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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9 01:33:54

라트렐 스프리웰

라트렐 스프리웰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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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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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 19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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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d : 19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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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렐 폰테인 스프리웰
Latrell Fontaine Sprewell
출생 1970년 9월 8일 ([age(1970-09-08)]세)
위스콘신주 밀워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학교 앨라배마 대학교
신장 196cm (6' 5")
체중 88kg (195 lbs)
포지션 슈팅 가드 / 스몰 포워드
드래프트 1992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4순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지명
소속 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1992~1998)
뉴욕 닉스 (1999~2003)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2003~2005)
등번호 15번 - 골든스테이트
8번 - 뉴욕 / 미네소타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프로 입성 이전3. NBA 입성 이후4. 프로 커리어 이후5. 수상 내역6.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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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농구인. NBA 활동 시절 전성기에는 포스트 조던 후보 중 한 명으로 꼽히다 특유의 폭발적인 득점력과 투핸드 덩크로 인기를 끌었으며, 국내 팬들에게는 PJ 칼리시모의 목을 조른 사건이나, 부양할 가족이 있다는 발언과 월간 해외 농구잡지 루키 조현일 편집장이 좋아하는 선수로 유명한 선수이다.

2. 프로 입성 이전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이혼한 스프리웰은 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이사를 자주 했기 때문에 체계적인 농구를 배우지 못하고 길거리 농구코트를 전전하다 아버지가 마약 복용으로 체포되며 밀워키의 어머니 집으로 옮기고 부터 본격적으로 농구를 배우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2부 대학리그인 스리 리버스 커뮤니티 대학에서 뛰다 3학년 때 앨라배마 대학교로 편입을 하여 로버트 오리와 함께 윔프 샌더슨 감독의 지도를 받았고, 4학년때부터 특유의 폭발력과 수비력을 보여주며 SEC 올 퍼스트팀 과 올 디펜시브팀에 선정되어 스카우터들에게 주목받았다고 한다.

3. NBA 입성 이후

3.1.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루키시즌에는 기존의 스타플레이어들이 대거 부상으로 빠지면서 팀 성적은 나빴지만,스프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전 슈팅가드 자리를 꿰차면서 평균 15.4득점 3.8어시스트 3.5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올-NBA 루키 세컨드 팀에 들었다. 2년차에는 전경기에 출전하며 무려 평균 43분을 뛰면서 총 3533분 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평균 21득점으로 팀의 공격을 이끌면서 2년차만에 올스타에 선정되고, NBA 퍼스트 팀과 함께 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올라가면서 공수겸장으로 이름을 올린다. 기존의 간판스타들인 팀 하더웨이와 크리스 멀린은 부상으로 아웃된 상태에서, 슈퍼 루키 크리스 웨버와 올라운드 플레이어 빌리 오웬스와 함께 팀을 50승으로 이끌었지만, 팀은 선즈에게 시원하게 플레이오프에서 스윕 당했다.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로 성장했지만 스프리웰은 선수나 팀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절친한 동료인 크리스 웨버와 빌리 오웬의 트레이드에 대해 돈 넬슨 감독[1]과 구단과 불화를 일으키고 이전에 Run TMC를 이끌던 팀 하더웨이와 굉장히 사이가 나빴다. 하더웨이와 스프리웰이 경기당 20점 이상씩 뽑아낼 만큼 팀의 핵심 스코어러들이었지만 워낙 서로를 싫어하는 지라 경기중에 서로 패스를 안 해주는 게 눈에 띌 정도로 팀플레이에 해를 끼쳤다. 너 따로 20점 나 따로 20점 결국 공동 인터뷰를 열고 '우리는 인간적으로 친해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저 같은 팀 선수로서 코트안에서는 최대한 존중하며 호흡을 맞추겠다.' 했지만 한시즌도 지나지 않아 대판 설전을 벌이는 등 절대 한 팀에서 섞일 수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며 파탄이 났다.

