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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13:58

에스토니아-라트비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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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라트비아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중세2.2. 근세2.3. 근대 2.4. 20세기2.5. 21세기
3. 교통 교류4. 관련 문서

1. 개요

에스토니아라트비아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양국은 역사를 상당부분 공유하며 푸틴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있다.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 치고는 드물게 사이가 무척 좋은 편인데, 이는 양국이 반러 감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2. 역사적 관계

2.1. 중세

1200년 북방 십자군이 가톨릭 전파를 구실로 리보니아 지역을 침략하였다. 비슷한 시기 1219년 덴마크가 에스토니아 북부를 정복하고 덴마크령 에스토니아 공국을 세웠다. 라트비아 일대를 점령한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여세를 몰아 1227년부로 에스토니아 남부 지역 점령을 완료하였다. 리보니아 십자군의 정복 이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일대에는 독일인 상인들과 선교사들이 정착하고, 현지 농촌에서 독일인 기사들은 지주 그리고 리보니아인, 발트어족에 속하는 여러 민족 집단들 그리고 오늘날의 에스토니아인들의 선조에 해당하는 추디-에스티인들은 농노로 전락하였다. 1346년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에스토니아 공국을 독일 기사단한테 돈 받고 팔면서 한동안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대부분 지역이 북방 십자군의 영토였던 적도 있었다.

명목상 이 지역은 선교를 위한 십자군 운동의 일환으로 정복되었으나, 독일인 지주들은 현지인 농노들을 착취하는데만 관심이 있었고 기독교 교리를 농노들에게 설명해주는데는 대개 무관심했다. 현지인 농노들은 일요일에는 교회를 가고 평일에는 토속 신앙을 믿는 이중 신앙 생활을 했다. 라트비아 일대는 이런 이중 신앙 생활이 16세기에도 흔했던 걸로 기록되었고, 에스토니아 일대는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2.2. 근세

라트비아 일대와 에스토니아 일대를 지배하던 독일계 쿠를란트 공국, 그리고 리보니아 연맹은 1410년 그룬발트 전투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봉신국이 되었다.

1561년 스웨덴 국왕 에리크 14세가 탈린을 포함한 에스토니아 북부 일대를 정복한 후,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공국을 세우고 1600년부터 1621년 사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에서 스웨덴이 에스토니아 남부 일대와 리가를 포함한 다우가바강 이북의 라트비아 지역을 획득한다. 당시 에스토니아 남부와 라트비아 일대(라트갈레 지역 제외)는 1629년 스웨덴령 리보니아가 들어섰다. 스웨덴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지배는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이 패배하기 이전 1721년까지 존속되었다.

스웨덴은 종교개혁 이후에도 남아있던 가톨릭의 잔재를 일소하고 루터교회를 후원했으며, 그 결과 리보니아 지역은 러시아 제국으로 지배권이 이양된 이후에도 19세기까지 발트 독일인을 중심으로 루터교회가 성행했다. 다만 라트갈레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로 남았고, 라트갈레 일대 주민들은 오늘날에도 상당수가 가톨릭을 믿고 있다.

2.3. 근대

상술한 대북방전쟁의 결과 러시아 제국이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지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회유책으로 라트비아 지역의 발트 독일인들은 러시아 제국의 내에서 상당한 수준의 권리를 보장하였으나, 후에 독일인들을 약화시키고 제국 각지로 분산시킬 목적으로 이들의 기득권을 제한하기 시작하였다.

라트비아에서는 19세기 초반, 에스토니아에서는 19세기 중반을 계기로 농노제도가 철폐되었고 이를 계기로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라트비아 지역은 러시아 본토보다 농노 해방이 일찍 이루어졌는데, 이는 라트비아 내 독일인들의 권한을 회수하고 이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오늘날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수도가 되는 리가탈린은 독일인들, 스웨덴인들 덕분에 서구 선진 문물이 빨리 도입되었던 이유로[1] 러시아 제국 내에서 가장 산업화되고 소득 수준이 높은 도시로 꼽혔다. 한 때 스웨덴의 주요 도시로 기능하였던 탈린과 리가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도 인접해 있었고, 이들 도시들은 오데사와 함께 러시아 제국의 주요 무역항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2.4. 20세기

러시아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혁명으로 몰락한 뒤, 독일군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일대까지 점령하였으나 얼마 안가 연합국에게 항복하였다.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며, 1차대전 패전국이었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여러 소수민족들을 독립시켰다. 이 과정에서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역시 독립을 쟁취하였다.

