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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8-06-11 20:58:42

마이클 잭슨/Bad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마이클 잭슨
가십의 절정, 성공적인 80년대의 마무리

대중들이 생각하는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천재적인 아티스트 혹은 이상한 사람, 그리고 이상한 사람 이야기는 1986년 절정에 달하며 마이클 잭슨을 음악적 이미지에서 밀어내고 가십의 연예인 이미지를 부여했다. 당장 어느 매거진을 가봐도 'Thriller' 시기 까지는 음악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Bad' 앨범의 시작인 80년대 후반부터는 가십이 80%고 음악 이야기는 거의 하질 않는다.1987년 '타임지'는 마이클 잭슨의 가십 이미지가 음악을 가려버렸다고 썼다. 또 1986년부터 피부색이 하얘지기 시작했고 1987년 발매된 'Bad' 앨범 커버에서 마이클은 마치 백인처럼 달라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또한 당연히 세간의 화젯거리였다.
마이클 잭슨은 엔터테인먼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반발에 직면해 있으며, 많은 공격의 대부분은 갑작스러운 그의 탁월한 성공을 불쾌하게 여긴 백인 록 음악 비평가들에게서 나왔는데 마이클은 백인 록 음악 평론가들의 우상 모델에 적합하지 않았다. 기타연주와 문학적인 비평 대상이 될 수 있는 노래를 작곡하고 춤출 수 있는 백인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선호한다. 그러나 마이클은 흑인의 전통적인 문화를 대표한다. 이런 전통은 백인 록 음악 비평가들이 알 수 있을 리 없고 이미 세상을 뜬 구세대 사람들에게나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ㅡSPIN 매거진 1987년.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가십적 이미지를 가지게 됐을까? 마이클이 1984년 펩시 광고를 찍는 도중 화상을 입고 화상 치료 센터에서 치료를 받을 무렵, 마이클은 산소로 가득 차 있는 챔버를 보게 된다. 마이클과 동행한 의사는 아직은 이론적인 이야기지만 훗날 기술이 발전되어서 챔버 안에서 자면 노화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그 이야기에 호기심을 가진 마이클은 챔버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요청,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아래가 그 당시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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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사진이 타블로이드로 유출되면서 마이클은 늙고 싶지 않아서 매일 산소방에서 잔다는 루머가 돌게 된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마이클이 죽은 사람의 시체를 샀다는[1] 소문까지 돌게 된다. 심지어는 평소 동물에 관심이 많던 마이클이 애완동물로 키우기 위해 침팬지[2]를 구매한 것도 언론들에게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결국 1986년 마이클에게는 Wacko Jacko (괴짜 잭슨) 라는 별명이 탄생했고 이 시기 타블로이드지 <피플>은 팝계 간단퀴즈라며 마이클 잭슨은 이상한 건가? 아닌 건가? 라는 특집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다.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매니저 딜레오를 찾아가 이 일을 당장 그만 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졌지만 정작 마이클은 즐기고 있었다고 (..) 캐서린 잭슨은 '내 아들 마이클 잭슨'을 집필했었는데 당시 아들 이름이 가십에만 올라와 있어 속상했다고 한다.

70년대 중반 잭슨 5 시절 마이클이 성전환을 받고 결혼할 거라는 황당한 보도가 있고 나서 마이클의 소녀팬이 그 기사를 보고 마이클에게 울음을 터뜨렸다는 일화도 있었는데 스릴러 앨범의 대성공과 'Victory Tour'의 표 판매 이후 타블로이드의 거짓 보도[3]가 심하자 1984년 9월 공개적으로 마이클 측은 루머에 반박 성명을 낸 적도 있었다. 그리고 비틀즈 카탈로그 구매 이후에도 아주 심했다고 ... 즉, 항상 심했던 가십이 86년을 기점으로 그 성격과 양상에서 몇 단계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마이클 잭슨은 1982년 발매한 'Thriller' 이후 몇 년간 솔로 정규앨범을 발매하지 않고 있기에 Epic 레코드는 물론 팬들도 눈이 빼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이클은 새 앨범 Bad를 위해 60곡을 준비하고 30곡을 녹음하여 트리플 앨범으로 발매하기를 원했지만 퀸시는 상업적 이유나 시간 부족 등의 이유로 10곡을 수록한 1LP&1CD를 제안했고 결국 1LP&1CD로 가게됐다. 이 앨범은 마이클이 가장 많은 곡을 혼자서 만들었는데 11곡 중 9곡을 단독으로 작사/작곡했다. 당시 마이클은 퀸시 존스의 영향력에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도하고 있었기에[4] 자신이 앨범의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다.[5]

