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킨 1993-2005 | |
▲ 1993년 계약 당시 | |
소속팀 | <colbgcolor=#ffffff,#191919>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프리미어 리그) |
등번호 | 16 |
기록 | |
326경기 33득점 31도움 | |
80경기 14득점 6도움 | |
2경기 | |
45경기 2득점 1도움 | |
13경기 | |
8경기 1득점 1도움 | |
1경기 | |
2경기 1도움 | |
1경기 1득점 | |
합산 성적 | |
478경기 51득점 40도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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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이 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경력을 다룬 문서.2. 이적
점차 실력을 키우며 상위권 클럽들의 관심을 받던 킨은 본래 케니 달글리시가 지휘하던 블랙번으로의 이적에 합의했었지만, 이적 서류에 실수가 발견되어 이적이 지연되는 사이 알렉스 퍼거슨의 전화를 받고 맨유로의 이적을 결정했다. 사실 블랙번도 이 실수를 발견했는데, 실수를 발견한 게 금요일 오후인 데다 주말에 사무실이 닫는 관계로 월요일에 이적을 확정짓기로 구두합의를 한 상태였지만 퍼거슨은 킨을 잡기 위해 토요일에 모든 서류를 완비해 킨에게 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이적료는 영국 기록인 375만 파운드였다.3. 1993-94 시즌
1993년 여름에 킨이 유나이티드에 입성했을 당시 유나이티드의 중원을 구축한 핵심 멤버는 브라이언 롭슨과 폴 인스의 듀오였는데, 이 듀오는 리그 우승의 주축이 되었던 터라 킨이 주전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팀의 레전드인 롭슨은 당시 이미 36세의 노장인 데다 부상에 계속 시달리고 있었던 덕분에 킨은 점차 출장 기회를 늘려가며 선발 멤버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그렇게 첫 시즌부터 주전으로 자리잡은 킨은 프리미어리그 타이틀과 FA컵 타이틀을 거머쥐며 더블을 달성하게 된다.1993-94 시즌: 50경기(선발 47경기) 8골 7도움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37 | 34 | 3 | 5 | 6 |
챔피언스 리그 | 3 | 3 | 0 | 2 | 1 |
FA컵 | 6 | 6 | 0 | 1 | 0 |
코카콜라컵 | 3 | 3 | 0 | 0 | 0 |
커뮤니티 실드 | 1 | 1 | 0 | 0 | 0 |
합계 | 50 | 47 | 3 | 8 | 7 |
4. 1994-95 시즌
94-95 시즌은 맨유와 킨 모두에게 아쉬운 시즌이었다. 일찌감치 챔스는 조별리그 탈락하고 리그 타이틀은 블랙번 로버스에게 승점 1점차로 내준 데 이어, FA컵에서는 준결승 크리스탈 팰리스 전에서 맨유에서의 첫 퇴장을 당하며 결승 출전이 불가했고, 결국 결승에서 에버튼에게 1-0으로 패배하며 무관으로 시즌을 마치고 만 것이다.1994-95 시즌: 35경기(선발 33경기) 3골 5도움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5 | 23 | 2 | 2 | 4 |
챔피언스 리그 | 4 | 4 | 0 | 1 | 1 |
FA컵 | 6 | 6 | 0 | 0 | 0 |
합계 | 35 | 33 | 2 | 3 | 5 |
5. 1995-96 시즌
95-96 시즌에는 폴 인스와 브라이언 롭슨 등이 팀을 떠나고, 데이비드 베컴과 폴 스콜스, 니키 버트 등 퍼거슨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맨유에서 주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팀 내 미드필더 중에서 그나마 경험이 많은 킨은 팀의 허리에서 중추 역할을 했고, 맨유 데뷔 시즌에 이어 프리미어리그와 FA컵 타이틀을 거머쥐며 더블을 달성했다.1995-96 시즌: 37경기(선발 37경기) 6골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9 | 29 | 0 | 6 | 0 |
