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세인트 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둘러보기 틀 모음 | |||
대표팀 | ||||
클럽 | ||||
5대 | 13대 |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스코틀랜드의 前 축구선수 | ||
| ||
이안 세인트 존 Ian St John | ||
본명 | 존 이안 세인트 존 John Ian St John | |
출생 | 1938년 6월 7일 | |
스코틀랜드 노스래너크셔 머더웰 | ||
사망 | 2021년 3월 1일 (향년 82세) | |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위럴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188cm, 79kg | |
직업 |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유스 | 머더웰 브릿지 워크스 (~1955) 노스 머더웰 애슬레틱 FC (1955~1956) 머더웰 FC (1956~1957) |
프로 | 머더웰 FC (1957~1961) → 더글라스 워터 시슬 (1957 / 임대) 리버풀 FC (1961~1971) 헬레닉 FC (1971) 코번트리 시티 FC (1971~1972) 케이프타운 시티 FC (1972) 트란메어 로버스 FC (1972~1973) | |
지도자 | 코번트리 시티 FC (1971~1972/수석 코치) 머더웰 FC (1973~1974/감독) 포츠머스 FC (1974~1977/감독) | |
국가대표 | 21경기 9골 (스코틀랜드 / 1959~1965) |
[clearfix]
1. 개요
스코틀랜드 국적의 前 축구선수. 빌 샹클리 시절의 리버풀 FC에서 활약했다.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스코틀랜드 머더웰의 철강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세인트 존은 십대 시절 지역 제철소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제철소 축구 팀이었던 머더웰 브릿지 워크스에 소속되어 축구를 시작했다.[1] 이후 본격적으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세인트 존은 지역 유소년 축구 클럽을 거쳐 지역의 대표 축구단인 머더웰 FC에 스카우트되어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세인트 존은 1957년에 프로 계약을 맺었고, 머더웰의 산하 구단이었던 더글라스 워터 시슬로 잠시 임대를 다녀온 뒤 성인 무대에 본격적으로 기용되기 시작했다.[2] 1군 데뷔전은 퀸 오브 더 사우스 FC 원정 경기였다. 그는 당대 머더웰의 감독이던 바비 앤셀에 의해 가파르게 성장했고, 앤디 위어, 윌리 헌터, 팻 퀸, 새미 리드 등의 재능있는 젊은 선수들과 함께 팀을 이끌었다. 당시 세인트 존이 주축이 된 머더웰은 '앤셀 베이비스'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세인트 존은 1959년 하이버니언 FC를 상대로 스코틀랜드 리그 역사상 최단시간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혜성같이 떠올랐고, 커리어 초기임에도 1961년 머더웰을 떠나기 전까지 총 144경기에서 105골을 넣는 어마어마한 득점력을 뽐냈다.
그리고 신성으로 떠오르던 그를 리버풀 FC의 빌 샹클리가 지켜보고 있었다. 샹클리는 리버풀에 부임하기 이전부터 고향 스코틀랜드의 신성들을 눈여겨 보고 있었으나 허더즈필드 타운 FC의 자금력으로는 영입이 불가능해 입맛 만을 다시고 있었다. 그러던 1961년 어느 일요일 아침, 선데이 포스트를 통해 "세인트 존이 이적을 원한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샹클리는 바로 전화를 걸어 월요일 밤 머더웰로 직접 건너갔다.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의 찰리 미튼 감독도 머더웰로 건너와 그와 계약을 시도했지만, 샹클리는 당시 구단의 디렉터 에릭 소이어에게 '그는 그냥 좋은 센터 포워드인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뛸 유일한 센터 포워드'라며 영입을 무조건 성사시켜 달라는 뜻을 전했고, 결국 다음날인 1961년 5월 2일, 세인트 존이 안필드에 입성하게 된다. 그는 당시 37,500 파운드의 이적료로 리버풀 유니폼을 입었는데, 이는 당대 리버풀의 영입 이적 클럽 레코드였다. 당시 리버풀은 세인트 존과 함께 던디 유나이티드 FC의 론 예이츠[3]를 함께 영입하였는데, 후에 이 두 스코틀랜드 선수는 60년대부터 샹클리가 만들기 시작한 붉은 제국의 초석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인트 존은 더비 라이벌 에버튼 FC과의 리버풀 지역 친선 컵 대회에서 데뷔전을 가졌고, 팀은 4-3으로 패배했지만 홀로 3골을 몰아치면서 팬들의 기대를 샀다. 이후 그는 1961년 8월 19일, 브리스톨 로버스 FC를 상대로 공식경기 데뷔전을 치렀고, 데뷔 11일 후 선덜랜드 AFC와의 경기에서 멀티골을 집어넣으며 득점포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세인트 존은 리버풀에서의 첫 시즌 동안 총 18골을 넣으며 로저 헌트와 막강한 투톱을 구축하는 인상적인 활약을 남겼고, 팀을 1부 리그 승격으로 이끌었다.[4] 이후 그는 이어진 1962-63 시즌 1부 리그에서도 활약하며 팀을 안정적으로 중위권에 안착시켰고, FA컵 준결승에서는 고든 뱅크스의 신들린 선방으로 레스터 시티 FC에 패하긴 했지만 뛰어난 활약으로 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리그 우승을 이끈 론 예이츠와 이안 세인트 존 |
