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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7:14:22

리볼리 전투

파일:external/www.military-art.com/dhm045.jpg
1. 개요2. 배경
2.1. 알빈치의 공세2.2. 나폴레옹의 대응
3. 전투 직전4. 전투 경과
4.1. 연이은 위기4.2. 대반전
5. 결과 및 영향

1. 개요

리볼리 전투는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부로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1796~1797년 이탈리아 원정에서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였다. 1797년 1월 14~15일에 알프스산맥과 만나는 이탈리아 북부 내륙의 리볼리(Rivoli) 지역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혁명군이 요세프 알빈치(József Alvinczi)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을 완파하고 이탈리아 북부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나폴레옹은 숫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일부러 리볼리의 고립된 지형에 진지를 구축하여 자신이 선택한 전장으로 오스트리아의 주력을 끌어들였고, 사방을 포위해서 공격해 들어오는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시기적절한 부대 재배치를 통해 대승을 거두었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을 소멸시킨 직후 병력을 돌려 나폴레옹군의 배후를 위협하던 더 작은 규모의 오스트리아 부대들도 궤멸시켰다. 눈부신 승전 덕분에 나폴레옹은 기존까지 이탈리아 방면 프랑스군을 방치하다시피 했던 프랑스 총재정부로부터 지원군을 얻어낼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 본토로 진격하여 제1차 대프랑스 동맹전쟁을 종결시켰다.

전투가 벌어진 리볼리는 리볼리 베로네세(Rivoli Veronese)로[1] 이름답게 베로나 근처의 코무네[2]이다. 또한 당시 리볼리는 오스트리아령 베네치아의 일부분이었다.

2. 배경

리볼리 전투보다 약 1년 전인 1796년 3월에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부임과 거의 동시에 오스트리아군의 허를 찌르는 기동과 빠른 공세를 통해 순식간에 오스트리아령 북이탈리아를 거의 장악하였다. 허둥지둥대던 오스트리아군은 북쪽으로 후퇴할 수 있던 부대를 오스트리아령 스위스로 퇴각시켰고, 남은 부대는 북이탈리아의 중앙부에 위치한 만토바로 집결시켜 농성을 하였다. 프랑스군은 만토바를 포위하였으나, 워낙 만토바의 지형이 방어에 유리한 데다가 프랑스군이 보유한 요새 공격용 중포의 수가 부족하여 공성은 지지부진했다.[3]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을 격퇴하고 만토바의 포위를 풀기 위해 반년 정도의 기간 동안 3회에 걸쳐 북쪽의 스위스나 동쪽의 오스트리아령 베네치아 방면에서 구원군을 일으켜 내려왔고, 병력의 열세에 처한 나폴레옹은 매번 처절한 기동 방어를 통해 오스트리아의 이런 시도들을 간신히 격퇴하였다. 그러던 와중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어 알프스산맥에 눈이 쌓이기 시작하자 오스트리아 본토에서 지원이 올 수 있는 통로가 날씨가 풀려 눈이 녹을 때까지 막히고, 장기간 농성 중인 만토바의 식량이 거의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는 마지막 4번째 대규모 구원군을 일으켜 공격에 나섰으며,[4] 오스트리아 황제의 군사학 스승이자 얼마 전에 나폴레옹군과도 겨뤄본 적이 있는 노장 요세프 알빈치 장군에게 지휘를 맡겼다.

사실 1797년 나폴레옹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비록 1796년 11월 아르콜 다리 전투에서 알빈치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어 오스트리아군의 만토바 해방시도를 좌절시키긴 했으나 아직 오스트리아군은 건재했고, 총재정부로부터의 지원도 여전히 제대로 오지 않고 있었다.

물론 오스트리아군의 사정도 좋지 않긴 매한가지였다. 비록 프랑스군이 난공불락인 만토바 요새를 쉽사리 건드리진 못하고 있었으나, 만토바 요새의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의 포위에 보급이 거의 바닥났고, 여기에 요새를 강이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 합쳐져 전염병까지 돌아 제대로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전체의 약 1/3인 9,8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비록 만토바 요새의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뷔름제르가 실날의 희망을 붙잡고 계속 버티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할 상황이었고, 만토바를 내주면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반도를 포기해야 했다.

따라서 알프스와 베네치아 방면의 오스트리아군은 최대한 조속히 만토바 요새를 해방시키기 위해 라인 전선에서 이탈리아 방면으로 병력을 차출해 이탈리아 방면의 병력을 증원시킨 후 만토바로 진격해 포위를 풀고자 했다.

2.1. 알빈치의 공세

이때 나폴레옹의 휘하에는 총 46,000명의 병력이, 알빈치의 휘하에는 총 47,000명의 병력이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만토바 포위를 위해 약 10,000명의 병력을 할당해야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군대를 북쪽의 쥐트티롤과 동쪽의 베네치아에서 각각 일으키고 있었는데, 비록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대체적인 동향은 파악하고 있었으나, 북쪽과 동쪽 중에 어느 방면의 군대 규모가 더 큰지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으며, 오스트리아군이 택할 진격로 역시 확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일단 동원 가능한 나머지 병력도 여러 부대로 나누어 분산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알빈치는 1797년 1월 동쪽 베네치아 방면을 조공으로 하고 주력 28,000명은 북쪽 쥐트티롤에서 아디제 계곡으로 남하시켰다. 주력을 직접 지휘하는 알빈치의 계획은 북쪽의 전초 부대로 배치된 프랑스의 바르텔레미 카트린 주베르의 병력을 빠르게 섬멸하고 그대로 아디제 계곡을 나와 만토바를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알빈치는 주베르의 군대를 포위섬멸하기 위해 병력을 둘로 나누어 내려왔지만, 겨울에 알프스를 산악행군하는 무리한 작전으로 인해 병력들이 서로 손이 맞지 않아 헤매는 모습을 보였고, 덕분에 주베르의 병력은 포위를 피해서 리볼리로 후퇴해 방어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2.2. 나폴레옹의 대응

3. 전투 직전

4. 전투 경과

4.1. 연이은 위기

4.2. 대반전

5. 결과 및 영향


[1] 베로네세(Veronese)는 '베로나 지역의' 라는 뜻이다.[2] 코무네(comune)는 북부~중부 이탈리아에 있었던 자치 도시 혹은 도시 공화국을 말한다.[3] 당시 프랑스 야전 포병은 그리보발의 포병 개혁 이후 비교적 빠른 이동과 방렬이 가능한 소구경~중구경 대포를 주력으로 사용하였기에, 나폴레옹군에는 대구경 대포가 거의 없었다. 대신에 나폴레옹군은 북이탈리아를 장악한 뒤 여기저기 요새에 남겨진 오스트리아의 중포를 끌고와 만토바 공성에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나마도 이후 오스트리아의 만토바 구원군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중포의 대부분이 손망실된다.[4] 수는 많았지만 대신에 병력의 질이 좋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