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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02:32:30

두씨(삼국지)

杜氏
? ~ 235년 이후
1. 개요2. 생애3. 평가
3.1. 관우와 얽힌 기록에 대한 견해
4. 기타 창작물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여성이자 진의록아내, 조조의 아내, 진랑, 조림(曹林), 조곤, 금향공주어머니로 봉호는 패왕태비(沛王太妃).

2. 생애

본래 두씨는 여포의 수하 장수인 진의록의 처였고 진의록과의 사이에서 진랑이라는 아들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진의록이 원술에게 사신으로 가서[1] 새로운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자 하비에 남겨진다. 두씨는 미녀였는데 유비 수하의 관우도 그 미모를 알았던 모양이다. 조조여포를 하비에서 포위할 때 관우가 두씨를 자기가 아내로 삼고 싶다고 하자 조조는 이걸 승낙한다. 시간이 흘러 하비성이 함락 직전 상태가 되자 관우는 다시 찾아와 두씨를 자신이 취하겠다는 약속을 여러 번 상기시켰는데, 조조가 이상하게 여겨 하비성 함락 이후 확인하니 두씨가 미인이었기에 자신이 두씨를 차지해 버린다. 조조가 약속을 어기자 관우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진랑의 아버지 이름은 진의록이고 여포의 사자로 원술에게 갔을 때, 한나라 종실의 여자를 배필로 얻었다. 그의 전처 두씨는 하비에 남았다. 여포가 포위되었을 때, 관우는 두씨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조조에게 여러 차례 청하자, 조조는 두씨가 얼마나 미인인지 관심이 생겼다. 그러나 여포 토벌 후, 두씨가 미인임을 알게 된 조조는 약속을 어기고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 삼국지 위서 명제기 주석 헌제전

화양국지》의 기록에서는 관우가 두씨를 청하면서 자기 처가 자식이 없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화양국지 기록은 여포가 포위된 곳이 복양이고 여포가 진의록을 보내 구원을 요청한 사람도 장양이라고 잘못 적었고 다른 기록에서는 다 아내로 원한다고 적은 것 때문인지 배송지가 인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삼국지집해 관우전에서 청나라 학자 반미(潘眉)가 '화양국지에선 관우가 처가 자식이 없다고 하는 게 다르다'라고 언급한 것이 나온다. 이 기록은 청나라 강희 연간에 나온 관우조묘호기와 모순되는데 거기에는 관평은 178년생이므로 이미 관우에겐 자식이 있었던 게 된다.

삼국지집해》 조운전에서 학자 노필은 이와 비슷한 일화인 조운계양에서 번씨와의 혼인을 거절한 일을 칭찬하면서 두씨를 원한 관우의 행동을 꼬집었다.
번씨는 나라에서 으뜸가는 미인이고, 또한 과부로 지내나, 자룡(조운)이 취하지 않았으니, 관우가 진의록의 처에게 장가들길 청하여 어긋난 것보다 현명하도다.
- 삼국지집해 조운전

두씨의 전 남편 진의록은 그래도 장비의 설득에 넘어가 조조를 배신하지만 다시 조조에게 귀순하는 도중 장비에게 잘못 걸려서 죽임을 당한다.
(여포가 항복하자) 진의록도 조조에게 항복했고, 질장(銍長)에 임명되었다. 나중에 유비가 소패로 가게 되었는데, 장비도 따라 갔다. 장비가 진의록을 만나서 말했다.

"그대는 처를 빼앗아 간 사람에게 부하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란 말이오? 우리랑 같이 갑시다."
그래서 진의록은 장비를 따라 수백 리를 갔는데, 후회를 하며 되돌아가려고 했고 그래서 장비가 진의록을 죽였다.
- 삼국지 위서 명제기 주석 헌제

두씨와 진의록의 아들인 진랑은 조조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이후 두씨는 조조와의 사이에서 아들 조림, 조곤을 낳았다. (무문세왕공전) 두씨가 패왕태비라고 칭해지는 것은 두씨의 아들 조림이 패왕(沛王)의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또 두씨가 조조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하안과 결혼한 금향공주가 있다.
하안의 부인은 금향공주로 하안과 어머니가 같은 누이동생이다. 공주가 그 모친인 패왕태비(沛王太妃)에게 말했다.
"하안이 날이 갈수록 그르쳐지니 장차 어찌 보신(保身)하겠습니까?"
모친이 웃으며 말했다.
"하안을 투기하지 말거라."
- 삼국지 위서 하안전 주석 위말전

