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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12년 7월 27일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톱카프 궁전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이스탄불도 이스탄불 광역시 파티흐구) | |||
사망 | 1640년 2월 8일 (향년 27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이스탄불도 이스탄불 광역시) | |||
재위기간 | 오스만 파디샤[2] | ||
1623년 9월 10일 ~ 1640년 2월 8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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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쾨셈 술탄 (출신: 그리스) | ||
형제자매 | 오스만 2세, 셰자데 메흐메트, 셰자데 지한기르, 셰자데 오르한, 셰자데 셀림, 셰자데 하산, 셰자데 바예지트, 셰자데 휘세인, 셰자데 카슴, 셰자데 쉴레이만, 이브라힘, 아이셰 술탄, 파트마 술탄, 하티제 술탄, 게브헤르한 술탄, 한자데 술탄, 에스마 술탄, 자히데 술탄, 아티케 술탄, 아비데 술탄 | ||
배우자 | 아이셰 술탄 (출신: 그리스) | ||
자녀 | 셰자데 쉴레이만, 셰자데 아흐메트, 셰자데 메흐메트, 셰자데 알라아틴, 사피예 술탄, 게브헤르 술탄, 이스미한 카야 술탄, 루키예 술탄, 아이셰 베디아 술탄, 하프사 술탄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이명 | 바그다드 정복자 (SAHİB-Î KIRAN, Bağdat Fâtihi)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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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제국의 17대 술탄이자 11대 파디샤. 대표적인 혐연가이자 애주가로 유명하다.
한 줄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유목제국의 대칸에 걸맞은 개인적 무력과 용병술을 지녔던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전사 술탄[3]으로 요약할 수 있다.
2. 생애
2.1. 어린시절
1612년 7월 26일, 혹은 7월 27일에 아흐메트 1세와 쾨셈 술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623년 9월 10일부로 정신이 혼미했던 숙부 무스타파 1세가 강제 퇴위[4] 당하면서 즉위하였다.2.2. 재위
갑주를 갖추어 입은 무라트 4세 |
무라트 4세는 과감한 개혁가로 유명했는데, 특히 무능한 파디샤들이 줄줄이 즉위하면서 문란해진 오스만 제국의 법 체계를 바로잡기 위해 법을 정비했으며 그 법을 어기는 자는 가차없이 처형했다고 한다. 아래에 나오는 커피나 담배 이야기도 그렇고, 처형하는 걸 꽤나 즐겼던 인물인 모양.[5]
그가 겨우 11살 나이였지만 즉위할 때 내란에 개입된 혐의로 재상 토팔 레제프 파샤를 처형하며 황권 강화에 집중하였고 반정 음모자들을 탄압하였다. 그리고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반오스만 반란이 벌어지자 손수 군대를 이끌고 철저하게 뭉갰는데 다른 건 몰라도 군사적 지휘에서 상당히 유능했다고 한다. 무라트 4세는 60킬로그램에 달하는 둔기를 한 손으로 휘둘렀고 50킬로그램짜리 대검도 애용했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톱카프 궁전 박물관에 그가 쓰던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또한 맨손 격투에도 능에 여럿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혼자서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덧붙여, 오스만 제국의 역대 파디샤 가운데 몸소 전장에 나가 군대를 지휘한 것은 무라트 4세가 마지막. 참고로, 무라트 이전에 몸소 군대를 지휘한 파디샤는 명군 쉴레이만 1세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해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여, 타브리즈와 하마단을 정복하고 바그다드를 되찾는 등 상당한 전공을 올렸다.[6] 그 밖에도 무굴 제국과도 한판 붙을까 했지만 당시 무굴 제국 술탄 자한기르[7]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상당히 유능했기에 지금 맞붙다가 양 측이 엄청난 피해를 본다고 하여 그냥 참았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당장 육로로는 양 제국 사이에 이란의 사파비 제국이 있었다. 사파비 제국도 제대로 정복하지 못했는데 무슨 수로 무굴 제국과 전쟁을 한단 말인가? 해상을 통한다 하더라도 역시 대규모 선단의 동원이나 보급이 거의 힘들어서 가능성이 없었다. 오히려 무라드 시대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은 사파비 제국이 꼴보기 싫다는 점에서 통하는 면이 있었으므로[8], 우호 관계를 수립했다.
