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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2-14 14:23:04

램프론의 오신

1. 개요2. 생애
2.1. 고향을 떠나다2.2. 램프론 가문의 개창2.3. 십자군의 도래
3. 후일담


Օշին Լամբրոնացի

1. 개요

만지케르트 전투가 만든 공백 속에서 자라난 아르메니아의 토호이다. 일단 본인은 동로마 제국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고위 관직도 지냈지만, 그 자신은 반독립적 지위를 계속 유지했으며 [1] 그의 후손들은 동로마의 안팎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소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가인 헤툼 가문의 시조이기도 하다.

2. 생애

2.1. 고향을 떠나다

그의 초기 일생은 명확히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1071년 일어난 만지케르트의 참극이 그의 삶을 크게 바꾸어놓았다는 것이다. 알프 아르슬란의 셀주크 군대는 로마군과의 회전에서 승리한 이후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아르메니아의 중심부인 아니를 공격했다. 오신은 아르메니아의 토호가문인 팔라부니 가문의 일부였고, 아직까지는 동로마제국의 땅이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북서부 도시인 간자를 다스리는 젊은 영주였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아나톨리아 서부로 후퇴를 시작하고 셀주크군이 육박하자 오신은 가족을 데리고 킬리키아로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그는 꽤 큰 무리를 데리고 이주를 시작했는데 여기엔 그의 아내와 자식들뿐만 아니라 동생 할감이 이끄는 무리, 그리고 아르메니아의 왕가인 팔라부니가의 후예라는 이유로 그를 따르는 많은 귀족들의 군대가 껴 있었다. [2]

이 거대한 아르메니아인 이주민 무리는 1072년경 아직까지 제국의 영향권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킬리키아의 타르수스 관문 근처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2.2. 램프론 가문의 개창

하지만 막장화되고 있는 제국의 동쪽 국경인 킬리키아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다. 원래 제국의 영토였던 안티오키아는 아직까진 로마의 손에 있었지만. 주변 영토는 대부분 셀주크의 소유가 됐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부터 주요한 군사요충지였던 킬리키아-타르수스의 관문인 램프론 요새 또한 셀주크의 소유가 된[3] 상태였다. 다행히도 킬리키아 서부 일대는 바실리우스 2세 치세때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거 이주해 소 아르메니아로 불리던 곳이었고, 이곳의 주요지대인 타르수스와 모프수에스티아를 다스리는 스트라테고스[4]인 아트수니 또한 팔라부니 가문으로, 오신의 친척이었다.

오신과 할감, 그리고 가신들의 군대는 혼란스러운 상태의 램프론으로 진격해 이 요충지를 빼앗았다. 다행히도 각지의 셀주크들은 술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상태여서 즉각적 반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형제는 램프론과 바르바론, 두 요새를 장악하고 각각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이곳은 튼튼한 성채가 있을 뿐더러 항구도 지척이었기에 재기를 꿈꾸기에는 안성맞춤인 지대였다. 이에 더해 피난을 떠난 아르메니아 영주들이 계속 그에게로 결집하니, 그의 세는 이제 주변 셀주크의 아타베그들에게도 꿀리지 않게 되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제국 동부변방에서 분투하는 오신의 이야기를 접하고 그를 명예상의 고위직, 세바스토스로 봉해 셀주크와 동로마 사이의 완충지역을 맡게 했다. 램프론의 영주로 봉해진 그는 곧 자신의 성이 될 램프론의 오신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트수니도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그들은 곧 주변의 반독립적 아르메니아 토후들중 주요 인물이 되어갔다. 제국이 1087년에 안티오크를 빼앗기고 킬리키아 대부분이 룸 술탄국에 유린당하는 동안에도, 램프론과 오신의 토호세력들은 계속해서 성장해나갔다.

2.3. 십자군의 도래

십자군이 킬리키아를 지나올 당시에 오신은 에데사의 토로스, 모프수에스티아의 아트수니[5]와 함께 동로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웅거한 몇 안되는 아르메니아 독립영주 중 하나였다. 토로스는 십자군 도래 이후 곧 통수를 맞고 그의 영지는 에데사 백국으로 재편되었으며 램프론 남부에 할거하던 아르메니아 영주들은 안티오키아 공국 혹은 에데사 백국에게 충성을 맹세해갔다. 오신은 십자군이 어서 킬리키아와 북시리아에서 지나가서 남시리아와 성지로 가기를 바랬기 때문에 총력을 다해 안티오키아의 탱크레드와 보두앵을 설득했다. 실제로 그는 적의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탱크레드와 함께 셀주크 영지인 마미스트라의 포위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탱크레드는 타르수스 주변의 아르메니아 영지들을 빼았고 공국을 키울 야망을 내비쳤다. 결국 오신은 아트수니와 함께 안티오키아를 견제하기 위해 에데사 백작국을 지원했다. 보두앵과 탱크레드가 다투는 동안 이들은 상당수의 중기병을 에데사 백국군에 지원했다. 이를 감사히 여긴 보두앵은 훗날 이들을 위해 여러번 지원군을 편성하기도 했다. 아트수니는 보두앵의 사촌과 결혼동맹을 맺기도 했다

3. 후일담

오신 램프론의 후예들은 훗날 12세기~13세기의 아르메니아 왕국의 주요 가문이 되어 왕위를 꿰어차기도 된다. 그 자신은 동로마제국에 호의적이었으나 후손들은 그렇지 않았기에 전부 떨어져나왔기 때문....
몇몇 학자들은 훗날 로마제국 내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아르메니아계 군사귀족 아스피테스 가문이나 우르시노스 가문이 그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 알렉시우스 1세가 그에게 세바스토스(부제)의 직위를 주기까지 했다.[2] 오신은 꽤 영향력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 베드로의 유골 잔해를 포함한 값진 보물들을 잔뜩 이주자금으로 챙겨왔을 정도였다.[3] 이는 역사가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파괴당하기만하고 뺏기진 않았다, 아직 동로마 소유였다, 반독립 아르메니아 토후의 것이었다 등등[4] 동로마제국의 지방관.[5] 당시는 모프수에스티아 대부분을 잃고 타르수스 산맥 속에 거점에서 버티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