UEFA컵 | 2 | 2 | 0 | 0 | 0 |
FA컵 | 6 | 6 | 0 | 0 | 0 |
합계 | 37 | 37 | 0 | 6 | 0 |
6. 1996-97 시즌
96-97 시즌에도 굳건한 주전이었으나 무릎 부상으로 인해 결장한 경기가 꽤 많았다. 그리고 특유의 성질 머리로 인해 출전 징계도 많았던지라 중요한 경기에서 출전이 불가했던 경우가 많았던지라 킨의 빈 자리가 컸던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 그래도 리그 타이틀을 거머쥐며 결과적으로 괜찮은 시즌을 보냈다.1996-97 시즌: 33경기(선발 33경기) 3골 2도움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1 | 21 | 0 | 2 | 2 |
챔피언스 리그 | 6 | 6 | 0 | 0 | 0 |
FA컵 | 3 | 3 | 0 | 0 | 0 |
코카콜라컵 | 2 | 2 | 0 | 0 | 0 |
커뮤니티 실드 | 1 | 1 | 0 | 1 | 0 |
합계 | 33 | 33 | 0 | 3 | 2 |
7. 1997-98 시즌
97-98 시즌은 맨유 입단 후 가장 불운했던 시즌이었다. 에릭 칸토나의 은퇴로, 주장 완장을 물러받은 시즌이었으나 당시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알프잉에 홀란드[1]와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십자인대 부상을 입은 것이다.[2] 결국 이 부상으로 인해 잔여 경기를 모두 날리게 된다. 맨유는 킨의 부재로 인해 후반기에 아스날에게 선두자리를 내줬고, 결국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내줘야했다.1997-98 시즌: 11경기(선발 11경기) 2골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9 | 9 | 0 | 2 | 0 |
챔피언스 리그 | 1 | 1 | 0 | 0 | 0 |
커뮤니티 실드 | 1 | 1 | 0 | 0 | 0 |
합계 | 11 | 11 | 0 | 2 | 0 |
8. 1998-99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트레블을 이룩한 98-99 시즌에서의 활약상은 엄청났다. 직전 시즌에서 십자인대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거의 날린 아쉬운 모습을 뒤로 하고, 시즌 총 55경기에 나서는 어마어마한 체력을 보인 것이다. 또한 중요한 상황에서의 활약도 뛰어났다. 특히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2차전에서는 전반전 초반부터 2-0으로 뒤지면서 팀 분위기가 침체될 상황에서 24분에 코너킥 찬스 때 헤더로 만회골을 넣으며 재빨리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결국 맨유는 킨의 골을 시작으로, 34분에 드와이트 요크가 동점골을 기록하며 합산점수에서 원정다득점으로 우세를 잡게 되었고, 84분에는 앤디 콜이 쐐기골을 박으면서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경고를 받는 로이 킨 |
1998-99 시즌: 55경기(선발 53경기) 5골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35 | 33 | 2 | 2 | 0 |
챔피언스 리그 | 10 | 10 | 0 | 3 | 0 |
FA컵 | 7 | 7 | 0 | 0 | 0 |
커뮤니티 실드 | 1 | 1 | 0 | 0 | 0 |
챔피언스 리그 예선 | 2 | 2 | 0 | 0 | 0 |
합계 | 55 | 53 | 2 | 5 | 0 |
9. 1999-00 시즌
99-00 시즌에는 맨유와 재계약을 체결하였으며, 포지션이 중앙 미드필더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45경기에서 12골을 넣는 등 엄청난 활약상을 보이며 2년 연속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동시에 PFA 올해의 선수상과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지난 시즌에 이어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1999-00 시즌: 45경기(선발 44경기) 12골 3도움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9 | 28 | 1 | 5 | 1 |