결국 그를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기 위해서 팀은 팀 하더웨이까지 트레이드를 시키면서 그를 중심으로 팀을 재편해 줬지만, 팀은 성적[2] 이 신통치 않았고 스프리웰에 대해서도 자신의 기록만 챙기는 선수라는 비난을 받았다.[3]

이후 시튼홀 대학교 감독으로 NCAA 토너먼트 결승에 올린 명장이자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감독이던 PJ 칼리시모가 5년 계약을 맺으면서 감독으로 부임하고 97/98시즌을 맞이하는데...

3.1.1. 칼리시모 감독 목조르기 사건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입장에서 흑역사나 다름 없는 사건인 PJ 칼리시모 감독의 목조르기 사건이 일어난다. 이전에도 팀 차원에서 스프리웰을 트레이드 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에도 불편함을 껴안고 시즌을 지내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칼리시모와 스프리웰이 대립각을 세우자 칼리시모가 그를 11월 이후로 식스맨으로 기용하며 불만이 끓어 올랐고, 1997년 12월 1일 스프리웰이 칼리시모의 목을 조르며 난동을 피워 목에 상처를 남겼다. 이후 구단 사무실로 쳐들어와 "나를 트레이드 해달라!" 라고 불만을 토해냈다. 결국 그는 choke master라는 불명예 스러운 별명을 얻었고, 컨버스와 계약금도 받지 못하고 잔여 연봉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선수노조가 나서서 변호를 해줬고, 중재인이 죄가 너무 무겁다는 등 스프리웰 살려주기 덕분에 시즌 전 경기 출장정지 징계가 68경기로 완화되었지만 한번의 실수로 많은 것을 날려먹은 사건이었다.

사실 칼리시모와의 사건은 한번 일어난 실수라고 보긴 힘들었다. 스프리웰은 성격이 과격한 선수였고, 동료들과 마찰이 잦았다. 93년에는 바이론 휴스턴이란 동료와, 1995년에는 동료 제롬 커시와 연습 도중 싸웠으며, 특히 커시와의 싸움 이후엔 연습장에 각목을 들고 왔으며, 총을 들고 오겠다고 협박을 했다. 칼리시모와 사건도 우발적으로 목을 조르고 끝난 것이 아니라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이후 목을 잡고 질질 끌고 갔으며, 이후 샤워를 하고 돌아와서 다시 한번 칼리시모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심지어 이때 징계 기간동안 난폭운전을 해 두 사람을 다치게 하는 사고까지 쳐서 3달간 가택연금까지 당했다. 은퇴 후 한 여자가 스프리웰이 자신과 요트에서 성관계를 갖다가 목을 졸랐다며 고발하기도 했다. 비록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해 기소 중지로 끝났지만 경찰은 여자의 목에 난 붉은 자국을 확인했다고 한다. 즉, 뛰어난 실력과 별개로 지나치게 과격하고 폭력적인 성격이 문제가 되는 선수였다.

3.2. 뉴욕 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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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휴스턴과 트윈 테러를 이루던 시절.

이후 뉴욕 닉스의 부름을 받았고, 골든스테이트도 그를 옮기는데 동의 하면서 존 스탁스, 크리스 밀스, 테리 커밍스와 트레이드로 뉴욕 닉스로 팀을 옮긴다. 직장폐쇄로 인한 단축시즌에서 긴 공백기와 부상으로 37경기중 4경기만 선발출장하면서 식스맨으로 주로 출장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무대에서는 앨런 휴스턴과 트윈 테러로 상대방을 휘저으면서 패트릭 유잉과 함께 8번 시드의 기적을 이끌어 냈다. 파이널에서는 유잉이 벤치를 지키고 마커스 캠비와 래리 존슨이 못나오는 상황에서도 스퍼스의 트윈 타워 사이를 휘저으며 평균 26득점으로 분전했지만 팀의 준우승을 막지는 못했다.

