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쉐린 별 붙은 레스토랑의 잘나가는 수셰프였다. 요리면 요리. 외모면 외모. 빠지지 않는 스펙으로 손님들 시선과 극찬을 독차지하던 그가 #눈물셰프 란 별명을 시작으로 이른 갱년기다, 빙의다.. 온갖 소문에 휩싸이더니 지화동이라는 허름한 동네에 레스토랑을 오픈하겠다고 사라져버렸다.
#눈물셰프 란 별명이 생긴 건 그가 아무 때나 이유 없이 눈물을 흘렸기 때문인데.. 근사한 목소리로 메뉴를 설명하다가 또로로 눈물을 흘리고 주방에선 사적 감정 허용 못 한다며 후배들을 가르치던 그가 복받치는 감정을 남몰래 달래며 속눈썹을 적신 이유는 뭘까?
쌍둥이 중 일부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쌍둥이 텔레파시라 불리기도 하고 칼 융이 말한 공시성(synchronicity,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 같은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하던 현상. 계훈과 계영, 이란성 쌍둥이 남매가 바로 그랬다. 남매는 이 현상을 '링크'라고 불렀다. 계영이 크게 기쁘거나 슬프거나 두려우면 계영이 지금 기쁘구나, 슬프구나, 두렵구나, 알 수 있던 계훈은 뭐 이런 쓸데없는 능력이! 툴툴대면서도 계영이 저를 필요로 할 때면 여지없이 출동해 든든한 빽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18년 전의 일.
18년 전 계영이 실종된 후로 링크를 느껴본 적 없던 계훈은 이 현상이 다시 일어난 이유를 알고 싶다. 설마 계영이가 살아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대체 왜 이런 일이? 혼란도 잠시, 계훈은 이 모든 걸 신호로 받아들였다. 이제 그만 과거와 마주하라는 신호. 모른 척 묻어둔 모든 걸 끝내라는 신호.
계훈은 모든 것이 시작된 동네 지화동으로 돌아가 레스토랑을 차린다. 그런 그를 맞이한 건, 18년 전 그때 그 모습을 간직한 동네 사람들이다. 셀프 인테리어 중인 계훈을 둘러싸고 폭풍 수다를 떠는 꽃무늬 몸빼 아줌마 군단, 계훈의 레스토랑 앞에다 하루에 두 번은 꼭 노상방뇨를 하는 아저씨 등 촌스럽고 소박하고 오지랖 넓고 정 많지만 사실은 모두가 저마다 비밀을 가진 위험하고 수상쩍은 사람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수상하고 이상한 여자, 노다현. 바로 계훈의 감정에 불쑥불쑥 침범하던 감정들의 주인공. 대체 내가 왜 이 여자의 감정들을 느끼는 걸까. 이 여자의 정체는 뭘까. 계훈은 잠시 혼란스럽지만 이내 그 의문마저 구석에 처박아버린다. 내 눈앞에 있을지 모르는 범인을 두고, 이 여자의 존재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여자의 설렘이 느껴진다. 바로 나를 향한 설렘. 차갑게 거절했더니, 이 여자의 아픔이 느껴진다. 나로 인한 아픔.
이제 계훈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설렘과 아픔은 저 여자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사는 게 힘들어, 웃으면 복이 온다길래 복 받으려 웃었더니 그 미소가 날 향한 거라 착각한 미친놈이 스토킹 폭력을 휘둘러 본의 아니게 스토커를 죽이고 자수하러 갔는데 하필 불금.. 지구대가 만원이라 자수 실패 후, 집 앞에 버려진 냉장고에 시체를 숨겼는데 앞집 레스토랑 남자가 실수로 버렸던 거라며 냉장고를 회수해가고 저는 그 냉장고를 찾으려 기웃대다가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됐어요. 뭐 이따위 인생이 다 있나요? 남들도 보통 이런가요?”
아니, 애초에 지금 상황에서 자소서나 쓸 수 있을까. 항소서면 몰라도. "사람을 죽였지만 정당방위였어요!"라고 말한들 누가 믿어줄까. 회사에서 잘릴 때도 내 말 아무도 안 믿어줬는데.. 겉보기엔 멀쩡하고 젠틀하다 생각했던 직장 상사가 상상할 수도 없던 폭력을 행사. 그에 저항했다가 되레 무고죄로 몰려 오명을 뒤집어쓴 채 퇴사 당했다. 그 덕에 아르바이트 전전하다가 스토커가 꼬여 현재 이 모양 이 꼴. 대체 내 인생은 왜 이럴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자책하다가 깨닫는다. 내 잘못은 단 1도 없다는 걸. 나는 그저 피해자이자 생존자라는걸! 다시 돌아가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걸!
그러나 그걸 깨달았다 한들, 상처가 사라지거나 몸에 새겨진 공포나 트라우마가 극복되는 건 아니다.
