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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1-19 21:22:32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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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jpg
이름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
(영어: Nikephoros Melissenos, 그리스어: Νικηφόρος Μελισσηνός)
출생 1045년
사망 1104년 11월 17일
직위 트레디차와 아나톨리콘의 군사 총독
반란 대상 니키포로스 3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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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반란자. 니키포로스 3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알렉시오스 1세에게 귀순한 뒤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2. 생애

1045년경 도릴리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부르체스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멜리시노스 가문 출신이었다. 부르체스 가문 역시 명문가였지만, 멜리시노스 가문은 8세기부터 뛰어난 장수들을 배출한 최고의 군사 귀족집안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계 성씨를 따랐다. 1067년 이전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여동생 에우도키아 콤니니와 결혼하여 아들 요안니스 콤니노스를 낳았다. 그는 트레디차(현 불가리아 소피아)의 군사 총독을 역임하였으며, 1070년 처남 마누일 콤니노스가 지휘하는 야전군에 합류해 셀주크 투르크군과 맞섰다. 그러나 세바스티아(현 시바스) 인근에서 패배하여 마누일과 함께 붙잡혔다. 하지만 그를 잡은 투르크 족장이 마누일의 설득에 따라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기로 한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1077년 10월 니키포로스 3세미하일 7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미하일 7세에게 충성을 바쳤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아나톨리콘의 군사 총독을 수여받았으나, 니키포로스 3세가 수도를 장악하고 황위에 오른 뒤 가족과 함께 코스 섬에 유배되었다. 1080년 가을 코스 섬을 탈출하여 소아시아로 잠입한 그는 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고, 많은 투르크 병사들을 용병으로 데려왔다. 이후 소아시아 서부와 중부 도시들을 대거 확보하고 니케아로 진군해 별다른 저항 없이 입성했다. 그는 니케아에서 황제를 칭했다.

니키포로스 3세는 유능한 장군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를 파견하려 했지만, 그의 여동생이 그의 아내인 점을 우려해 포기하고 황실 의상 실장 요안니스를 지휘관으로 임명해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진압군은 니케아를 포위했지만 투르크 지원대가 몰려오자 수도로 철수했다. 1081년 3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 해안가인 다말리스에 진을 쳤다. 그는 곧 알렉시오스 1세니키포로스 3세를 몰아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새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제국 영토를 분할하자고 제안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발칸 반도를 갖고, 자신은 소아시아를 갖겠다는 것이었다. 알렉시오스 1세는 그를 카이사르(부황제)로 인정하고 테살로니카 통치권을 맡기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처음엔 제안을 거부했지만, 알렉시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고 나면 같은 수준의 제안이 오지 않을 거라 판단해 결국 동의했다.

1081년 4월 8일, 알렉시오스에 의해 공략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왔다. 알렉시오스는 그를 카이사르로 선임했고, 테살로니키에 대한 일체의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오니아, 프리기아, 갈라티아, 비티니아에 주둔한 투르크군은 그에게 복종하길 거부하고 동로마 제국에서 이탈했다. 1081년 가을, 그는 두라초를 포위한 로베르 기스카르노르만군을 무찌르기 위해 황제와 함께 출진했다. 디라키움 전투에서, 그는 동로마군의 우익부대를 지휘했지만 패전을 막지 못했다. 1083년 라리사를 포위한 보에몽 1세를 무찌르기 위한 원정에 역시 가담했다. 그의 부대가 먼저 테살리아로 접근하자, 노르만군은 그들이 동로마군의 주력군이라고 믿고 공격했다. 이후 이들을 멀리 유인하였고, 그 사이에 알렉시오스 황제가 노르만 진영을 공략했다. 결국 보에몽은 포위망을 풀고 철수해야 했다.

1087년 8월 말, 알렉시오스 황제가 페체네그에 맞서기 위해 벌인 드리스트라 전투에서 동로마 좌익 부대를 이끌었으나 참패하였고, 페체네그에게 붙들렸다가 황제가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풀려났다. 1091년 봄, 아이노스로 가서 불가리아인을 징집한 뒤 황제와 가담하려 했지만, 4월 29일 동로마 제국의 대승으로 끝난 레부니온 전투에는 미처 참여하지 못했다. 1095년 쿠만족과의 전쟁에 참여한 그는 게오르기오스 팔레올로고스와 요안니스 타로노테스와 함께 베르흐 지역을 방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후 은퇴하여 사유지에 은거하였고, 1104년 11월 17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