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슬람 왕조들의 국무회의
دیوان페르시아어로, 이 국무회의는 644년 2대 칼리프인 우마르에 의해 만들어졌다. 전통 칼리프 시대까지는 행정을 위한 위원회였으나, 우마이야 왕조가 성립된 이후 디완 내에 여러 정부 부처가 생기면서 비로소 내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아바스 제국이나 사파르 왕조, 지야르 왕조, 부이 왕조, 사만 왕조, 셀주크 제국 등 여러 제국들도 두었다.
2. 오스만 제국의 궁정회의
정식 명칭은 디바느 휘마윤(Divan-ı Hümâyûn). 이전 왕조들의 것을 계승했으나, 최고 국무회의이되 황제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었다. 조선 시대로 치면 의정부 내지 비변사에 해당한다.2.1. 창설과 기능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14세기에 술탄과 여러 고위 관료들이 비공식적으로 모여 회의를 연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술탄은 관료들과 함께 중요한 재판의 판결을 내리거나 관직을 임명하거나 해임하는 등의 안건을 논의했으며, 술탄이 승하했는데 아직 새로운 술탄이 즉위하지 않은 경우 관료들끼리만 모이기도 했다.디반 회의에 변화를 준 것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메메드 2세였다. 그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1] 그 가운데 하나가 투르크계 관료들의 대표자 역할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전제군주로 군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황제의 권위를 더욱 높이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 디반 회의를 황제가 직접 주재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앞으로는 재상이 이끌도록 바꾸었다. 즉 황제를 알현하는 것 그 자체를 특권으로 만든 것이다. 다만 황제는 회의가 열릴 때 회의실 옆방에서 회의를 들을 수 있었으며, 이후로도 메메드 2세의 뒤를 이은 바예지드 2세나 무라드 3세, 무라드 4세 등 후대의 황제들 중에도 회의를 직접 주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황제가 직접 주재하지 않다 보니, 회의가 끝나면 결정된 사항들이 황제에게 보고되어야만 했다. 이에 따라 회의를 주재한 대재상이 황제를 알현하여 결정된 사항들을 보고하는 절차가 있었는데, 황제에 따라서는 대재상을 직접 접견하여 보고를 받기도 했지만 서면으로 적어서 내라고 명령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회의에서 결정되는 사항들은 그대로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뜻에 따라 변경되거나 아예 뒤집어질 수도 있었지만, 아래 문단에서 나열하듯이 제국의 최고 관료들. 즉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인 것이다 보니 결정이 존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편 황제가 디반 회의에서 논의되기를 바라는 사항이 있는 등 따로 전달할 말이 있을 경우, 환관 수장인 카프 아아(Kapi Agha)를 회의장에 보내 뜻을 전하기도 했다.
한편 메메드 2세는 회의의 구성원과 역할을 비롯한 규칙을 분명하게 규정하기도 했다. 먼저 회의는 황궁인 톱카프 궁전의 전용 회의실에서 매년 열리도록 되어 있었지만, 16세기에는 일주일에 토~화요일 4번 열리게 되었다. 또한 대재상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이 군사 원정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는[2], 황제의 막사 근처에 세워진 재상의 막사에서도 열릴 수 있었다. 회의는 새벽에 시작해서 7~8시간 가량 계속되었는데, 그로 인해 여름철에는 낮, 겨울철에는 오후쯤 끝났다. 회의가 긴 만큼 구성원들은 회의 중간중간 세 번 다같이 식사를 했는데, 첫 끼니는 도착하고 나서, 두 번째는 중요한 안건들이 우선적으로 논의되고 나서, 세 번째는 회의를 완전히 마치고 나서 했다.