나는 잘못이 없고 피해자이자 생존자이다. 어제도 하고 그제도 했던 그 결심을 오늘도 되새기던 어느 날, 시체 쟁탈전 덕에 만난 앞집 남자 은계훈은 어딘지 수상하고 어딘지 위험해 보이는 동시에 기막히게 내 기분을 아는 것만 같다. 내가 지금 우울한지 내가 지금 무서운지 내가 지금 행복한지 내가 지금 설레는지...
시종일관 철벽을 치면서도 내 기분을 헤아려주고, 갈 곳 없는 날 레스토랑에 기꺼이 취직시켜주고, 곤란할 때마다 나타나 해결해 주는 이 남자에게 저도 모르게 설렘을 느낀 순간, 다현은 스스로가 미친 줄 알았다.
언제 수갑을 찰지 모를 지금 설렘을 느끼다니. 하여 설렘이 싹 틀 때마다 싹둑싹둑 잘라내며 지내는데..
유복한 부모, 사람 좋은 남편과 착한 아이들 덕에 늘 인생은 아름다웠다. 꽤 실력 있는 플로리스트로 마음에 드는 행사만 골라 참석하고, 자원봉사 겸 무료 강연에도 응하며 충만하게 살던 어느 날, 금쪽같은 딸 계영이 실종됐다.
자신을 탓하는 안쓰러운 어린 아들. 딸을 찾겠다고 전국을 헤매다 아예 집을 나가버린 남편. 한순간에 금 가버린 인생 앞에서 미숙은 자신과 계훈의 상처를 들여다보지 않고, 아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한껏 웃는 얼굴로 계훈과 단둘이 밥을 먹고 한껏 웃는 얼굴로 단둘이 어린이날을 보내고, 한껏 웃는 얼굴로 (쌍둥이 딸의 생일이기도 한 그날) 계훈의 생일을 축하하고... 내 삶은 괜찮아. 내 삶은 남들처럼 쉽게 망가지지 않아.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까. 금 간 마음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와장창 깨져버리며 어느 날 툭 뭔가가 끊어진 것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십 년 치 상처를 한꺼번에 뿜어내듯 미숙은 돌변했다. 독설, 히스테리, 피해망상 등 온갖 신경증이 생겼으며 기분이 너무 좋았다가 너무 나빴다가, 예측불가에 금방이라도 깨질 것만 같은 유리 신경이 되었다.
미숙의 하루 일과는, 오래된 홈비디오 보고 또 보기. 계영 실종 전 찍었던 비디오며 사진에 파묻혀 과거 속에서 시체처럼 살고 있다. 아들 계훈을 목숨처럼 사랑하면서도 번번이 계훈의 가슴을 쑤셔 판다.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하지만 늘 맛이 부족하다. 맛에 둔감한 단골들 덕에 가늘고 길게 장사하는 중. 내 팔자만큼 더러운 게 없지. 딸 다현만은 나 같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여느 엄마 같은 실수를 하고 또 한다. 나처럼 살지 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내 인생은 니 인생이고 니 인생은 내 인생이야...를 입에 달고 산다.
잘난 거 없는 인생의 유일한 자랑이 좋은 대학 나와 좋은 회사 다니는 딸 다현이었는데, 다현이 회사에서도 잘리고 쓰레기 같은 스토커를 만나 살인자가 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돌 거 같고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다. 딸 팔자 엄마 팔자 닮는다더니 정말인가? 날 닮아 이런 건가? 다현이 꼭 내 인생을 따라오는 거 같아 두렵다.
지화동으로 발령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찰이 된 데는 어떤 특별한 이유나 사명감 따윈 없었다. 그저 여러 공시 중에 경찰공무원 시험이 가장 유리해서 준비했고 붙었을 뿐. 만약 지화지구대로 올 줄 알았다면 아마 경찰고시 따윈 치지 않았을 것이다. 원탁은 꼭 물에 빠진 것만 같다. 부유하던 해초가 그의 발목을 감아버린 느낌. 지화동은 그에게 그렇게 어두운 기억이기에.
그렇게 무겁고 복잡한 심정으로 첫 출근을 하던 날, 여차하면 관둬버리려던 날. 구여친 민조와 뜻밖의 재회를 한다. 바로 지화동 지구대에서, 멘토와 멘티로. 한때 뜨겁게 연애했고, 서로 사랑한다 믿었던 민조와 예기치 못한 재회는 원탁을 지화동에 주저앉게 만든다.
작은 순찰차 운전석, 조수석에 민조와 나란히 앉아 하루 종일 순찰을 돌아보면 예전 기억이 떠오르며 묘한 긴장이 흐르곤 한다. 우리 서로 한 몸처럼 붙어있었는데. 그렇게 영원할 줄 알았었는데. 어쩌다 헤어졌던 걸까. 도무지 그 이유가 기억나지 않은 채.. 나는 니 사수일 뿐이다, 존대해라, 맞먹는 눈깔 치워라, 민조의 구박을 나름 즐기며 그럭저럭 신임 순경 임무를 수행하다 문득 깨닫는다.
어떻게 이 동네는 이렇게 예전 그대로이지? 붙박이처럼 뿌리박고 사는 어른들은 그렇다 쳐도.. 왜 당신은.. 아직도 여기에 남아있는 걸까?
