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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8 20:43:15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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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 로마 제국 카이사르
Seius Sallustius |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
제호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 카이사르
(Seius Sallustius Caesar)
생몰 년도 미상 - 227년
카이사르 재위 기간 225년 ~ 227년
자녀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딸)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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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후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의 아버지이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장인.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았다는 설이 제기되나 불분명하다. 사위의 모후인 율리아 마마이아에게 누명을 쓰고, 재판없이 처형됐다.

2. 행적

율리아 마마이아에게 처형당한 뒤, 기록말살형에 처해져, 비문과 고대 문헌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단지 원로원 의원이라는 정보만 전해졌다. 대개의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사람들처럼 이름조차도 동시대의 어떤 출처에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고, 단지 '알렉산데르 황제의 장인'이라고만 기술되었다. 다행히 후대 역사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는 그를 마크리아누스 또는 마크리누스라고 칭했다.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는 고고학자들이 그의 딸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의 주화를 발굴하고,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낸 전체 이름인 '그나이아 세이아 헤렌니아 살루스티아 바르비아 오르비아나'에서 찾아 유추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알렉산데르의 장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치세 때 마우레타니아 총독이었던 퀸투스 살루스티우스 마크리아누스 또는 그의 아들과 동일하거나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밝힌 '마크리아누스'라는 이름은 마냥 꾸며낸 게 아닌 셈이다. 한편, 조부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소꿉친구이며 명상록 보급에 기여한 원로원 의원 푸블리우스 세이우스 푸스키아누스[1]라는 설도 있으나,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가 기록말살형된 까닭에 미궁이다.

후기 고대 작가 폴레미우스 실비우스는 반란자 살루스티우스를 언급했다. 그는 이 살루스티우스가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통치기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술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살루스티우스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장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알려진 바로는 그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상대로 반란을 도모한 적도 없고 황위 계승자로 자처한 적도 없었기에 실비우스가 언급한 반란자와 같은 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현재 연구 결과로 밝혀진 이름은 루키우스 세이우스 헤렌니우스 살루스티우스 마크리아누스로 추정된다. 이는 그가 여러 기록에서 중구난방으로 살루스티우스 마크리누스, 루키우스 세이우스 등으로 적힌 까닭이 크다.[2] 데키우스 황제의 아내 헤레니아 에트루킬라의 친정인 헤렌니우스 가문과는 이름상 친인척으로 보이나 확실치 않다. 다만, 오래된 이탈리아의 노빌레스로 원로원 의원이었고, 딸이 간택되기 전까지는 권력과 가깝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율리아 마마이아의 결정으로 225년 딸이 알렉산데르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사회적 지위가 급상승했다. 이 결혼은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가 공을 들여 성사시킨 정략혼이 아니라, 황제의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가 주선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정치적 영향력이 떨어지는 이탈리아 출신 원로원 의원 중 한명의 딸을 황후로 맞이한다면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던 듯하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인용한 푸블리우스 헤레니우스 덱시포스의 역사서에 따르면, 알렉산데르는 장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하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대의 역사가, 황실 서기, 관료인 헤로디아누스, 권세가 디오 카시우스 등 동시대 문헌에는 그런 이야기가 전혀 나와있지 않고, 고고학적 물증도 없기에 불분명하다.

율리아 마마이아는 처음에는 자기가 가려뽑은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우구스타 칭호를 자기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는데, 며느리가 황후가 되면서 아우구스타 칭호를 공유하게 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오르비아나는 어린 나이에도 당돌하고 할 말을 다하는 성격이어서, 남편을 조종하는 시어머니에 맞섰다. 이로 인해 결혼 생활이 2년째 접어드는 시점부터 마마이아와 살루스티우스 부녀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마마이아는 성인이 된 아들의 사생활 전반을 대놓고 통제했고, 며느리를 온갖 트집을 잡으며 핍박했다고 한다.

227년 8월 이후, 마마이아에게 딸이 노골적으로 자진 추방 등을 강요당하고, 8월 말 친정으로 딸 오르비아나가 쫓겨나 황궁 출입을 금지당했다. 이런 가운데, 살루스티우스가 황제, 울피아누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를 각각 외면, 상담 후 검토만 했고, 세이우스는 최후의 방도로 현직 아우구스타인 딸을 경호해주는 프라이토리아니 막사를 찾아갔다.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피신했다고 하는데, 이는 정황상 알렉산데르 황제가 배려한 까닭이라는 평이 많다. 이때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는 법의 보호에 따라 마마이아의 핍박, 협박에서 딸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행동은 8월 첫날부터 며느리를 제거하려는 마마이아에게 숙청 명분이 됐다. 마마이아는 이를 빌미삼아 그가 근위대를 이용해 알렉산데르와 자신을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몰아세웠다.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장인이 억울하다는 걸 알았지만, 대들지도 못하고 명을 받자마자 어머니의 말에 순종했다. 따라서 기세 등등해진 마마이아는 명을 내려, 그날 밤에 자택에서 체포된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는 재판없이 곧바로 참수됐다. 이 사건 후, 마마이아는 그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그 일가와 친구들을 추방하거나 재산몰수를 명했다. 이어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을 징계했다. 이때 병사들은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에게 직간접적으로 지지를 표하거나, 어떤 움직임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하지만 마마이아는 오만하게 그들을 징계했다. 따라서 프라이토리아니의 분노는 치솟았고, 이 사건은 228년 초여름에 벌어진 일이 발화점이 되면서 알렉산데르의 섭정, 멘토인 울피아누스가 암살되는 일로 연결된다.

이상은 헤로디아누스가 전하는 내용으로, 현대까지 일반적으로 연구 등을 통해 정설로 알려진 이야기이다. 반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인용한 덱시포스의 역사서는 다르게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카이사르 칭호를 받은 '마크리아누스'는 나중에 황제를 암살하여 황위를 찬탈하려 했지만 계획이 발각되는 바람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마마이아가 주장한 내용인데다 민간에서 전해진 야사가 많이 섞인 후대의 구전 등이 담겨 있어 상대적으로 신뢰가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가 처형된 뒤, 오르비아나는 마마이아의 명령으로 곧바로 아우구스타 칭호가 박탈됐고, 228년 1월 아프리카 속주를 거쳐, 오늘날의 리비아인 트리폴리타니아 해안의 황무지로 추방됐다.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동갑내기 소꿉친구로, 황제의 친구 중 아미쿠스(친구)로 분류될 만큼, 마르쿠스 황제와 가까웠다.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188년 집정관 모두를 마르쿠스 황제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지냈고, 마르코만니 전쟁 당시에는 황제 막사에 상주하면서 야전사령관으로도 여러 군사작전을 지휘해 성과를 냈다.[2] 연구자들에 따라,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의 이름은 여러 가지가 언급되고 있다. 다수설로 인정받고 있는 루키우스 세이우스 헤렌니우스 살루스티우스 마크리아누스(또는 마크리누스) 외에도, 살루스티우스 마크리누스, 그나이우스 살루스티우스 마크리누스, 루키우스 세이우스 마크리아누스, 루키우스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 루키우스 살루스티우스 헤렌니우스 세이우스라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