그리고 대망의 1963-64 시즌, 리버풀은 초반부터 부진하면서 리그 선두권과 승점 17점 차로 벌어져 있었으나, 무서운 추격을 시작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4점 차, 에버튼 FC을 5점 차로 제치고 우승을 차지, 감격스러운 17년만의 잉글랜드 왕좌 복귀를 알렸다. 당시 세인트 존은 총 21득점을 올리며 팀 최다 득점자가 되었고, 리버풀의 놀라운 뒷심에 원동력을 제공했다. 그 다음 시즌인 1964-65 시즌에는 FA컵 결승전에서 연장전 막판에 리즈 유나이티드 FC로 결정적인 다이빙 헤더 득점을 성공시켜 구단 역사상 최초의 FA컵 우승까지 견인했고, 구단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항전인 유러피언컵에 출전하여 준결승까지 올랐다. 세인트 존은 당시 준결승 1차전에서 당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의 인터 밀란을 상대로 득점까지 올리며 기념비적인 3-1 승리를 견인하기도 했다.[5]
1965-66 시즌에는 41경기 10골을 넣으며 득점은 다소 줄었지만 다시 한 번 팀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세인트 존은 해당 시즌 UEFA 컵위너스컵 결승에 나서며 사상 최초의 유럽 대항전 결승에도 출전했다.[6] 그러나 그 다음 시즌부터 세인트 존의 활약은 다소 줄어들었고, 1960년대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기용되기는 했으나 스트라이커 위치에서 조금 더 내려와 처진 위치에서 플레이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이후 60년대가 끝나갈 무렵이 되자 세인트 존은 30대에 접어 들었고, 샹클리는 세인트 존과 헌트를 비롯해 10년 넘게 팀을 이끌던 주축들을 밀어낼 새로운 선수들로 팀을 리빌딩하기 시작했다. 결국 세인트 존은 1970-71 시즌엔 아예 자리를 잃어 리저브 팀에서 뛰었고, 1971년 8월 25일 리버풀을 떠나게 되었다.[7] 그러나 그는 리버풀에서 425경기에 출전해 총 118골을 기록하며 붉은 제국의 서막을 알렸으며, 로저 헌트와 60년대 전설적인 공격 듀오로 불멸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이후 세인트 존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는 1971년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미어 디비전에 진출하여 헬레닉 FC에서 잠깐 뛰다가 잉글랜드로 복귀해 코번트리 시티 FC에서도 시즌을 보냈고[8], 이후 다시 남아공으로 건너가 케이프타운 시티 FC에서 뛰었다. 이후 1972-73 부터는 고향 동료이자 리버풀 입단 동기였던 론 예이츠가 감독직을 맡고 있던 트랜미어 로버스 FC로 이적해 머지사이드에서 마지막 커리어를 보냈다. 그리고 1973년 여름,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고 선수를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59년 어린 나이에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그러나 당대 스코틀랜드 대표팀 자체가 그리 많은 국제 대회 경기를 치르는 팀도 아니었을 뿐더러, 1962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도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일격을 맞으며 떨어졌기 때문에 1965년까지 꾸준하게 소집은 되었으나 총 21경기 출장에 그쳤고, 9득점을 기록했다.3. 지도자 경력
은퇴 직후인 1973년, 세인트 존은 고향 클럽 머더웰 FC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한 시즌을 보내는 동안 그는 재정적인 문제로 보드진과 불화를 겪었고, 결국 1974년에 바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원래 머더웰을 떠나 리즈 유나이티드 FC에 부임할 에정이었다. 리즈의 전설적인 감독 돈 레비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게 되며 공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또 다른 전설 조크 스타인이 세인트 존을 추천했고, 그는 감독 후보로 면접까지 보았다. 그러나 뜬금없이 브라이언 클러프가 리즈의 감독으로 선임되었고[9], 리즈행은 무산되었다.그러자 빌 샹클리가 세인트 존에게 포츠머스 FC를 추천했다. 당시 포츠머스의 회장은 세인트 존에게 선수 영입을 위한 자금이 있을 거라 말했고, 새 경기장을 건설 중이라며 감독직을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이에 세인트 존도 희망을 품고 포츠머스로 입성했다. 그러나 약속과 현실은 매우 달랐다. 그는 어떤 자금도 지원받지 못했고, 당연히 경기장 신축도 거짓말이었다. 세인트 존은 당시 "내가 본 최악의 선수들만 있었다."며 포츠머스 감독직을 회상했다. 결국 세인트 존은 4시즌 동안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재정 문제와 불화를 견디지 못해 감독직을 내려놓고 축구계에서의 모든 커리어를 종료했다.