챔피언스 리그 | 12 | 12 | 0 | 6 | 1 |
클럽 월드컵 | 2 | 2 | 0 | 0 | 1 |
슈퍼컵 | 1 | 1 | 0 | 0 | 0 |
인터컨티넨탈컵 | 1 | 1 | 0 | 1 | 0 |
합계 | 45 | 44 | 1 | 12 | 3 |
10. 2000-01 시즌
00-01 시즌에는 2001년 4월 21일, 맨체스터 더비에서 알프잉에 홀란드에게 가한 태클로 인해 논란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문단 참고. 이 사건과는 별개로 활약은 여전했고, 3년 연속으로 프리미어리그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었다.2000-01 시즌: 44경기(선발 44경기) 3골 7도움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8 | 28 | 0 | 2 | 7 |
챔피언스 리그 | 13 | 13 | 0 | 1 | 0 |
FA컵 | 2 | 2 | 0 | 0 | 0 |
커뮤니티 실드 | 1 | 1 | 0 | 0 | 0 |
합계 | 44 | 44 | 0 | 3 | 7 |
11. 2001-02 시즌
2001년 9월 15일, 뉴캐슬과의 경기에서 팀이 3:4로 지고 있던 후반 막판 앨런 시어러의 도발에 넘어가 퇴장을 당하게 된다. 시즌 시작 전부터 퍼거슨의 은퇴 이야기가 떠도는 등 시끌벅적하게 시즌을 맞이했던 맨유에게 찬물을 끼얹고 만것이다. 이렇게 시작 초부터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맨유는 결국 리그 우승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리그 3위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된다.2001-02 시즌: 43경기(선발 42경기) 4골 5도움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8 | 28 | 0 | 3 | 5 |
챔피언스 리그 | 12 | 11 | 1 | 1 | 0 |
FA컵 | 2 | 2 | 0 | 0 | 0 |
커뮤니티 실드 | 1 | 1 | 0 | 0 | 0 |
합계 | 43 | 42 | 1 | 4 | 5 |
12. 2002-03 시즌
2002-03 시즌 로이 킨은 변함 없이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해당 시즌 3월 초까지만 해도 선두 아스날과 승점이 8점차로 벌어져 있어서 리그 우승은 이번에도 물건너 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스날의 부진 + 주장 로이 킨을 필두로 한 맨유의 상승세가 합쳐져 결국 리그 1경기를 남겨 놓고 리그 우승을 확정 짓게 된다.2002-03 시즌: 32경기(선발 30경기) 1도움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1 | 19 | 2 | 0 | 1 |
챔피언스 리그 | 4 | 4 | 0 | 0 | 0 |
FA컵 | 3 | 3 | 0 | 0 | 0 |
워딩턴컵 | 2 | 2 | 0 | 0 | 0 |
챔피언스 리그 예선 | 2 | 2 | 0 | 0 | 0 |
합계 | 32 | 30 | 2 | 0 | 1 |
13. 2003-04 시즌
2003-04 시즌 여담으로 2004년 1월 17일, 울버햄튼과의 경기에서는 경기 시작을 앞두고 터널에서 대기타고 있었는데 상대 선수가 유니폼 관련 문제로 터널에 모이지 않아서 경기가 지연 되자 맨유 선수들을 이끌고 터널을 빠져나가 경기장에 입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로이 킨을 비롯한 맨유 선수들이 빠져나가자 당황해하는 울버햄튼 선수들과 말리는 심판들의 모습이 압권이었다. 허나 이 경기에서 0:1로 패배했다.2003-04 시즌: 38경기(선발 34경기) 3골 6도움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8 | 25 | 3 | 3 | 3 |
챔피언스 리그 | 4 | 4 | 0 | 0 | 1 |
FA컵 | 5 | 4 | 1 | 0 | 1 |
커뮤니티 실드 | 1 | 1 | 0 | 0 | 1 |
합계 | 38 | 34 | 2 | 3 | 6 |
14. 2004-05 시즌