235년 가을, 조곤이 병에 걸리자 조예는 조곤의 태비와 조곤의 형제 조림에게 하여금 조곤의 문병을 가게 한다. 여기서 태비는 조곤의 모친인 두씨로 보인다. 두씨는 이 시기까지는 생존해있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후 두씨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두씨의 연령이 불분명하나 유비나 조조와 같은 세대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은만큼 이 기록 직후에 세상을 떠났어도 이상하지 않다.
235년 가을에 조곤이 병에 걸렸는데, 명제(조예)가 조서를 내려 태의를 보내 그의 병세를 진단하도록 했으며, 전중이나 근위병에게 명제가 친히 쓴 조서를 보내왔고, 그에게 진귀한 보물을 보냈고, 또 태비와 패왕 조림을 함께 파견하여, 그의 병세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 삼국지 위서 무문세왕공전

3. 평가

3.1. 관우와 얽힌 기록에 대한 견해

연의로 알려진 관우의 이미지가 워낙 고고하다 보니 두씨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몇몇 사람들은 "관우가 남의 여자를 달라고 하다니!"라며 놀라기도 한다. 물론 두씨를 취한 것은 조조지만, 조조는 원래부터 호색한 이미지였기 때문에 깬다는 사람은 딱히 없다. 다만 전처라고 기록된 것과 진의록이 한나라 유씨 여자랑 결혼했다는 것을 언급한 것을 보면 이미 두씨는 이혼녀의 위치였다. 전처라는 단어는 이혼하거나 사별한 아내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부녀를 취했다가 비난을 받은 조비와 달리 두씨를 취한 건에 대해 조조가 비난을 받은 적은 없었다.[2]

화양국지 기록에서 관우가 두씨를 청하며 자기 처가 자식이 없다고 덧붙였으니, 관우는 이미 아내가 있으면서 자식을 얻으려고 두씨를 원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후한난세 시기에는 중혼일부다처제, 약탈혼이 성행했기에 관우가 역적으로 낙인찍인 여포 세력 진의록의 이혼녀라 돌싱인 전처를 또 다른 처로 들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고대, 중세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여성에게 있어 최악의 흠결이었고, 조선시대에만 해도 칠거지악으로 남아 있을 지경이었다. 최소한 후한 시대에는 두씨를 달라며 관우가 내세운 명분의 설득력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두씨는 관우가 데려가도 축첩이 당연하던 시대인데다가 두씨는 유부녀가 아닌 돌싱인 전처였기에[3] 남의 아내를 탐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요점에서 벗어나고.[4] 거의 2천 년 전 고대에 살았던 사람에게 현대인들의 도덕적인 관념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조야 그 대명사이고 당대에도 인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유비도 처 다수를 두었으며 친족 유장을 배신하고 익주를 병탄한 후엔 유모의 전처였던 오씨를 취해 아내로 삼기도 했다.

관우와 두씨의 관계가 오늘날의 삼국지 독자들에게 매우 강렬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관우가 연의로 인해 신격화되는 과정에서 그의 인간적인 부분이 자연스럽게 숨겨졌기 때문이다.[5] 역사상의 실존인물 관우는 당연히 인간이며,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화를 내거나 질투도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한다.[6] 관우가 조조와 동급의 호색한으로 폄하되었다기보다는, 관우도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욕구로부터 초연한 존재는 아니라는 일화로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정사의 관우는 자신과 친한 서황이 갑자기 자기를 잡으라고 명령을 내자 놀라 당황하기도 하고, 촉에서 황충이 자신과 같은 급에 놓이자 질투를 했다가 비시에게 지적당해 바로 반성하기도 하고, 제갈량에게 마초가 본인보다 못하다는 평을 듣자 은근히 좋아하기도 하는 등 굉장히 인간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즉 그가 당대에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장수라는 것은 팩트이지만, 단점도 있고 실수도 하는 등 무슨 신적인 존재는 아니었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을 나타내는 일화일 뿐이다. 관우도 그냥 남자로서 미인을 보고 탐이 난 것일 뿐, 그 이상으로 불필요한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당대의 한계로 그렇게 큰 도덕적 흠결도 아니었던 행동이었던 것을 후대 사람들이 후대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폄훼할 필요도 없다.