첫 발령 받은 신임 순경 멘토를 해야 한단 얘길 들었을 때부터 짜증이 났다. 귀찮은 신임 교육 따위 맡고 싶지 않았고. 더구나 그 신임이 구남친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평범하고 단순하며 흔들림 없던 민조의 일상에 균열이 생겼다. 원탁을 보자마자 몇 초쯤, 너무 어이없어 넋이 나갔던 민조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일말의 흔들림도 없던 척 사무적으로 인사하고 사무적으로 교육하고 사무적으로 원탁을 대한다고 자평한다. 단, 여럿이 함께 있을 때 그리고 넓은 실내나 야외에서만.
신고가 없어 출동도 없이 단둘이 순찰차에 있기라도 하면, 몸 뒤척이다 어쩌다 스치기라도 하면, 예전 뜨거웠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렇다고 원탁과 다시 어쩔 생각은 없다. 그냥 뭐.. 연애가 필요한가 봐. 단, 네가 아닌 다른 남자와.
돌이켜보면 원탁이 싫어서 헤어진 것도 감정이 전소돼 끝난 것도 아니었다. 기억 속의 원탁은 참 예쁘다. 악기를 꽤 잘 다뤄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고, 민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대형견처럼 말도 참 잘 듣던 남자였다. 동시에, 기억 속의 원탁은 아주 조금 두렵다. 간혹 이상한 잠꼬대를 내뱉었고, 내가 모르는 어둠을 품었으며, 그 때문인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아주아주 가끔 폭력성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뭐 어찌 됐든 다 옛날 일.
경찰로서, 일에 대한 욕망이 크다. 지구대보다 더 큰 물에서 놀고 싶다. 계속 현장에서 일하는 것. 좀 더 실질적인 수사 업무를 맡는 것. 그래서인지 늘 사건사고를, 내 능력을 발휘하고 증명해낼 일을 기다렸다. 바람대로 평온하고 심심하던 지화동이 사건사고로 시끄러워지자 비로소 민조는 평온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계영 실종 당시 지화지구대 순경이었다. 그 후 근방 경찰서, 지구대를 돌다가 다시 지화지구대 발령 받고 돌아온 지 1년째. 꼰대 소리를 질색해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민조, 원탁 등 젊은 후배들과 잘 지내려 애쓴다. 윗사람인 서대장과도 웬만하면 잘 지내려는 평화주의자.
스스로 성격 좋고 열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꼰대. 스스로 그릇이 큰 존경 받아 마땅한 어른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밴댕이 소갈딱지. 한 번 믿은 건 끝까지 믿는다. 그걸 의리나 지조,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신념일 수 있단 걸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실수할 수 있단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과거 범인을 잡으려 고군분투하던 자신에게 감사는커녕 뻣뻣하게 구는 계훈이 얄미워 사사건건 트집 잡으려 든다.
계훈이 지화동에 새로운 레스토랑을 오픈할 때 함께 왔다. 망할 게 뻔한 식당에 날 데리고 가다니, 이 형 나한테 왜 이래? 쉬지 않고 구시렁대지만 어디까지나 말뿐, 계훈과 친형제 이상으로 끈끈하다.
은솊이랑 언제부터 알았어요? 어디서 만났어요? 어떻게 친해졌어요? 철벽 그 자체인 계훈이 곁에 두는 유일한 사람이니 진후에게 쏟아지는 질문이 이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지겨운 반복질문에 진후는 언제나 짧게 대답한다. "어릴 적, 경찰서." 경악할 답을 주고는 특유의 수다스럽고 장난스러운 언변으로 정신을 쏙 빼놓곤 어떻게 친해졌는지에 대한 대답은 은근 피한다.
우리가 친한 건 외로움이 닮았기 때문 아닐까. 이렇게 말해봤자 알아듣는 사람 없을 테니, 사람들이 기대하는 농담과 장난으로 넘긴다.
수다스럽게 계훈 옆을 지키는 지화양식당의 분위기 메이커. 세상 귀엽고 순진해 보이지만, 어릴 적 경찰서 들락날락한 경험치는 어디로 안 갔다. 계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거칠던 옛날 차진후가 툭 튀어나올지 모른다.
계훈의 가게 앞에 (계훈이 가게를 차리기 전부터) 뻑하면 노상방뇨를 하곤 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젊은 시절 프로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재능 있는 음악가였다. 꿈이 좌절된 후, 피아노학원을 운영. 꽤 인기 있고 좋은 선생님이었으나 또 한 차례 인생의 풍파를 겪으며 인생이 망가졌다. 계훈이 지화동으로 돌아오자 툭하면 계훈 주변을 알짱거린다.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도 아 소리 한 번 안 하는 곰 같은 남자. 말수 없고 무뚝뚝하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지방을 돌며 빌라를 짓고 있는데 미분양에 공사대금 미지급에 영 벌이가 시원찮다. 오늘 때려치워야 하나 내일 때려치워야 하나 고민이다. 평생을 거친 현장에서 살다시피 해 몸집도 크고 힘도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