2004-05 시즌 로이킨이 맨유에 입단하고 처음으로 2시즌 동안 우승이 없던 시즌이자 퍼거슨의 맨유 시대는 이제 끝난게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시즌이다. 로이킨도 불만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그 행보는 후술할 키노케이트 사건으로 일어난다. 2005년 2월 5일에는 버밍엄 시티 전에서 맨유 소속으로 50번째 골을 기록했다.2004-05 시즌: 43경기(선발 40경기) 2골 2도움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31 | 28 | 3 | 1 | 2 |
챔피언스 리그 | 5 | 5 | 0 | 0 | 0 |
FA컵 | 4 | 4 | 0 | 1 | 0 |
칼링컵 | 1 | 1 | 0 | 0 | 0 |
커뮤니티 실드 | 1 | 1 | 0 | 0 | 0 |
챔피언스 리그 예선 | 1 | 1 | 0 | 0 | 0 |
합계 | 43 | 40 | 3 | 2 | 2 |
15. 2005-06 시즌
로이 킨 특유의 성격이 제대로 터져나오게 된 대표적인 사건이 2005-06 시즌 맨유가 미들즈브러 원정에서 1-4로 대패하자[5][6] 킨은 맨유TV와의 인터뷰[7]에서 미들즈브러전 패배의 원인이 된 5명의 선수[8]들을 직접 겨냥하여 능력이 없으면 팀을 떠나라는 식으로 독설을 퍼부었고, 추가로 리오 퍼디난드에게는 12만 파운드의 높은 주급[9]을 받는데 스타도 아닌 놈이 거드름이나 피운다며 맹비난까지 했다. 이 영상을 본 퍼거슨 감독과 데이비드 길 단장은 인터뷰의 내용이 팀 매니지먼트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고 판단하여 맨유TV 편성에서 곧바로 제외하고 킨의 발언이 외부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에서 맨유가 프랑스의 릴에게 0-1로 패배하여 조별리그 꼴지로 탈락하자 데일리 미러는 이 인터뷰를 공개했고, 일명 '키노게이트'로 불린 이 사건은 영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이 사건으로 퍼거슨 감독은 로이 킨이 주장에 걸맞지 않게 팀 내 기강을 해치고 선수단의 갈등을 일으킨다고 판단[10][11], 더 이상 그와 함께 할 수 없다고 결정하여 결국 2005년 11월 18일 상호 계약 해지로 맨유에서 방출되었다. 그러나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맨유 이외의 팀에서는 뛰지 않겠다며 2006년 1월, 스코틀랜드의 셀틱에 입단하여 시즌을 마무리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12]
2005-06 시즌(맨체스터 유나이티드): 6경기(선발 5경기)
<rowcolor=#ffe500>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5 | 4 | 1 | 0 | 0 |
챔피언스 리그 예선 | 1 | 1 | 0 | 0 | 0 |
합계 | 6 | 5 | 1 | 0 | 0 |
16. 총평
로이 킨의 맨유 시절은, 실력 뿐만 아니라 불굴의 정신과 성공에 대한 열망,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알렉스 퍼거슨 경은 그를 함께 했던 선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그 불같은 성격과 자기 자신이나 남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고 과격한 언행 때문에 충돌을 여럿 빚기도 했다.[13][14]로이 킨의 은퇴식 |
로이 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7번의 PL 우승과 4번의 FA컵 우승, 1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4번의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등을 경험했다.
참고로 35살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게 되었는데 젊을때, 지속적인 고관절 부상이 선수 생활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이런 부상만 없었더라면 37~38살까지 뛰었을 것이라고 한다.