최고 궁정 회의인 만큼 디반 회의는 제국을 운영하는 것과 관련된 거의 모든 사항들을 논의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관직의 임명과 해임, 지방 총독들의 보고서 낭독과 그 처리, 공공건물이나 군사 시설의 건설, 다른 나라와의 외교 문제, 다른 나라가 파견해 온 외교관을 접대하는 문제 등이었다. 또한 군 법정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2.2. 변질과 폐지
17세기를 시작으로 무능한 황제들이 줄줄이 즉위하고 황제의 모후와 애첩들이 정권을 농단하는가 하면 예니체리들이 황제를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시대가 열리면서, 디반의 위상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상술되었듯이 회의가 끝나면 재상이 황제를 직접 알현하든 보고서를 제출하든 황제의 재가를 받는 절차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황제가 제 구실을 못 한다면 회의를 주재하는 재상이 사실상 황제 역할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시간이 지나면서 디반 회의는 대강대강 짧게 끝내고 재상의 관저에서 다시 모여서 제대로 논의를 하는 관행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654년에는 아예 회의실이 딸린 재상 전용 관저가 건설되어 이런 관행이 사실상 공식적으로 굳어졌다. 18세기에 이르면 디반 회의가 열리는 횟수와 기간 자체가 크게 줄어들게 된다.결국 이렇듯 유명무실해진 디반은 탄지마트 개혁으로 폐지되고, 서유럽식 내각 정부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2.3. 구성원
늦어도 메메드 2세 때 확정되었으며, 다음과 같다.- 대재상(Grand Vizier): 황제 바로 다음 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 제국이 세워진 지 20여년 뒤인 1320년에 만들어져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줄곧 유지된 관직이다. 다른 국가들의 재상과 마찬가지로 최고 행정관인 동시에, 황제가 친정을 할 때는 부사령관을 맡고 그렇지 않을 경우 총사령관을 맡았다.
- 재상(Vizier)[3]: 황제와 대재상 다음 가는 관직으로, 조선으로 치면 정승과 판서 사이쯤 되는 직책이다. 정치와 군사에 모두 관여할 수 있었으며, 정원은 본래 3명이었지만 16세기를 거치며 4명, 5명, 7명으로 점차 늘어났다. 17세기 중엽에는 11명까지 늘어났지만, 이 때는 최고 지방행정단위인 에야레트(Eyalet)의 대총독(Beylerbey)도 Vizier라는 호칭을 썼기에 이들 모두가 디반에 참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디반에 참여할 수 있는 재상들을 따로 "돔(dome)의 재상들(kubbe vezirleri)" 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돔이라고 함은 디반 회의실의 구조를 가리킨다.
- 카자스케르(Kazasker): 직역하면 "군사 재판관" 이지만, 실제로는 대법원장 겸 법무장관 쯤 된다. 무라드 1세 때 창설되었지만 제국의 영토가 계속 넓어짐에 따라 1480년에 정원을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려 담당하는 지역을 나누었다.
- 데프테르다르(Defterdar): 재무장관에 해당한다. 본래 정원이 한 명이었지만 16세기를 거치면서 역시 담당하는 지역이 나뉘어 2명, 4명으로 늘어났으며, 16세기 후반부터 제국의 재정이 휘청거리면서 점점 더 위상이 높아진다.
- 니샨즈(Nişancı): 서기관장에 해당한다. 디반에서 회의를 하는 동안 문서가 작성되는 일을 관리, 감독하고[4], 이렇게 작성된 문서를 관리할 뿐 아니라 황제의 인장을 찍는 일도 담당했다. 17세기 말의 대튀르크 전쟁을 계기로 정교한 외교술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발견한 이후로는 외무장관 역할도 겸하게 되었는데[5], 다른 나라와의 조약도 문서이고 이것을 관리해 온 것이 니샨즈였으니 잘 읽어보고 회담에 임하라는 식.
정규 구성원은 위와 같되, 시간이 흐르면서 다음과 같은 구성원이 추가되었다.
- 루멜리야 에야레트(Rumelia Eyalet)의 대총독(Beylerbey): 중앙 관직이 아닌 지방관 중에 유일하게 디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다만 디반에서 논의되는 사항이 루멜리아 에야레트와 관련된 것일 경우 한정이었는데, 여러 에야레트 중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유일하게 육지로 붙어 있는 곳이 루멜리아 에야레트였기 때문[6]인가 싶기도 하다.
- 카푸단 파샤(Kapudan Pasha): 해군 총사령관.