군사적인 지휘 말고도 정치적로도 꽤 유능하여 여러 개혁 정책을 취했으며 건축학에 흥미가 커서 건축가들을 우대하고 여러 건축 제작에 참여하며 이름을 남겼다. 폭군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정치적 역량이나 업적을 보면 폭군이나 암군은 아니었다. 어려서 즉위한 탓에 십수년간 정권을 농단하던 관료들과 외척들을 손수 척결하고 황권을 강화한 것 하나만으로도 평가할 가치가 있다. 위에서 이름만 나온 무스타파 1세를 비롯, 이 시기의 다른 파디샤들에 비하면 오히려 오래간만에 명군이 나왔다고 입이 닳도록 칭찬해도 모자랄 정도.
2.3. 흡연자들의 사신(死神)
담배를 매우 싫어하여 부하들을 변장시켜 이스탄불 및 전국 각지에 잠복시켰다고 한다. 적발된 자들은 무조건 죽이진 않고 경고와 함께 막대한 벌금을 먹이며 처음은 봐주었었다. 하지만 또 걸리면 그땐 처형시켰는데 약 3만명이 담배를 피운 이유로 사형당했다. 야사에 의하면 무라트 4세가 애용하던 철퇴로 직접 여러 번 걸린 흡연자의 머리를 깨부숴 죽였다는 이야기까지 있다.[9]어쨌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귀족이든 아니든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된 자들은 모두 사형시켰다. 이에 대하여 담배를 개인적으로 싫어한 점도 있었지만 1633년에 있던 코스탄티니예 대화재가 담뱃불에서 시작되었고 이 화재로 엄청난 인적, 경제적 피해를 봤기에 더더욱 강력하게 금연 정책을 시행했다는 분석도 있다.
외국인에게도 용서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프랑스 대사관은 이를 무시하고 대사관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10] 무라트 4세는 관리를 보내 경고하면서 대사관 안에서도 금연할 것을 명령했으나 이를 무시하자 군대를 보내 대사관 안으로 쳐들어가 담배피던 대사관 직원을 잡아 귀를 자르고 프랑스로 추방시켰다. 당연히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가 대사관 안으로 들어오는 건 선전포고나 다름없다고 분노했는데 무라트 4세는 한마디로 답변했다.[11]
"대사관 직원이기에 특권으로 죽이지 않고 귀 자르는 거로 봐줬던 거요. 프랑스의 명예를 생각한 일인데 왜 이리 분노하시오?"
사실 무라트 4세가 흡연자들을 이렇게 잡아들였던 이유의 이면에는 마약이 있다는 설도 있다. 당시 오스만 제국에는 담배를 피우는 척 마약을 흡입하는 사람의 수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이를 보다 못한 무라트 4세가 철퇴를 내렸다는 것.
때론 부하들이 매수당하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거지로 분장하고 거리에 직접 나가 거리를 둘러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런 상황에도 꾸준히 담배를 피운 사람들이 있었던 것. 때문에 당시 향수가 제법 인기를 끌었는데 담배를 피운 다음 냄새를 지우기 위해서였다. 향수 대신에 레몬즙으로 담배 냄새를 지우는 관습이 이 당시에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튀르키예에서 많이 뿌리는 콜로냐(kolonya)라는 레몬 향수는 이때 생겨났는데 이것 또한 담배 냄새를 지우고자 널리 퍼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들은 흡연 사실을 적발당하지 않기 위해서 손이나 입가에 레몬향수를 뿌렸다고 한다.