러시아 내전 시대 당시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는 상당수의 러시아인 난민들이 유입되었다. 특히 에스토니아에는 소련에서 탄압받던 잉그리아 핀인발트핀어군 계열 민족들이 망명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소련은 에스토니아 측에 이들을 다시 소련으로 송환할 것을 강요하였다. 라트비아는 난민 송환을 강요당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신 러시아 혁명에 참여하였던 라트비아 소총 연대 멤버 상당수가 스탈린 대숙청 시기 희생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소련군이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를 강제로 합병한 이후, 나치 독일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를 침공해서 점령한다. 리투아니아나 폴란드와 다르게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경우 유대인 인구가 적은 편이었고, 홀로코스트로 인한 피해는 적은 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중에 소련이 발트 3국을 점령하면서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구성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절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는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이주하였다. 2차대전을 계기로 상당수 독일인들이 죽거나 추방당하고 감소한 인구를 메꾸기 위해 소련에서 소련인[2]을 이주시켰다. 소련 해체 직전 1989년 통계 당시 라트비아 전체 인구의 35%, 에스토니아 인구의 43.7% 가까이가 러시아인 등 동슬라브인 계열이었다.

1991년에 소련해체되면서 양국은 독립했다.
역사적으로 유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발전했던 발트 3국은 옛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를 겪는 동안 많은 러시아인들이 유입되면서 상당한 국가 정체성의 변화를 겪었다. 소련은 점령기 동안 이들 지역에 대한 산업화와 통치력 확보를 위해 많은 수의 러시아인들을 정책적으로 이주시켜 정부, 당, 산업을 장악하게 하였고, 이는 오늘날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 많은 수의 러시아인들이 거주하게 만드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독립 후 새로운 국가건설과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많은 내적 갈등을 경험하였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1991년 독립 직후 소련 침공일인 1940년 6월 당시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과 그 직계자손에게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결정을 내렸고, 소련 합병 이후 이 지역으로 대량 이주한 러시아인들은 합법적인 시민의 범주에서 제외되었다.
KCI 등재논문 :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의 중간국 외교: 국가 정체성과 안보 경제 정책

2.5. 21세기

양국은 현재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협력과 교류가 활발하다. 2004년에는 유럽연합,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했다. 양국은 언어, 문화, 종교 등에서 공통점이 많은 편이고 교류와 협력이 많아지고 있다.
발트 3국의 군사력은 여전히 매우 취약한 수준이다. 특히 러시아의 영토에 가장 깊숙이 들어가 있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러시아와 직접적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NATO의 작전 영역에서 가장 먼 지역에 위치해 있다. 또한 발트 3국의 NATO 가입으로 인해 이들의 안보는 NATO와 러시아 사이의 경쟁과 갈등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Ibid.

양국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자국 내 러시아인 인구(러시아계 에스토니아인, 러시아계 라트비아인 문서 참조)가 많다는 공통점 때문에, 유사시 러시아의 침략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대러 외교 정책 및 자국 내 러시아계 인구 관련한 정책을 서로 모방하거나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2023년 1월 러시아가 자국 주재 에스토니아 대사를 추방하고, 에스토니아와의 외교 관계를 격하한 가운데 라트비아는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를 격하하기로 했다. 에드거스 린케빅스 라트비아 외무장관은 "러시아가 에스토니아와의 외교 관계를 격하한 가운데 이번 조치는 에스토니아와 연대하기 위해 내려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3. 교통 교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양국은 고속버스를 통한 교통 연계가 발달되어 있다. 이 외에도 라트비아 리가 국제공항을 허브로 삼는 라트비아의 저가 항공사인 에어 발틱이 사실상 발트 3국의 국적사 역할을 하고 있다.

4. 관련 문서


[1] 특히 리가는 한자 동맹의 주요 멤버였으며, 스웨덴령 리보니아 시절에는 스웨덴 왕국 제2의 대도시로 기능하기도 했다.[2] 러시아인/벨라루스인/우크라이나인 이외에도 소련 각지의 여러 민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