밀레니엄 닉스 이후 스프리웰은 유잉의 뒤를 이어 2000년대 초반의 뉴욕을 이끄는 선수였다. 유잉이 중심이 된 묵직한 팀에서 트윈 테러를 앞세운 스피드한 농구를 하는 팀으로 변모하는 중심이었으며, 화려한 플레이로 스포츠 뉴스 하이라이트에 나오는 스타일있는 선수였다. 그 유명한 스파이크 리 감독도 스프리웰의 저지를 입었으며, 자체적으로 자선단체에 기부도 하고, 여러가지 광고를 따내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코트 밖에서 사소한 말썽을 계속 일으키고 다니면서 팀의 케미스트리가 점점 좋아지지 않은데다, 고액연봉자인 스프리웰은 팀 입장에서 부담스러웠고, 많은 트레이드 루머가 돌다 결국 케빈 가넷의 미네소타로 트레이드 된다.

3.3.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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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소타에서.

케빈 가넷이 분전하던 팀에서 최고의 미남 샘 카셀과 함께 중심 축이 되어주며 공격 옵션에서 활로를 이끌어 내는 활약을 펼치면서 미네소타가 처음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에 가는데 도움을 준다.

미네소타는 카셀과 스프리웰이 합류한 03/04시즌을 마지막으로 이후 2016/17시즌까지 서부결승전은 커녕 플레이오프조차 못나가고 있다. 가넷 역시 04년 MVP 수상 이후 셀틱스 이적 전 까지 개인성적은 훌륭했으나 카셀, 스프리웰의 도움없이는 팀 성적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카셀은 69년생, 스프리웰은 70년생으로 전성기에 돌입한 가넷과는 달리 03/04시즌 딱 1시즌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해체되었다. 현재 빅3 구성시 대부분 비슷한 연령대로 구성되는데 반해 당시 리그 트랜드는 빅3와는 거리가 먼 풍토 였고 설령 구상을 했다고 해도 스몰 마켓인 미네소타가 그럴 자금은 없었다.

이 시즌 후 그 유명한 발언인 "나에게는 가족을 부양할 의무가 있다"[4] 라며 3년 2100만 달러의 계약을 거절했고, 결국 그는 한시즌 더 뛰고 NBA무대를 떠나게 된다.

4. 프로 커리어 이후

모터스포츠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지내는 듯 하다가 어느샌가 빚더미를 껴안게 되었다고 한다.

5. 수상 내역

수상 내역
파일:NBA 로고.svg 올-NBA 퍼스트 팀 (1994)
파일:NBA-Allstar2021.png NBA 올스타 4회 (1994-1995, 1997, 2001)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1994)
파일:NBA 로고.svg NBA 올-루키 세컨드 팀 (1993)

6. 플레이 스타일



처음에는 포스트 조던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자신만의 또다른 스타일을 구축한 선수.