- 예니체리 군단 사령관
3. 오스만 제국에서 쓰던 가구
divan
오스만 제국 및 중동에서 사용하던 긴 의자 형태의 가구이다. 디완이라고 한다. 낮고 푹신푹신한 긴 의자를 뜻한다. 기사
매트리스 역할을 하는 것을 깔고 그 위에 쿠션을 놓은 것으로, 소파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등받이와 팔걸이가 없다.
디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선술한 항목 2의 궁정 회의가 열리는 회의실의 벽을 따라 이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다만 이 위에 방석을 깔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는데, 오스만 시절에는 좌식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디완 회의장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레반트 지역에서는 집에 길고 아치형의 좁은 방인 리완이 있는데, 거기에 두기도 했다.
4. 레드 아이즈에 등장하는 비밀 결사
레드 아이즈의 만악의 근원 1번 항목에서 명칭이 유래된 듯 하다.루미스 왕국 귀족들의 후예로 이루어져 있다. 사회 각층에 그들의 세력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민족주의를 부추겨 레기움과의 전쟁을 의결한 드라그노프의 혁신 아크라이아 의원단도 그들의 세력. 그들 중 8명의 멤버는 오비터 아이즈의 코드를 소유하고 있다.
4.1. 평의회 의원들
- 장로(본명 불명)
- 카시어스 슈타이너
- 켄트 공 다니엘 머독
- 루트거 슈트로하임
- 드미트리 라시모프
- 빅토르 베르몬트
- 프란시스 드 바우건
그 외 4인이 더 있어 11인이 정원이며 그들 휘하에는 사병들도 있다. 하지만 그중 정예였던 켄트공의 군대는 머독이 크레이즈에 개겼다가 전멸하고 말았고, 그 머독도 결국 크레이즈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후 장로와 충성심을 인정받은 드미트리 라시모프를 제외한 전원이 숙청되었다.
[1] 보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항목 참고.[2] 본래 투르크인 유목 전사 집단에서 출발한 나라답게, 오스만은 대제국으로 발전한 이후로도 전사 집단으로서의 성격을 일부 가지고 있었다. 각 지방의 총독이 그 지방의 군사권도 행사하는 등 지방행정단위와 군 편제가 일치되어 있었으며, 총독의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과 강등을 결정할 때 중요하게 보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군공이었다. 이런 만큼 황제나 재상을 비롯한 고위 관료가 몸소 군을 지휘하는 것은 드물고 특별한 일이 아니라, 제국이 그만큼 큰 규모의 군대를 동원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그만이었다.[3] 재상 위에 대재상이 따로 있는 것은 오스만 제국의 초기 역사와 관련이 있다. 한국사의 고려는 왕씨가 주도해서 나라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지방 세력가들의 도움을 크게 입었다. 오스만 제국 역시 마찬가지로 가지들과 일미예(대략 성직자들과 학자들)들의 도움을 크게 입어서 나라를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유력한 가지들과 일미예들에게 재상직을 나누어 주어야 했다. 그러던 중에 술탄의 인장을 관리하는 일을 맡은 재상의 힘이 점차 강해지게 되고, 결국 이 재상이 대재상이라고 불리며 최고 관직이 된다.[4] 회의 도중에 어느 관료가 무슨 발언을 했다는 내용은 따로 기록되지 않았으며, 회의의 결과만 기록되었다. 이 때문에 디반 회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아는 데 어려움이 있다.[5] 이 이전까지 오스만은 다른 유럽 국가들을 으레 힘으로 압도했으며, 따라서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도 오스만이 유리한 입장인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17세기 중엽까지 오스만은 다른 나라와의 강화를 "이 나라와 화해하고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한다" 라기보다 "이 나라가 우리 제국의 힘과 위엄에 굴복하여 항복하고, 앞으로 우리의 신하국이 되기로 했다" 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러니 정교한 외교술은 오스만이 아니라 상대국에게 필요한 것이었으며, 오스만의 단골 신하국(?)이었던 베네치아가 외교술로 유명했다.[6] 이 동시에 아나톨리아 반도 중부 및 서부쯤에 해당하는 아나돌루 에야레트와 함께 여러 에야레트들 중에 가장 넓고 오래된 둘 중 하나였다. 콘스탄티노플 바로 앞마당이라는 점까지 생각하면 지방관 중에서도 위상이 가장 높을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