2.4. 커피 금지
금연정책 자체는 그렇다 쳐도 무라트 4세가 폭군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는 비단 담배 뿐만 아니라 커피까지 싫어해 카흐베하네(Kahvehâne)를 금지했기 때문이다.원칙적으로 무슬림들은 음주를 하면 안되지만 오스만 황실이 기원한 튀르크계 유목민들 자체가 한지에서 오랜 기간 추위에 노출되는 삶을 사는 만큼 음주에 너그러운 편이었고, 오스만 지도부가 유목 생활에서 벗어난 이후로도 동로마 제국의 황실 문화를 받아 들이고, 포도주가 생필품인 유럽과 깊게 외교적,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하다 보니 오스만 제국의 음주 정책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널널한 편이었고, 바예지트 1세나 셀림 2세 같이 본인들부터 앞장서서 주당이었던 파디샤들도 많았다. 술 구하기도 매우 쉬웠던 게,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코스탄티니예 인구의 절반이 그리스인이었던 시절이라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리스인 동네에 가서 술을 마시면 그만이었다. 다만 술 취한 사람에 대해 좋지 않게 바라보는 건 이슬람교나 정교회나 마찬가지라, 만취한 상태로 술집에서 뻗었다가 깨어나 보니 어선이나 갤리선 노예가 되어있는 모습도 흔했다고 한다. 술집 주인과 동네 깡패들이랑 이런 식의 인신매매 커미션도 흔했다고.
흡연가를 사형을 시킨 적은 있지만 커피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오고간다. 10만명 이상이 커피를 마셨다고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담배와 달리 커피는 그 정도는 아니라는 반론. 게다가 당시 오스만 제국이 아랍과 북아프리카 커피 원두를 독점하여 유럽 수출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와중[12]에 이런 금지 정책이 반발도 심했기 때문이다.
한편, 카페를 금지시킨 건 커피를 싫어했다기보다도 카페가 정치적으로 불온한 세력들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근대 유럽에서도 카페나 술집 등에서 혁명을 논하는 사상가들이 많았다는 걸 생각하면, 방법이 조금 과격하긴 해도 경계하는 것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일. 한편 당시 코스탄티니예의 커피숍들은 대부분 예니체리들에 운영되고 있었고, 그들의 중요한 부수입이자 때때로 반란의 근원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예니체리들을 경계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커피 금지령도 사실이므로 반발이 심했다. 담배와 커피는 오스만 제국에서 다양한 계층이 즐기던 기호품이었다. 특히 커피는 애초에 이슬람권에서는 아침 기도를 드리기 위해 복용하고, 많은 사람들이 술 대신 마신 깊은 전통과 인기를 자랑하는 기호품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다.
2.5. 애주가
금주 정책 또한 엄청 욕 먹었던게 당장 자기 신민들은 술과 커피 좀 마시고 담배 좀 폈다고 머리통을 박살내는 주제에 무라트 4세 본인은 상당한 주당이었기 때문이다. 무라트 4세는 이슬람에서 금지하던 술을 즐겨마시던 애주가였기에 무함마드가 금기시하는 술을 처먹는 주제에 그동안 문제시하지 않던 담배와 커피를 금기시하는 악마라는 비난에 직면했다. 그것도 그 당시 술이라고 해도 그래도 무함마드도 즐겨마신 대추야자로 만든 아락 같은 술은 음료로서 술이 아니라고 이슬람 종파에 따라 즐겨 마시기도 하고 문제시하지 않았지만[13] 무라트 4세는 이슬람권에서 이블리스가 건네준 타락의 상징인 포도주를 유달리 좋아했으니 신학자들이나 보수층에서 미치도록 분노했음은 당연했다. 더 웃긴 건 이런 비난에 이 양반이 한 변명이 예술이란 거다."포도주가 참으로 악마이기에 짐이 그걸 모두 마셔서 백성들이 그걸 못 마시게 하며 보호하는 것 뿐이다."
당시 오스만 황제들의 흔한 취미였던 궁중 터키어로 쓰인 시들을 보면 '흐르는 강물이 포도주가 된다 해도, 짐의 잔을 다 채울 순 없으리라.'라든가 '술이 참으로 악마라,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짐이 다 마셔버리겠노라' 같은 소리들을 써놨다.
