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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헌트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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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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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헌트 Roger Hunt, MBE | ||
<colbgcolor=#eeeeee,#191919> 출생 | 1938년 7월 20일 잉글랜드 랭커셔 주 글레이즈베리[1] | |
사망 | 2021년 9월 27일 (향년 83세) 잉글랜드 체셔주 워링턴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75cm | |
포지션 | 축구 선수(스트라이커 / 은퇴) | |
소속 | 리버풀 FC (1958~1969) 볼턴 원더러스 FC (1969~1972) → 헬레닉 FC (1971 / 임대) | |
국가대표 | 34경기 18골 (잉글랜드 / 1962~1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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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 리버풀 FC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다.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영국 랭커셔지방의 글레이즈베리에서 태어난 헌트는 여러 유소년 클럽들을 거쳐 약관의 나이였던 해인 1958년 7월, 리버풀 FC와 정식계약을 맺고 안필드에 입성하게 된다. 그리고 1959년 9월 9일 안필드에서 열린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와의 세컨드 디비전 경기에서 후반 19분 골을 기록, 리버풀의 2-0 승리를 도와 화려한 데뷔전을 치르며 전설의 시작을 알렸다.리그 우승 트로피를 안필드에 선사한 로저 헌트 |
이후 얼마 지나지않아 기존의 감독이었던 필 테일러에서 훗날 리버풀의 황금기를 이끌게 될 빌 샹클리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고 샹클리는 전반적인 훈련장의 시스템과 대대적인 선수개편을 감행하게 되었다.[2] 다행히도 헌트는 리빌딩에서 살아남아 팀에 잔류했고 이는 1960년대 리버풀의 성공에 신의 한수가 되었다. 헌트는 자신을 남긴 샹클리에게 보답이라도 하듯이 1961-62시즌 41경기 출전 41골로 경기당 1골이라는 경이로는 기록을 세우며 팀의 2부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팀의 침체기를 끝내며 1부 리그로의 승격에 지대한 공을 세운다.
이후 1부 리그로 승격하며 발돋움한 팀과 함께 헌트는 리버풀 유니폼을 입고 492경기 출전 286골을 기록하며 2번의 리그 우승과 1번의 FA컵 우승을 이끌었고 리버풀 전성기의 초석을 다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이에 그는 당대 투톱 파트너 이안 세인트 존과 함께 리그 최고의 공격진으로 이름을 남겼고, 팀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가장 뛰어난 공격수 중 하나로 기록되게 되었다. 헌트가 득점한 286골은 훗날 후배인 이안 러시가 경신하기까지 리버풀의 통산 최다 득점으로 남아있었으며, 현 시점까지도 리그 득점으로는 최다 득점자의 경지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그는 2021년 9월 모하메드 살라가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리버풀 역사상 최소 경기[3]에서 100득점을 기록한 선수이기도 했다.
1969년 11년 동안의 장대한 리버풀 커리어를 끝낸 뒤에는 볼턴 원더러스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1971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헬레닉 FC로 임대를 떠나기도 했다. 이후 1972년 선수 생활을 완전히 종료했으며, 1972년 4월 리버풀과의 은퇴 기념 경기를 가졌다. 이후 대영제국 훈장 5등급을 2000년에 수훈받았으며, 2021년 9월 27일 83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장례식은 리버풀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62년,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월터 윈터보텀은 그가 2부 리거임에도 불구하고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친선경기에서 대표팀 데뷔전을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심지어 그 해에 있었던 월드컵에 참가하는 최종명단에도 이름을 올리며 모두를 놀라게 했으나 정작 본선에서는 한경기도 나오지 못했다.1966년 영광의 삼사자 군단과 함께 들어올린 쥴리메컵 |
이후 1부리그에서 뛰어난 퍼포먼스로 소속팀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그는 자국에서 열린 1966년 월드컵 명단에 승선하는데 성공하면서 생애 두번째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된다. 본인이 나고 자란 자국에서 열린 만큼 그에게는 중요한 무대였고 알프 램지 대표팀 감독은 그를 투 톱 중 한 자리에 기용하기로 결정하면서 굳건한 신뢰를 드러냈다. 그는 이번 대회에 선발된 3명의 포워드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초반에는 토트넘 홋스퍼의 스트라이커인 지미 그리브스와 호흡을 맞췄지만 그리브스의 다리 부상 이후에는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의 제프 허스트와 투톱으로 나섰다. 그리고 월드컵 본선 6경기 모두 출전하며 3골[4]을 기록했고 팀은 결승전에서 서독을 꺾고 쥘리메컵을 거머쥐는데 성공하며 월드컵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조국의 월드컵 우승에 기여한 그는 2006년 잉글랜드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강력한 득점력을 갖춘 클래식한 스트라이커로, 뛰어난 골 결정력과 위치 선정 능력을 바탕으로 리버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당대 풋볼 리그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하나로,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특유의 결정력과 날카로움을 인정받아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헌트는 페널티 박스 안에서 기회를 놓치지 않는 냉정한 마무리 능력을 가졌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였다. 특히 상대 수비 라인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움직여 기회를 창출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항상 골을 넣기 좋은 위치를 선점하는 영리한 플레이를 펼쳤던 선수다. 또한 강한 오른발 슛뿐만 아니라 왼발도 잘 사용하는 선수였고, 여기에 기습적인 헤딩 능력도 갖추고 있어 다양한 방식으로 득점을 올릴 수 있는 만능의 득점 기계였다.
여기에 더하여 운동 능력도 탁월하여 빠른 발을 이용해 상대 수비를 뚫고 침투하는 능력이 좋았으며, 특히 역습 상황에서 위협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당대 파트너로 이름을 날린 이안 세인트 존 또한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갖춘 공격수였기에 세인트 존과 헌트의 투톱 조합은 상대 수비진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플레이를 매 경기 선사했다.
또한 단순히 득점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팀을 위해 적극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수비적인 역할도 수행하는 헌신적인 스타일이었다. 당시 샹클리의 팀은 공격진의 유기적인 활동 반경을 이용하여 상대를 강하게 압박하는 컨셉을 가지고 있었는데, 헌트의 이러한 헌신적인 수비 가담이 빛을 발했다. 강한 체력과 꾸준함도 가지고 있어 매 시즌 꾸준한 득점력을 보여줬으며, 부상 없이 오랫동안 정상급 기량을 유지한 선수였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 리버풀 FC (1958~1969)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63-64, 1965-66
-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1961-62
- FA컵: 1964-65
- FA 채리티 실드: 1964, 1965, 1966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66
4.2. 개인 수상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득점왕: 1965-66
-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득점왕: 1961-62
4.3. 개인 기록
4.4. 수훈
- 대영제국 훈장 5등급 (MBE): 2000
5. 여담
- 1959년에 패트리시아 오브라이언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그는 워링턴 근처에서 두 번째 아내인 로완과 함께 살았다.
- 이안 러쉬와 함께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골잡이로 꼽히며, 1966년 월드컵 우승으로 당대 최고의 사랑을 받았던 선수이기도 했다. 이에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 받았을 뿐, 정식으로 기사 작위를 수여받은 것은 아니나, 리버풀 팬들에겐 '로저 헌트 경(Sir)'으로 불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