특유의 종종걸음을 하다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페네트레이션을 하는 것은 NBA 선수들 중에서도 굉장히 수준급에 꼽힌다. 돌파도 뛰어나고 슈팅도 정확한것은 아니었지만 터지면 막기 힘든 폭발력이 있었다. 수비력도 끈질기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준수한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투 핸드 덩크는 여러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단점은 슈팅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인데, 잘풀리면 폭발이지만 안풀리면 난사급이라고 할만 했다. 대부분 에이스 가드들 문서에는 난사급이란 표현이 있다. 즉 슈팅은 기복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인 이상 기복이 있을 수 밖에 없고, 스프리웰은 슈터라기보단 슬래셔형이기 때문에 슛이 안 들어가는 날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에이스 가드들 중에는 슛이 안 들어가면 1) 외곽을 무리하게 던지지 않고 다른 것(돌파 후 자유투 얻어내기, 수비, 리바운드 등)에 집중하거나 2) 감을 되찾을 때까지 공격을 고집스럽게 하는 선수들이 있다. 그런데 스프리웰은 슛이 안 풀릴때도 공격을 고집하는 성향이 있었고, 이 때문에 슛이 들어갈때와 안 들어갈때의 경기력 차이가 좀 있었다.[5]
스프리웰은 통산 야투율이 42.5%였으며, 루키 시즌 이후 한번도 45%를 넘은 적이 없는데, 그의 실력, 돌파 비중이 높은 경기스타일을 생각하면 득점가뭄이었던 90년대 후반~00년대 초반에 많이 뛰었다는 걸 감안해도 야투율이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1] 넬슨 감독은 웨버를 센터로 기용하고 싶어했지만 재능이 넘치고 매직 존슨이 우상이 었던 웨버와 충돌이 생겼고 결국 워싱턴으로 이적했다. 당시 멀린, 웨버, 스프리웰, 팀 하더웨이는 모두 올스타를 넘어 올 NBA급 선수들로 현재 골든스테이트 못지 않은 주전라인업 이다. 만약 넬슨이 고집을 꺽었다면 정말 우승권팀으로 도약 할 수 있었고 배런 데이비스가 이끌었던 워리어스 시절 까지 긴 침체기는 오지 않았을 것 이다. 넬슨 감독은 명장이지만 딱 이 한 번의 결정이 워리어스의 운명을 바꾸었다.[2] 멀린, 리치몬드, 팀 하더웨이, 웨버, 스프리웰, 커리, 탐슨, 그린 등 골든스테이트가 강팀인 시절의 선수는 모두 드래프트를 통해서 선발한 선수이다. 또한 스프리웰, 그린은 20년의 세월을 두고 1라운드 20번 대의 스틸픽 중 스틸픽이고 커리조차 신인시절 지금과 같은 MVP급 선수로 성장할 것 이라고 생각한 전문가들은 희박했다. 그 이외에 앤트완 제이미슨, 제이슨 리차드슨, 몬타 앨리스 등 재능있는 선수들을 뽑았고 개인성적은 좋았으나 그것이 팀 성적 상승으로 향상되지는 않았다.[3] 이 부분을 스프리웰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씌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당시 로스터는 스프리웰을 제외하면 경쟁력 있는 선수는 아예 없었다. 95년 1픽은 조 스미스는 괜찮은 선수였지만 1번의 기대치와는 거리가 있었다. 스프리웰이 데뷔 ~ 이적 전 까지 95년 전후1번 픽들은 92년 샤크, 93년 웨버, 94년 글렌 로빈슨, 96년 아이버슨 97년 팀 던컨 등 최소 올스타 부터 HOF급 선수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 에서 결과적으로 스미스의 기량은 아쉬운 점이 있다.[4] 여기서 가족이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가에 관해 소문이 많이 돌았었다. 패밀리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한 가정의 식구를 뜻하기도 하지만 조직폭력배와 연관되었다는 카더라가 있었기 때문에 몇몇 인사들 사이에서 의혹이 있었다.[5] 예를 들어 마이클 조던과 비교를 하면 당연히 조던도 인간이기 때문에 슛감이 폭망인 경기가 있었다. 그러나 조던은 워낙 다양한 분야(리딩, 수비, 리바운드) 등에서 공헌을 하는 선수이기 때문에 외곽이 안 들어가면 자유투를 얻어내고, 수비와 리바운드에 더 신경을 쓰는 등 경기력의 저하가 덜했다. 대표적으로 98년 동부결승 7차전에서 조던은 야투율 36%로 슛 부진에 시달렸으나 양팀 통틀어 가장 많은 15개의 자유투를 얻어내고 (스코어가 88대83으로 저득점 경기라 상당히 많은 수치였다) 어시스트 8개, 리바운드 9개(공격리바운드 5개)를 곁들이는 활약을 했다. 이런 식으로 슛이 안들어갈 때 다른 분야에 집중하는 선수들은 경기력 기복이 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