사람 기호품 가지고 파디샤란 양반이 수도에서 시민들을 족치고 있는데 막상 본인은 저런 개드립이나 치고 있으니 군주로서의 능력 자체는 아무리 좋아도 당장 신민들이 좋아할만한 지도자상이 아니었다는 건 확실하다. 게다가 정복과 팽창으로 일구어낸 대제국의 파디샤답게 훌륭한 군사적 능력을 가진 것 자체는 좋은데, 17세기 중반이면 오스만 제국도 이미 역사가 350년 가까이 됐고, 지도자 개인의 무력을 통한 카리스마로 굴러가는 유목 제국에서 한자리에 눌러 붙어 체계적인 법전과 훈련 된 관료들의 법치로 돌아가는 정주민의 법치 제국으로 변신한 지 이미 한참 지난 때다.[14] 그리고 무엇보다 파디샤들이 먹고 살았던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의 동로마 시절부터 물려받은 뿌리 깊은 세련되고 세계시민적인 도시 문화가 어디 간 것도 아니고, 이 시점에서 파디샤가 수도에서 매일 보던 제국의 핵심 엘리트 가운데 적어도 절반 가량은 말타고 노략질하며 활 쏘던 아나톨리아 튀르크족이 아니라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발칸 반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즉 아무리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는 하더라도 이들의 기본적인 문화적 성향은 '노략질하며 활 쏘던' 것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15세기 초반이라면 몰라도 17세기 중반의 파디샤란 작자가 코스탄티니예 시가지에서 말타고 활쏘며 사냥대회 열고 유목민 코스프레하는걸 동시대 신민들이 좋게 생각했을 리가 없다. 결국 이런 저런 동시대 수도의 문화적 조류에 반대되는 본인의 개인적이고 상당히 작위적이기까지 한 성향을 강제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능력 자체는 뛰어났지만 인기는 없었다. 무라트 4세의 치세보다 백년 전 사람이긴 하지만 마키아벨리를 인용하자면 전형적인 두려움에 기반한 존경은 받아도 사랑은 받지 못한 군주상이다.
객관적으로, 군주로서의 자질과 업적만 따지면 폭군이라 부르는 건 지나치지만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 밑에서 백성노릇 해먹기는 더럽게 피곤했던 양반이었던 것 자체는 확실해 보인다.
2.6. 사망
결국 음주가 문제가 된 건지 1640년 2월 9일, 27살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통풍으로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본인이 일찍 죽은 데다가 무라트 4세의 자식들도 아버지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 버리는 바람에 후계자가 없었다. 거기다가 무라트 4세는 자신의 아우인 바예지트, 쉴레이만, 카슴 황자들을 죽였고 결국 하나 남은 아우 이브라힘이 파디샤로 즉위했다. 이브라힘도 담배를 싫어하여 형의 금연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그래도, 그는 최소한 담배 피웠다고 죽이는 일을 피하고 벌금이나 투옥으로만 처벌했다. 더불어, 그는 술을 싫어하고 커피를 즐겨마셨기에 커피 금지정책을 폐지했다. 그리고 이브라힘이 1648년 33살 나이로 폐위당하고 그 뒤를 이어 재위한 메흐메트 4세는 골초였기에 그는 제위하자마자 담배 금지령을 없애고 당연히 흡연율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전술한 대로 그 나름대로 공도 있고 암군은 절대 아니었으나, 일찍 죽었고 역사적으로는 흡연가들에게는 마왕같은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3. 기타
- 무라트 4세는 생전 자신의 아우들 3명을 죽였고 야사에 의하면 죽기 직전, 하나 남은 동생인 이브라힘까지 죽이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하마터면 오스만 황실 핏줄이 끊어질 뻔했던 셈. 당연히 이브라힘은 죽지 않았고 제위에 오른 이브라힘은 아들들을 많이 낳아 오스만 제국 제2의 창시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15].
- 튀르키예 사극 드라마 위대한 세기: 쾨셈에서 재현한 무라트 4세의 모습.[16] 업적 문단의 갑옷 초상화를 작중 재현한 모습. 전사 군주라는 역사 속 기록답게 극중 묘사되는 무라트 4세는 출중한 무력을 가진 군주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의심과 불안 속에서 흑화하며 모후와의 대립 속에서 야사대로 자신의 동생들을 모두 죽여 황실의 혈통을 끊으려 한다.
