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51년 1월 20일, 충청북도 단양군 곡계굴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피난민들이 희생된 사건.2. 전개 과정
2.1. 미군의 피난민 대책과 폭격
"전선의 전방지역에서 적의 은신처로 이용되거나 이용될 소지가 있는 모든 거주지 및 건물을 지체 없이 조직적으로 파괴하라. 공중공격, 그리고 포격 소이탄 등 가용한 지상공격 수단들을 동원하라."[1]
작전지시 X17244(1951.01.14)
작전지시 X17244(1951.01.14)
"화염에 휩싸인 마을과 집들에서 나온 연기가 단양 인근의 계곡들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 사람들은 왜 미군이 적이 없는 마을을 불태우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 집들을 불태워 이미 8천 명의 피난민이 발생했고 앞으로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노인, 장애인, 어린아이들입니다. 이 작전이 가져올 끔찍한 영향과 비교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빈약합니다. 저는 무차별적인 이 소각작전을 선별적 소각으로 대체할 것을 건의합니다."
바 7사단장이 알몬드 10군단장에게 보낸 편지
바 7사단장이 알몬드 10군단장에게 보낸 편지
1951년 1월은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 유엔군이 후퇴하고 조선인민군과 중공군이 남하하는 형국이었다. 1월 15일 경부터 인민군의 침투는 봉쇄되는가 했지만 인민군은 중부내륙의 후방지역으로도 진출하였다. 이 때문에 미군은 침투한 인민군을 제거하고 더 이상의 남하를 막아야 했다. 미8군 사령관 매튜 B. 리지웨이[2]는 게릴라로 활동하는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폭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게릴라 활동지역의 집들을 소각하는 작전에 더 많은 항공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썼다.
그리하여 폭격을 지시하는 명령이 미군부대에 하달되었다. 1951년 1월 14일 인민군이 침투한 지역에서 작전 중인 미군과 한국군 부대에 적의 은신처로 이용되거나 이용될 소지가 있는 모든 건물울 파괴하라는 내용의 작전명령이 내려졌다. 1월 16일에는 미7사단 예하 제31연대에 작전지역 내 모든 마을을 소각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1월 18일에는 미17연대에 공중공격을 대대적으로 단행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이로 인해 인민군이 침투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지역에는 대대적인 폭격과 주거지 소각이 발생했다. 당장 훗날 곡계굴을 폭격하게 될 미 5공군 49폭격대만 하여도 1951년 1월 한 달 간 2,613회의 유효출격을 기록하였다.[3][4]
충청북도 단양 역시 폭격지역에 속해 있었다. 1월 18일만 해도 7사단 관할 지역 내의 23개의 도시와 마을이 전소되었다. 다음날인 19일에는 15개의 마을이 전소되었다. 1월 20일에서도 대대적인 소각작전이 보고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폭격으로 파괴된 구역들이 정말 인민군의 침투와 있는지를 확신할 수는 없다는 데 있었다.[5]
2.2. 피난민을 향한 폭격
"냉기를 피해 굴 바닥에 깔아두었던 짚더미에 불이 붙고, 유독가스로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땔감이 없어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베어버렸던 시절이라 도대체 불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흙바닥이 타고 있지 뭡니까. 유황처럼 끈적이는 것이, 손에 묻으면 불이 붙었어요. 바위로 된 굴이라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숨을 참으면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나만 이렇게 살아 남았습니다."
곡계굴 생존자 엄한원 씨의 증언
곡계굴 생존자 엄한원 씨의 증언
10시 55분 : DS5604 지역에 13대의 비행기가 동굴 속 적군과 다수의 짐실이 가축들을 공중공격. 다수의 사상자 발생. 가축들을 모두 잡았음.
미 7사단 작전일지(1951.01.20)
미 7사단 작전일지(1951.01.20)
이런 상황에서 단양군 영춘면의 마을 주민들은 피난을 가려고 했지만 미군에 의해 저지당했다. 미군은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서 피난민들의 이동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6] 그러자 마을 주민들은 근처의 곡계굴로 향했다. 다른 지역에서 온 피난민들 역시 같은 선택을 했다. 곡계굴은 석회암 자연동굴로 좁은 입구에도 불구하고 83m의 길이와 복잡한 지형이었기에 전투와 추위에서 벗어날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이었다.[7] 주민들은 굴 안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냉기를 피하고자 바닥에 짚을 깔고 짐은 굴 입구 근처에 두었다.
그러는 사이 미군은 영춘면 일대에서 인민군을 발견하고 전투와 폭격을 가했다. 공중정찰을 통해 인민군의 위치를 파악하였기 때문이었다. 1월 20일 미6147전략통제단 소속 정찰기는 이날 오전 8시 30분경 인민군 50여 명이 10마리의 가축을 끌고 가는 것을 발견하고 폭격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이날 오전 9시 50분부터 미35전투요격단 소속의 F-51 2대가 영춘면 용진리 북부지역에 네이팜탄 폭격을 감행했다. 또한 이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폭격일정으로 인해 미49전투단 제7, 9전투폭격대 소속 F-80 8대와 T-33 1대가 합류하여 10시 25분부터 11시까지 영춘 일대를 폭격하였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폭격이 이어졌다.