만약 이런 행동이 당대 기준으로도 문제가 되었다면 '관우가 남의 처를 탐했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기록이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나 그렇지 않다. 관우의 행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한 노필은 청나라 말기 사람으로 관우보다 1500년도 더 뒤의 인물이다. 옛날 사람들의 행동을 후세인들이 자신들의 시대적 기준으로 평가해 도덕적으로 문제시되는 경우는 흔하다. 당시 기준으로 비판받지 않은 행동을 두고 2천 년 가까이 지난 후대의 기준을 들이대면서 관우의 행동을 평가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상술했다시피 관우를 신격화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당대에 비난받지도 않았던 행위를 1800년 뒤인 현대 기준을 들이대며 억지로 깔 필요도 없다. 심지어 현재 기준으로도 사실 따지고보면 이혼녀를 노린 것은 문제가 될 일이 아니다. 남의 처가 아닌 이혼녀였기에, 당시 후한 사회상으로 문제가 없었으며 이혼녀도 아니고, 과부도 아닌 유부녀 견씨를 건드렸다가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고, 이를 허락해준 조조까지 비난 받게 만든 조비의 사례랑 비교된다.[7]

몇몇 사람들은 관우가 조조를 섬기지 않은 것이 이 사건으로 인한 앙금도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물론 관우조조를 끝까지 섬기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유비와의 신의 때문이다. 장료가 "왜 승상(조조)께서 잘 해 주시는데 몰라 주느냐?"고 떠보자 "조공(조조)께서 후하게 대해 주시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난 유장군(유비)에게 두터은 은혜를 입었고, 같이 죽기로 맹세한 사이다. 그래도 조공의 후의에는 보답하고 떠나겠다."며 유비와의 신의 때문에 조조를 섬길 수 없음을 확실히 명시했다. 이후 백마와 연진을 놓고 원소싸울 때 관우가 안량을 격파하면서 한수정후에 올랐고, 조조는 어떻게든 관우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더욱 두텁게 대했으나 관우는 조조에게 받은 것을 모두 남기고 떠났다.

물론 인간적인 면으로 보면 두씨를 조조가 가로챈 일이 관우가 조조를 자기가 섬길 사람이 아니라고 마음을 굳히는 데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 분명 두씨를 자기에게 주겠다고 직접 약속까지 한 권력자가 그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며 가로챘으니, 두씨를 얻고 못 얻고를 떠나 자기 말을 손쉽게 바꾸니 신의가 없어 따르지 않겠다고 여겨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즉 단순히 여자를 뺏겨서 서운하다는 데 포인트를 둘 것이 아니라, 한 세력의 군주란 인물이 여러 차례 굳게 약속했던 것을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꾼 것 때문에 신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두씨 입장에서는 관우보다 조조에게 재가한 것이 결과적으로 이득이 되었다. 조조가 신의를 지켜서 관우의 후처로 재가했으면 감부인, 미부인을 비롯한 다른 유비 세력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오래도록 고생하거나 비명에 갔을 수도 있고, 아들 진랑은 생부 진의록을 죽인 장비를 숙부라고 부르며 웃어른으로 모셔야 한다. 어떻게 어려움을 모두 극복하고 노년까지 관우와 함께 했다 쳐도 관우는 결국 형주 공방전에서 패사하는 관계로 말년도 불우했을 것이다.

4. 기타 창작물

파일:Dushi_(1MROTKS).png 파일:external/bbsimg.ali213.net/183850zg5f4gy9o4rf9zii.jpg
100만인의 삼국지 삼국지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1367.jpg
삼국지 13 PK, 14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11 콘솔판에 추가되면서 첫 등장하며, 특기는 내조. 능력치는 통솔력 14/무력 3/지력 52/정치력 48/매력 82로 심하게 잉여다.