- 20세기 초 미국 등지에서 오스만제 담배가 유명했는데 그리스계 미국인이 만들어 유명해진 담배 이름이 하필 무라트(MURAD)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군과 연합국 병사들이 함께 피우는 터키 담배라는 컨셉의 무라트 담배 광고를 보자면 당시 동맹국에 속했던 오스만 제국 군인들은 못 피우고 오스만 제국의 적들이 사이좋게 피우는 터키 담배가 된 아이러니한 물건이 된 셈.
- 글라이더를 타고 직접 하늘을 날았다는 헤자르펜 아흐메트 첼레비(Hezarfen Ahmet Çelebi 1609-1640)가 무라트 4세 시절의 인물이다. 아흐메트 첼레비는 1632년에 바람이 세게 부는 날 갈라타 탑 꼭대기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한 글라이더를 개량시킨것을 타고 직접 뛰어내려서 3358m 떨어진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 위스퀴다르까지 날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그는 이 실험으로 무라트 4세의 총애를 받았지만 "감히 알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려 한다!"라는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반발로 인해 결국 알제리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풍토병으로 요절했다. 그의 글라이더의 모형과 비행장면을 묘사한 그림은 갈라타 탑에 전시되어 있다. 다만 오늘날 현대 튀르키예 학자들은 정말 헤자르펜이 날았는지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다. 여러 설이 있는데 아예 과장, 신화라는 이야기에서부터 글라이더 같은 걸 타고 난 것 같긴 한데 보스포루스를 횡단한건 거짓이라는 말도 있다.참고 어쨌든 첼레비의 이야기는 일종의 문화적 밈으로 남아 인기 많은 2차 창작의 대상이 됐다.
4. 외부 링크
(영어 위키백과)Murad IV(네이버 지식백과-사물의 민낯)담배
5. 대중매체
튀르키예의 드라마 위대한 세기: 쾨셈에서 무라트 4세의 어린 시절은 카안 에페 아크가, 술탄은 메틴 악뒬게르가 연기했다.영화 3000년의 기다림에서 무라트 4세는 오굴잔 아르만 우슬루가 연기하고 칸 굴두르가 어린아이 역할을 맡았다.
[1] Murâd-ı râbî[2] 수니파의 칼리파 겸직.[3] 콘스탄티노플 점령 이후 오스만 파디샤들이 주로 내세웠던 로마 황제로서의 권위와 시리아, 이집트 장악 이후 역시 내걸기 시작한 이슬람교의 칼리파로서의 권위 말고도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들은 칭기즈 칸과의 연관성 또한 강조하며 전통적인 유목 제국의 칸위 또한 주장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봉신들 중에서 크림 칸국의 칸은 가장 상석을 차지했다.[4] 무스타파 1세는 재위 1년만에 강제퇴위당해 별궁에 갇힌 채 살다가 1639년 48살로 사망했다.[5] 다만 쉴레이만 1세의 아버지이자 역시 명군이라고 할 만한 인물인 셀림 1세도 그랬다.[6] 본 항목에는 아래에 나오는 커피와 담배 이야기가 길게 쓰여 있지만, 그런 에피소드보다는 이런 쪽을 조명해야 할 것이다. 백여년만에 몸소 지휘봉을 잡은 파디샤였고, 그 전공도 적지 않았으니까.[7] 인도 역사상 대왕으로 추앙받는 악바르 대제의 후계자이다.물론 악바르에 가려진 점도 있지만 역시 그 후계자답다는 평이 많다. 자한기르는 1627년 죽었지만 뒤를 이은 샤 자한도 꽤 유능했다. 참고로 샤 자한은 그 유명한 타지마할을 만들게 한 군주이다.[8] 사파비 제국과 앙숙이었던 이유는 종교 문제와 영토 문제. 일단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의 지배층은 이슬람 중에서도 수니파를 믿었던 반면, 사파비 제국의 국교는 시아파였다. 또 오스만과 사파비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고, 사파비와 무굴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패권을 두고 경쟁했다.[9] 참고로 무라트 4세가 생전에 쓰던 철퇴가 톱카프 궁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딱 보기만 해도 묵직해보이는게 이 양반 힘이 제법 셌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10] 당시 프랑스는 백여년 동안 오스만 제국과 우호조약을 맺어온 상태였다. 