이 폭격은 곡계굴에 은신하던 피난민들한테 이어졌다. 오전 10시경 곡계굴 위치한 영춘면 상리에도 공중 공격이 있었다.[8][9] 당시 몇 명의 어린이들이 굴 밖에서 놀고 있었는데, 비행기가 하강하자 이들은 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들이 굴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폭격이 시작되었다. 네이팜탄 투하로 인해 불길과 연기가 치솟았고 이것이 굴 내부로 유입되었다. 피난민들은 우왕좌왕하는 나머지 일부는 굴 내부로 더 깊이 들어갔고 일부는 굴 밖으로 뛰쳐나왔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유독가스로 인해 질식사했으며, 굴을 탈출한 피난민들도 일부가 기총사격으로 인해 사망했다.[10]
3. 피해와 진상규명
이 폭격으로 인하여 최소 171명[11] 최대 360명[12]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유족회에 따르면 최소 수치보다 더 많은 이가 목숨을 잃은 이유는 미군들이 다른 지역에서 온 피난민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13] 한편 피난민들이 가족 단위로 있었기 때문에 많은 유족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신고할 때 여러 명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았다.[14][15]이 사건은 그동안 묻혀져 있다가 1999년 AP통신이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보도한 것을 이래로 지역언론이 취재를 시작하면서 알려졌다. 그리하여 같은 해 유족회가 결성되고 2003년부터 매년 위령제가 열렸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 결과 피난민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곡계굴에서 희생되었다는 조사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를 토대로 2010년 단양군은 이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곡계굴 입구에 위령비와 제단, 광장, 주차장 등을 조성하였다. 현재 유족들은 특별법의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2021년 단양군은 무연고 사망자들이 묻힌 곳을 발굴하고 유해를 국가위령시설에 안치하기로 하였다.#
4. 기타
2020년 6월 24일 6.25 전쟁 70주기를 기하여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1951년... 그날은 내가 죽은날이야》가 KBS청주에서 방영되었다.2020년 6월 25일 이 사건을 다룬 청소년소설 <곡계굴의 전설>이 저자 '김정희' 고래가숨쉬는도서관에서 출간되었다.
5. 참고 자료
6. 관련 문서
[1] 이 명령은 인민군 침투경로인 충북, 경북 북부징역에서 작전 중이던 미7사단, 한국군 5사단 및 8사단에게 내려진 명령이다.[2] 1950년 12월 23일 전 사령관 월튼 워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었기에 사흘 후인 12월 26일부터 부임하였다.[3] 전달의 횟수는 2,473회였으니 전달보다 140회 증가한 것이다.[4] 한편 이 작전에 대해 7사단장 데이빗 G. 바는 10사단장 에드워드 알몬드에게 이 작전에 대한 회의감을 편지로 써 보냈으나 알몬드는 '조직적 소각' 지시가 '무차별한 소각'은 아니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는 정책결정 지휘관과 현장 지휘관 간의 해석 불일치가 있음을 보여준다.[5] 미군의 이 파괴작전은 분명 국제인도법의 원칙에 반하는 것인데다가 리지웨이가 내려보낸 '남한에서의 파괴정책'이라는 지시서에도 반하는 것이었다. 문서는 분명히 파괴정책의 적법한 목표물은 군사시설 및 군사목적으로 이용될 전신·전화·항만시설로 한정하였으며, 전력발전소 및 수력시설 등 민간 기반시설 등에 대한 파괴를 금지하였다. 또한 장차 적군의 본부로 이용될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건물을 파괴하지 못한다라고 명시해놓았다.[6] 미 32연대 1951년 1월 보고서에 따르면 인민군의 침투 위협을 제거하고자 단양 인근 모든 검문지점에서 피난민을 다른 지역으로 돌려보내고, 밤에 허가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적으로 간주해 총격할 것을 허가하였다.[7] 증언에 따르면 일제 강제동원에 끌려갔다 돌아온 한 주민이 "원자폭탄이 떨어져도 끄덕없다"라고 말해 다들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8] 미 17연대 작전일지와 미7사단 작전일지에는 동굴을 공격했다는 글자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미군 문서 기록된 폭격대상지역을 알아본 결과 그 지역 내의 동굴은 곡계굴밖에 없었다고 한다.[9] 미군은 곡계굴이 인민군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목격자들의 증언과 인민군의 방어행동을 고려했을 때 곡계굴 내부나 근처에 인민군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10]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미군의 이런 행동에 대해 국제인도법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있다. "당시 미군은 첫째, 피난이 저지된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보완적 조치를 다하지 않았던 책임이 있다. 둘째, 곡계굴에 있는 사람들이 민간인인지 인민군인지 충분히 검토한 다음 폭격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셋째, 조종는 굴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이 민간인인지 인민군인지 여부를 판단한 다음 기총소사를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미군은 민간인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11]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추산. 사망 167, 부상 4.[12] 유족회 추산[13] 실제로 무연고 사망자만 해도 최소 1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강원도 평창군, 영월군 등지에서 온 피난민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수습해줄 이가 없어 시신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후 피난에서 돌아온 면사무소 직원이 시신을 수습해주었다고 한다.[14] 보고서의 신청인 정보를 보면 가족 사망자가 12명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15] 곡계굴 바로 근처의 상2리의 경우에는 이 마을이 조씨 집성촌이었는데 80% 이상이 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