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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3 16:17:56

드미트리 스뱌토폴크미르스키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드미트리 스뱌토폴크미르스키
Д. П. Святополк-Мирский
파일:Dmitrij_SvyatopolkMirskij.jpg
본명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스뱌토폴크미르스키
[ruby(Дми́трий, ruby=D m i t r y )] [ruby(Петро́вич, ruby=P e t r o v i c h )] [ruby(Святопо́лк-Ми́рский, ruby=S v y a t o p o l k - M i r s k y)]
출생 1890년 9월 9일
러시아 제국 하르키우 구(郡) 그네프카촌
사망 1939년 6월 6일 (향년 48세)
소련 마가단 레브포포카이 수용소
국적 러시아
가족 표트르 드미트리예비치 스뱌토폴크미르스키 (아버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보브린스카야 (어머니)
학력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동양학부 중국어과
직업 시인, 문헌사학자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스뱌토폴크미르스키는 러시아의 시인이자 문학사학자, 유라시아주의자이며 좌익 유라시아주의의 창시자이다.

2. 생애

스바토폴크미르스키 공작 가문 출신으로, 국가 고위 관료인 표트르 드미트리예비치 스뱌토폴크-미르스키와 예카테리나 2세의 딸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보브린스카야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수한 가정 교육을 받았으며, 여섯 살에 여덟 개 언어를 섭렵했고, 16세 전후로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 8개 언어로 된 시와 번역 작품을 읽을 수 있었다.

1908년 제1 상트페테르부르크 문법학교를 졸업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동양학부 중국어과에 입학했지만 학과 과정을 마치지 못했다. 그는 당대 상징주의 문학계와도 가깝게 교류하였다. 191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집 『1906–1910 시편』을 출간했으며, 같은 해 자유의사(вольноприписной) 자격으로 제4 근위보병연대에 입대하여 1912년 하사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예비역으로 전환되었고, 1914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역사·언어학부 영재사 과정을 외부시험으로 통과하여 졸업 자격을 얻었다. 그는 대학교 잔류 제안을 받았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곧바로 징집되었고. 1916~1917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사 아카데미 예비과정을 수강하였다.

러시아 혁명 직후 그는 하르키우로 이동하여 1918년 하르키우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고, 이어 1919년 크림반도에서 안톤 데니킨 장군의 백군에 징집되어 1920년 초까지 제1보병사단의 임시 참모직을 수행했다. 하르키우와 크림반도 일대에서 짧게 활동했으나, 1920년 초 퇴각 과정에서 부상자 후송과 행정 지원을 맡았다. 1920년부터 그는 망명 생활을 시작하여 1921년까지 폴란드, 그리스에 머문 뒤 1922년부터 1932년까지 영국에서 체류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1922년 런던 대학교 슬라브학부 전임강사로 재직했으며, 왕립대학 슬라브연구학교에서도 강의했다. 이 기간에 그는 《크리테리온(Criterion)》, 《런던 매거진(London Magazine)》, 《캔터베리 리뷰(Canterbury Review)》, 《네이션(Nation)》 등에 비평문을 게재했고, 망명 문예지 《소브레멘니예 자프(Современные записки)》, 《즈베노(Звено)》, 《볼랴 로씨이(Воля России)》 등에도 기고했다. 1929년 주간지 《유라시아(Eurasia)》의 필자 겸 편집장을 맡았고, 1926~1928년 계간지 《베르스티(Версты)》 세 호를 발간했다. 또한 『러시아 서정시 소사전: 로모노소프부터 파스테르나크까지』(파리, 1924) 등 여러 시 선집을 편집했으며, 영어로 『현대 러시아 문학(1881–1925)』(Contemporary Russian Literature; 런던, 1926), 『최초부터 도스토옙스키 사망(1881년)까지의 러시아 문학사(A History of Russian Literature)』(런던, 1927; 전2권으로 뉴욕, 1927–28 재간), 『푸시킨(Pushkin)』(런던, 1927)을 출간했다.

1925에서 1926년 사이 소련 예술문학의 영향을 받아 사상적으로 전향했고, 1931년 영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레닌(Lenin)』(런던, 1931)과 『러시아: 사회사(Russia, a Social History)』(런던, 1931)을 저술했다. 1932년 막심 고리키의 도움으로 소련으로 귀환한 뒤[1] 모스크바 외국 노동자 출판부의 영어부 편집자로 1932년에서 1933년 근무했고, 그만둔 뒤에는 문학 연구와 집필에 전념했다. 그는 《러시아 가스퇴르(ЛГ)》, 《문학 학습(Литературная учёба)》, 《문학 비평(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 《즈베즈다(Звезда)》, 연감 《16년(God XVI)》 등지에 100여 편의 문학비평 기사를 발표했으며, 다양한 출판물에 영미 문학 관련 서문을 집필했다. 1934년 모스크바에서 출간된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에서는 현대 영문학 상황과 1930년대 영국의 좌익 문학을 다루었고, 1937년 레닌그라드에서 『신영시 선집(Антология новой английской поэзии)』을 편찬했다. 이름 없이 간행된 러시아어·영어 사전의 공저자로 참여했으며, 1935년 발간된 《문학백과사전(전12권)》 제9권에는 ‘리얼리즘’ 항목을 집필했다.

1934년부터는 소련작가동맹(ССП)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36년 2월에는 소련과학아카데미 문학연구소(IRLI)의 서구문학부 연구원으로 채용되어 곧 수석연구원으로 보임되어 17세기 전반 영국 문학을 연구했다. 그러나 1937년 4월 대숙청의 일환으로 당국에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8년의 노동 교화형을 선고받는다. 마가단에 위치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옥사했지만, 일부 증언에 따르면 1946년과 1952년에 그를 목격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3. 여담


[1] 이 때 버지니아 울프는 일기장에 '그의 머리에는 총알이 박히리라' 라며 걱정하는 글을 일기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