처음에는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동맹을 체결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이 한물 가자 오스만과의 군사동맹은 통상조약으로 바뀌었고, 프랑스가 가장 활발하게 무역하던 나라가 오스만이었다. 즉 동맹국 버프를 믿고 쌩깐 것이었겠지만, 무라트는 동맹국이라고 봐주지 않았다.[11] 오늘날로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튀르키예 본토와 발칸반도와 레반토 지역과 북아프리카 지역과 걸프지역 일부를 강역을 두고 미국이나 중국이나 러시아와 인도에 필적한 국력을 가진 강대국인 튀르키예 대통령이 자국 국민들과 외국인이 술과 담배를 피우는 것을 싫어하여 금연령과 금주령을 내리고 한번 경고를 어기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을 만들었는데 주 튀르키예 프랑스 대사관 직원들이 경고를 생까고 술과 담배를 피우는데 튀르키예 대통령이 화가나 치외법권을 무시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프랑스 대사관으로 쳐들어와 술 담배를 피운 대사관 직원들을 체포하여 원래 사형을 시키려 하였는데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태형을 때리고 강제추방을 시켰는데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 대통령이 분노하여 대사관에 함부로 쳐들어와 왜 대사관 직원들에게 형벌을 때리냐고 항의하자 튀르키예 대통령이 법을 어긴 대사관 직원이기에 외교적 관계를 고려하여 사형에서 태형으로 봐준 것이고 프랑스 체면을 생각해 선처해준것인데 왜 분노한 것이요? 라고 대응한 격이다.[12] 1697년 오스트리아 침공 당시 오스만 제국이 프랑스에게 중립을 지켜주는 조건으로 준 선물이 바로 커피 원두였다! 루이 14세는 엄청 좋아하면서 선물을 받아들였을 정도인데 당시 커피 원두는 매우 비싼 기호품이었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군의 침략을 겨우 막아낸 오스트리아에서도 오스만군 시체를 뒤져 나온 커피 원두를 두고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을 정도였다![13] 지금 아랍이나 이란 같은 나라도 아락은 허용한다. 더구나, 사막에 사는 유목민들에겐 물이 귀했기에 대추야자로 만든 아락이나 양이나 염소젖을 발효시킨 술인 아이락은 물처럼 필요한 생필품이었기에 당대 아랍권에서도 이걸 술이 아니라 생필품인 물이나 다를 거 없다라고 마시는 걸 허용해야 했다. 만일, 이것도 금지한다면 사막 유목민들에게 물같은 이런 술을 마시지 말라고? 화내며 이슬람 개종을 결사거부했을 게 뻔했으니까 말이다.[14] 물론 칼로 무 베듯 나눌 수는 없지만, 오스만을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정주민의 법치 제국' 으로 바꾸어놓은 인물이 무라트 1세이며, 그 뒤를 이어 데브시르메 징집자를 처음으로 재상으로 임명하는 등 황제를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제를 마련하는 한편 관습법을 처음으로 성문화한 인물이 바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메흐메트 2세다. 쉴레이만 1세가 입법자라고 불리지만, 그는 없던 법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성문법이든 관습법이든 이전 파디샤들의 법이나 명령을 상당히 참고했다.[15] 무라드 4세의 아버지인 아흐메트 1세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는데, 당시 혈육이라곤 동생인 무스타파 하나뿐인데다 그나마도 정신병에 걸려 후사를 기대할 수가 없어 황통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흐메트의 장남인 오스만 2세도 예니체리들의 반란으로 폐위, 시해당하고 무라트, 그리고 이브라힘이 즉위했던 것인데, 이브라힘이 낳은 자식들은 어려서 죽은 경우도 포함하면 9남 8녀에 달하며 이 아들들 가운데 세 명이 훗날 황제가 되었다. 다만 뚜렷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 다 보니, 제2의 창시라자는 말은 무라트 1세나 메흐메트 1세 등도 받은 바 있는 표현이다.[16] 오른쪽 여성은 무라트 4세의 모후 쾨셈 술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