삼국지 12에서는 미등장했다가 삼국지 13 PK에서 복귀했다. 능력치는 통솔 26, 무력 41, 지력 52, 정치 63으로 전형적인 C급에 부여받은 특기는 농업 2, 교섭 2, 인덕 3, 신속 1 (진의록 인연 효과)이다. 전수 특기는 인덕이며 전법은 창방약화. 정사건 연의건 야사건 두씨에 대한 기록이라고는 조조의 첩이 됐다는 것, 관우가 첩으로 삼길 바랐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뜬금없이 인덕을 3레벨이나 들고 나왔다. 어차피 지력이 낮아 순욱이나 유비만큼 등용을 밥 먹듯이 하지는 못 할테지만 삼국지 세계관 최고 미녀들인 견희, 강동이교, 심지어 그 초선도 부여 받지 못한 인덕 특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다. 이건 대놓고 여포군을 밀어주기 위한 장치라고 밖에 안 보인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16, 무력 3, 지력 50, 정치 48, 매력 67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10, 무력이 38, 지력이 2, 정치력이 15 하락했는데 특히 무력은 거의 90% 이상으로 대폭 깎여나갔다. 개성은 응원, 주의는 할거, 정책은 병기강화 Lv 2, 진형은 충차, 전법은 없고 친애무장은 진랑, 혐오무장은 없다.

100만인의 삼국지 일러스트는 11탄의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그려졌다.

삼국지 8 리메이크에서도 등장하는데 100만인의 삼국지 일러스트를 기준으로 등장한다. 194년 이전 시나리오로 진행해서 미발견 상태로 발견할 경우 진의록과 혼인 상태가 아니지만 194년 이후 시나리오로 플레이를 하면 진의록이 살아있는 동안 진의록과 혼인 상태이다. 당연히 여포 사망 이후에는 다시금 혼자 있는 상태다.

삼국전투기에서는 본편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삼국난담에서 등장해 관우와의 일화가 소개되었고, 최훈은 조조의 선호도가 "금은보화<적토마<관우<<<<미녀"라고 평했다. 그 밖에는 전투외편 2편에서 아들 진랑이 울 엄마 미모는 관우도 반할 정도였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토탈 워: 삼국에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으나, Make Them Unique에서 변부인이 패치로 고유 인물이 되면서 그 캐릭터가 두부인에게 넘어가면서 해당 모드 사용 시 두부인이 추가된다. 천명에서는 한나라 세력,[8] 군웅할거에서는 동탁 세력,[9] 배천에서는 여포 세력, 갈운에서는 조조 세력으로 등장한다.

각종 삼국지 대체역사소설에서는 보통 비중은 없다시피하지만 관우가 직접적으로 특정 여성을 지목해서 요구한 사례가 두씨 하나뿐인지라 관우 캐릭터의 일관성을 위해서인지 과거 하동군 해현의 평범한 백성이었을 적부터 인연이 있었다는 식으로 각색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탐관오리로부터 두씨를 지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해서 유협이 되었다. 두씨 집안도 딸이 그런 흉사에 연루됐으니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어 인연이 끊겼었다는 정도의 사연이 붙는다. 조경래의 <삼국지 생존왕>, 루모로마노의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 등.


[1] 진의록이 언제 사신으로 보내졌는지는 기록이 없다.[2] 진의록의 경우, 장비의 설득에 응해 유비를 따랐다가 후회한다. 그리고 조조에게 돌아가려다가 장비에게 살해당한다. 그러나 조조와 정씨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이혼녀가 재가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없는 일이지만, 이는 전 남편의 체면 문제랑 엮여 전 남편에게 원한을 살 수 있는 일이었다.[3] 후한 시대에 남편이 있는 여자를 탐하는 것은 엄청난 만행이었고, 훗날 조비가 시행했다가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는 것에서 알 수 있다.[4] 또한 조운의 경우 남의 아내라서 거절한 게 아니라 조범과 동성이라는 이유로 거절한 것이니 관우의 경우와 다르다.[5] 특히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서 추가된, 조조가 관우의 평판을 깎기 위해 유비의 두 부인과 한 방에서 재우려고 했으나 관우는 밖으로 나가서 밤새 경계를 섰다는 대목이 관우는 여색에 초연하다는 인식에 많이 기여했다.[6] 물론 관우의 지조와 충정은 실록에서도 세간의 인식 그대로 다뤄진다.[7] 업을 함락시킬 정도로 승세를 타는 조조조차도 유부녀를 본인이 아니라 아들이 건든 문제임에도 엄청난 비난에 시달릴 정도였다. 관우의 행동이 당대 기준으로 문제가 됐다면, 관련 기록이 반드시 남았을 것이다.[8] 미성년자 상태다.[9] 추후에 패치로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