세포조직을 확대하는 등 조직 개편을 꽤했다. 메탁사스 독재정권이 1936년 8월 4일 계엄령을 선포한 지 1개월이 지난 뒤 자카리아디스를 체포한데 이어 1938년 4월까지 시안토스를 제외한 모든 정치국원이 체포당했다. 그는 9월 17일 체포되어 케르키라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이미 궐석재판에서 선고된 게오르가파파다코스 암살 사건의 혐의로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래도 이 시기를 거치며 그리스 공산당원은 1929년 1,500명에서 1936년에는 15,000명으로 증가했다.


1940년 10월 28일, 이탈리아그리스를 침공하자, 그는 감옥에서 그리스 국민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하며 KKE 당원과 모든 애국 시민들에게 파시스트 침략자들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후 그리스군이 이탈리아군을 국경 너머로 밀어내자, 그는 두 번째 서한을 통해 전쟁이 더 이상 애국적 성격을 띠지 않는다며 이탈리아와 평화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1년 4월,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침공하자, 그는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괴뢰 정부에 의해 독일군에 넘겨졌다. 이후 그는 나치 독일 바이에른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1945년 5월까지 수감되었다. 1945년 5월, 다하우에서 해방된 그는 파리를 거쳐 5월 29일 그리스로 돌아왔다. 자카리아디스가 석방된 것은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패망할 때 즘이었으며, 석방된 뒤 1945년부터 1956년까지 다시 서기로 활동했다. 자카리아디스는 1945년 5월 30일 영국 공군기를 이용해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했다고 한다.[2] 그 시기 그리스 공산당은 이른바 우익들의 백색테러에 저항하기 위한 대중 자위조직 건설을 호소했는데, 자카리아디스의 입장은 우익들이 테러를 중단하지 않으면 무장투쟁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당시 그리스 정부의 백색테러는 극심했다. 그리스 정부는 1945년 말까지 4만 8,956명의 그리스인민해방군(ELAS) 지지자를 수감했고, 이른바 1차 내전 종식을 부른 바르키자 협정 후 1946년 3월 총선까지 1,289명의 ELAS가 학살당했다.[3] 귀국 이후 자카리아디스는 제2차 그리스 내전에서 게릴라전을 이끌 그리스민주군을 창설했고, 3년간의 내전 기간 동안 그리스 우익 정부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다.

1946년 2월, KKE 중앙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에서 그는 다시 당 지도자로 복귀했다. 그는 당시 상황이 무장 투쟁으로의 점진적 이행에 적절하다고 주장하며, 1946년 3월 31일 총선거를 보이콧하도록 지시했다. 이로 인해 그리스 내전이 본격화되었고, 좌파와 우파 간의 극단적 충돌이 발생했다.

1948년 8월, 그는 좌익 무장 조직인 민주군(DSE)의 지도자인 마르코스 바피아디스를 해임하고, 직접 군을 지휘하며 정규전 방식의 전투를 시도했다. 하지만 1949년 8월, 그리스 국군이 그라마스 및 비치 전투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완전히 패퇴시키면서 내전은 공산주의 진영의 패배로 끝났다. KKE 지도부와 남은 공산주의자들은 소련동유럽으로 망명했다.

1949년 10월 16일 그리스 내전은 결과적으로 우익의 승리로 끝났으며, 자카리아디스는 결국 게릴라 2~3천 명과 함께 8월 29~30일 야간을 이용해 알바니아 영토로 퇴각했다. 9월에는 민주군대의 마지막 잔여병력 1,000명이 동부 마케도니아를 떠나 불가리아로 넘어갔으며, 이후 소련 선박들이 알바니아 항구로 들어와 민주군대의 잔존 병력을 태워 소련으로 데리고 갔다. 소련에 도착한 자카리아디스는 소련에서 여생을 보냈다. 니코스 자카리아디스는 처음에는 루마니아부쿠레슈티에 머물렀다가 이후 소비에트 연방으로 이주했다. 그는 민주군이 무기를 내려놓았을 뿐, 투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선언하며, 반대파를 탄압했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 내전 당시 영미 제국주의와 더불어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노선에 대해 강력히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당연히 내전 이후에도 친스탈린 노선을 고수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자카리아디스는 흐루쇼프의 수정주의 노선에 반대했으며, 당연히 소련의 새지도부와 충돌했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소비에트 공산당이 니키타 흐루쇼프의 주도 아래 수정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하면서 그의 입지는 급격히 흔들렸다.

1955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대규모 반(反)자하리아디스 운동이 일어났고, 1956년 3월 KKE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에서 그는 총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즉, 1956년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을 진행하고 난 이후 자카리아디스는 흐루쇼프 세력에 의해 당에서 추방당했으며, 이후 그리스 공산당은 친흐루쇼프 노선을 따르게 됐다.[4] 자카리아디스는 내전 이후 1만 8,000명의 그리스 공산당 성원들과 당시 소련 영토였던 타슈켄트에서 당을 재조직했고, 1950년 10월에 그리스 공산당 제3차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카리아디스는 반스탈린 수정주의 노선에 단호히 반대했으며, 결국 흐루쇼프 하의 소련 공산당은 이 책임을 물어 1957년 2월에 그를 당에서 제명했다.

그의 후임으로 코스타스 콜리야니스가 선출되었다. 1956년, 그는 소련 당국에 의해 모스크바에서 200km 떨어진 보로비치로 유배되었고, 이후 야쿠츠크를 거쳐 1962년에는 더욱 혹독한 시베리아의 수르구트로 이송되었다. 따라서 자카리아디스는 시베리아에 사실상 유폐됐고, 1973년 8월 1일, 그는 수르구트에서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1991년 12월, 그의 유해는 그리스로 송환되어 아테네 1번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여담


[1] 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에 전개된 전쟁이다.[2] 자카리아디스는 다음날 '리조스파스티스'를 통해 8.4왕당파-파시스트 독재정권보다 더 힘들었던 때로 돌아가거나 민족해방전선이 그리스의 민족해방을 위해 인민민주주의 구축을 완성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해결방안이 없다는 귀국 소감을 밝혔다.[3] 부상자는 6,681명이고 총 677곳의 사무실이 파괴됐다.[4] 현재 그리스 공산당이야 반수정주의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 당시 그리스 공산당은 흐루쇼프의 노선부터 1980년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스 공산당이 반수정주의 및 친스탈린주의 노선으로 간 것은 1990년대 소련 해체 이후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