1993~2005: 통산 478경기(선발 453경기) 51골 40도움
[1] 엘링 브라우트 홀란의 아버지이다.[2] 1997년 9월 27일 리즈와 맨유의 경기였다.[3] 베컴에 의하면 킨은 경기 끝나고 결승전에 뛰지 못한다는 사실에 낙담했다고 한다. 다른 선수였으면 경기 도중에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다는 점 때문에 이 경기를 로이 킨 커리어 최고의 경기로 뽑는 사람이 많다. 물론 킨 본인은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이고 팀 전체의 업적이라며 겸손하게 반응한다.[4] 로이 킨의 부재로 당시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팀의 가장 연장자이자 오랜 기간동안 몸 담고 있던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이 주장 완장을 대신 차게 되었다.[5] 당시 퇴물대접을 받던 스페인 전 국가대표 가이스카 멘디에타가 맹활약을 펼친 경기로도 유명하다.[6] 사실 이 경기를 망치게 된 경기 외적인 요인으로는 그 경기가 맨유 통산 1000번째 골을 앞두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이 때문에 영국의 언론은 1000호골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기사가 연일 이어졌으며 심지어는 한 맥주회사에서 1000호골의 주인공에게 거액의 상금을 주겠다고 하기까지 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외부적인 상황으로 맨유 선수들이 전반적으로 골을 넣기 위해 경기 본연에 집중하지 못해 더 큰 참사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많다. 참고로 이날 넣은 1골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1000호골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경기내외적으로 완패를 당했기 때문에 이 1000골에 대한 화제는 곧 사그러들었다. 게다가 이 골도 0:4로 끌려가다가 겨우 넣은 만회골이었다.[7] 사실 원래 이 인터뷰는 게리 네빌이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킨의 부상 때문에 서로 스케쥴을 조정하게 되면서 킨이 맡게 된 것이다.[8] 일명 로이 킨의 '맨유오적'으로 불렸는데, 리암 밀러, 키어런 리차드슨, 앨런 스미스, 존 오셔, 대런 플레처가 집중 포화 대상이었다.[9] 사실 킨은 퍼디난드의 주급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선수 개개인의 급여에 관심도 없다고 한다. 12만 파운드는 그저 그를 비난하기 위한 랜덤한 액수였을 뿐이었다.[10] 그런데 킨의 주장에 의하면 정작 맨유에서 그와 같이 뛰었던 선수들은 그 문제의 인터뷰를 크게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구단은 킨에게 5,000파운드 벌금을 내라고 했는데, 그동안 이것보다 더한 벌금도 문제 없이 내던 킨은 무슨 이런 문제로 벌금을 내야하냐며 벌금 내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킨은 이 벌금 납부 거부가 그가 맨유에서 내쳐진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11] 퍼거슨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후 킨과 면담을 하였는데 이때 킨이 비디오를 선수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이 결정하게 하자고 제안했고 퍼거슨이 동의했다. 비디오가 끝나고 킨이 할 말있냐고 선수들에게 물어보자 이때 반 데사르가 동료에게 할 수 있는 비판의 선을 넘었다고 했다. 이에 격분한 로이 킨은 이후 반데사르, 반니스텔루이, 카를루스 코치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퍼거슨과도 설전을 벌였다고 한다. 이때 쯤엔 선수들이 방을 나갔고 이후로도 한참을 설전을 벌인 이후 퍼거슨은 그를 내보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12] 원래 로이 킨은 05-06 시즌이 끝나고 맨유를 떠나기로 했었다. 단지 키노게이트로 그 시기가 앞당겨 졌을뿐이다.[13] 맨유 시절 동료로 인간성 좋고 선량하기로 정평이 난 솔샤르도 훗날의 인터뷰에서 로이 킨은 선수와 감독 양쪽 다 깠다. 좀 돌려말하긴 했지만 이름을 지목해서 유독 로이 킨한테만 그런 걸 보면 일화가 많기도 한 모양. 또한 마인드가 군인 마인드인데 과거 감독 시절 선수들을 경기력 향상과는 상관없는 병영캠프에 보내기도 했다.[14] 프로 선수로서 축구를 대하는 마인드가 굉장히 빡세다. 18-19 시즌 맨유와 리버풀의 더비 경기 시작전에 양팀 선수들이 터널에서 서로 포옹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전쟁에 나가는데 포옹이 웬말이냐. 상대를 쳐다도 보지 말아야 한다"며 대차게 깠다.[15] 경기 끝나고 관중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별로 할 말 없습니다. 경기 보러와주신 맨유, 셀틱 팬들 감사합니다. 한 시즌동안 맨유, 셀틱 선수들 고생하셨습니다. 딱히 더 말할거 없습니다. 오늘 즐거우셨으면 좋겠고요. 제 남은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입니다. 행운을 빕니다"라며 정말 쿨하고 짧게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