4. 은퇴 후 말년
커리어를 완전히 종료한 뒤에는 특유의 축구 지식과 열정을 빛내며 방송계에 진출했다. 세인트 존은 1985년부터 1992년까지 국가대표팀과 리그에서 치열하게 맞붙은 당대 라이벌 지미 그리브스 함께 ITV 채널의 펀딧으로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다. 그는 또한 어린 선수들을 위한 축구 아카데미를 설립하며 유소년 양성에도 힘을 썼다.빌 샹클리 기념상 수상식에서 론 예이츠와 함께 |
그러나 2014년 4월, 그는 방광암 판정을 받아 수술을 받았고, 오랜 투병 끝에 2021년 3월 1일, 머지사이드의 애로우 파크 병원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리버풀과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로부터 추모가 이어졌으며, 그의 전설적인 커리어가 다시 한 번 조명받았다.
5. 플레이 스타일
1960년대 로저 헌트와 뛰어난 파트너십을 자랑하며 시대를 풍미한 센터 포워드다. 신체적으로 뛰어난 유형의 선수는 아니었지만 좋은 운동 능력과 뛰어난 위치 선정, 민첩한 몸놀림으로 상대 수비진을 헤집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페널티 박스 안에서의 결정력이 뛰어났으며, 중요한 순간에 침착하게 골을 마무리하는 능력이 돋보이는 선수였다. 키가 크진 않았지만 헤딩이 강점 중 하나였을 정도로 특유의 운동 신경을 활용한 마무리 능력이 좋았다.또한 고전적인 스트라이커 역할에만 종속되지도 선수였다. 운동량이 많고 활동 범위가 넓어 최전방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중원으로 내려와 연계 플레이를 돕거나 측면으로 빠지는 등 넓은 활동 반경을 보였다. 이에 말년에는 센터 포워드 위치에서 다소 내려와서 후방에서 풀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만큼 볼을 다루는 기술과 연계 플레이에서도 장점이 있었기에, 빠르고 세밀한 볼 컨트롤을 바탕으로 동료들과의 호흡도 우수한 선수였다. 샹클리가 W-M(3-3-4) 포메이션에서 헌트, 앨런 에이코트, 이안 캘러한 등을 이용해 다양한 조합의 공격 전형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도 세인트 존의 유연함 덕분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경기장에서 항상 의욕적으로 뛰었고 팀을 이끌며 상대 수비진을 끊임없이 압박하는 스타일이었다. 세인트 존의 이러한 스타일은 특히 상대를 기다리지 않고 압박을 가하는 형태의 수비를 사용한 샹클리의 전술에도 매우 적합했다. 그러나 가끔은 의욕이 과해 종종 폭력적인 플레이로 퇴장도 당하곤 하는 등, 이름에 세인트가 들어가지만 전혀 saint(성스러운)하지는 못한 플레이로도 유명했다.[10]
6. 대회 기록
- 리버풀 FC (1961~1971)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63-64, 1965-66
-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1961-62
- FA컵: 1964-65
- FA 채리티 실드: 1964, 1965, 1966
7. 여담
- 어린 시절 복싱 선수의 꿈을 키웠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축구의 길로 들어섰다.
- 론 예이츠와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인데다가, 같은 해에 리버풀에 입단했고, 같은 해에 리버풀에서 떠났으며, 후에 머지사이드의 또 다른 축구팀 트랜미어 로버스 FC에서 예이츠가 감독 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함께 했다. 은퇴 이후까지 절친한 사이를 유지했다.
- 2008년,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 원래 복싱에도 관심이 있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2] 임대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기계 부품 엔지니어 일을 병행했으나, 너무 하기 싫어 축구에 전념했다고 한다.[3]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중앙 수비수 중 하나로, 샹클리 시대의 핵심 수비수였다. 예이츠도 샹클리가 눈여겨보던 스코틀랜드 신성 중 하나였다.[4] 당시 리버풀은 2부 리그의 늪에 빠져 있다가 샹클리를 선임해 침체기를 탈출하는 시점에 있었다.[5] 그러나 2차전 이탈리아 원정에서 3-0으로 패하며 결승 진출에는 실패한다.[6] 그러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2-1로 석패하며 우승에는 실패했다.[7] 입단 동기인 론 예이츠와 함께 떠났다.[8] 원래는 스토크 시티 FC로 이적할 예정이었지만 코번트리 시티의 노엘 캔트웰 감독이 수석 플레잉 코치직을 제안해서 코번트리로 이적했다.[9] 그러나 강압적인 지도 방식에 의해 클러프는 리즈 선수단과 엄청난 불화를 겪었고 44일만에 경질되었다. 그리고 이후 노팅엄 포레스트 FC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전설적인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한다.[10] 가끔 경기가 과열되면 주먹을 날리기도 했는데, 실제로 어린 시절 복싱 선수를 꿈꿨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