앨범은 1987년 8월 31일 발매됐고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6주간 1위를 차지했으며 미국에서는 900만장, 세계적으로는 3200만장 이상 판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영국에서는 390만장이나 팔려 아직까지도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Top 10위 안에 들어가 있다. 마이클 은 'Off the wall'의 기록을 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Thriller'가 깼으니 'Bad'도 스릴러를 깨는 것이 가능하다며 그것을 위해 모든 수록곡이 히트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또, 빨간 마커를 들고 항상 화장실에 갈 때는 100,000,000장을 썼는데 이건 배드 1억장 팔아서 당시 기준으로 4000만장 이상 팔린 스릴러를 찍어 누르기 위해서 였다고! 퀸시는 모든 곡이 히트곡이어야 해서 미칠 지경이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Bad 앨범은 스릴러의 기록을 넘어서지 못 했다. 'Bad'가 세운 기록도 팝 앨범들을 통틀어봐도 거의 없는 대성공이지만 마이클 잭슨에게는 상당한 실망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월터 예트니코프는 마이클 잭슨이 상당히 경쟁 욕구가 강했다고 하며 "마이클은 자신이 발매한 게 1위를 못 하면 전화를 해서 어떡해요 월터 제가 작업한 게 1위를 못 했어요" 라고 하소연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렇지만 이 앨범에서는 무려 5곡이 빌보드 1위에 올랐는데 한 개의 앨범에서 5곡이 빌보드 1위를 차지한 것은 마이클이 최초로 세운 대기록으로 80년대만 9곡의 빌보드 1위곡을 보유하게 됐고 이는 1980년대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가장 많은 1위를 차지한 아티스트였다.

그렇다면 평단에서는 어떤가? 일반적으로 잘 만든 최고의 기술들이 동원된 앨범이라며 긍정적 칭찬을 받았다. 뉴욕타임즈는 스릴러를 보여준 남자가 뭘 보여줄 까 하는 의문을 던지며 수수께끼의 팝 스타가 만든 잘 만들어진 인기 얻기 좋은 댄스 레코드라고 평가했고 LA타임즈는 스릴러의 다음 작품으로서 존경받을 만한 걸작이라고 USA투데이는 스릴러 이후 최고의 댄스 패키지라고 썼다. 롤링 스톤은 몇몇 곡은 스릴러보다 더 섹시하고 풍부하다고 했으며 Robert Christgau는 수년 동안 본 가장 강력하고 일관성 있는 Black Pop 앨범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앨범은 지난 시간 동안 논란이 된 자신을 이야기 하지 않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로 가득찬 곡들로 가수는 노래 뒤에 숨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비판을 받았다. 또 몇몇 곡은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는 데 특히 스티비 원더와 듀엣으로 부른 'Just Good Friends' 곡이 꼽힌다.

2012년 Bad 25주년 기념으로 스파이크 리가 Bad 앨범 제작 시절 일화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는 데 마이클 잭슨 갤러리에 자막이 있는 동영상이 있으니 보고 싶으면 이것을 클릭하면 된다.

Bad 앨범 발매 후 곧바로 마이클은 자신의 첫 솔로 투어인 'Bad Tour'를 시작한다. 일본을 처음으로 시작된 Bad Tour는 총 123회 공연, 440만 명의 관중들을 불러 모으며 80년대 가장 높은 수입을 거둔 투어 2위, 솔로가수의 투어로는 1위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특히, 영국웸블리 스타디움에선 7회 연속 매진이라는 신기록[6]을 세웠고 공연 도중 마이클의 공연에 열광한 나머지 기절하는 사람과 부상자가 속출했는 데 Bad 투어 이전에 역시 영국도 마이클의 가십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Bad 투어의 성공적인 마침으로 영국에서는 마이클의 음악 이야기가 다시 주를 이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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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은 너무 독특해지려다 다소 기괴하게 됐지만 잭슨에 대한 기업들의 사랑은 계속된다. 잭슨은 늙지도 젊지도 흑인도 백인도 여자도 남자도 아니다. 잭슨은 완벽한 마케팅 로고가 되기 위해 완벽함을 추구한다."
ㅡLA타임즈 브리짓 바이른.
1988년 그래미 시상식이 열린다. 마이클은 당연히 'Bad'가 좋은 성공을 거뒀기에 상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상식에 참여했지만 단 한 개의 상도 얻지 못 하는 이변을 겪는다. 당시 시상식 중계를 보면 마이클의 표정이 시종일관 언짢았던 모습이었다.1988년 그래미 시상식 주위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마이클은 그래미 시상식이 끝난 후 집에 돌아와 펑펑 울었다고 한다. 마이클이 상을 하나도 못 받은 이유는 당시 마이클의 지인이 한 말에서 잘 나타난다. "그래미가 산소 체임버 안에서 자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어요?" 또, 당시 경쟁 아티스트들과 작품들이 어마어마 했는 데 휘트니 휴스턴은 물론 대중음악 역사에 남을 걸작인 U2의 'The Joshua Tree'와 프린스의 'Sign o' the Times'가 경쟁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1987-1988년은 아티스트들의 경쟁이 아주 치열할 때로 싱글 차트의 경우 1위 자리를 2주 이상 유지하는 게 매우 어려울 정도로 명곡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분명히 1980년대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 할 기록을 세웠고,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인데도 'Wacko Jacko' 논란으로 '기괴함. 즉 잭슨 미친 거 아니야?'라는 이미지를 갖게 돼 음악적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1988년 LA타임즈는 Wacko 이미지가 마이클의 재능을 가려버릴 위험에 처해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음악잡지 <롤링 스톤>에서 1988년 실시한 가장 최악의 컴백 가수는 물론 최악이란 수식어가 붙는 조사마다 독자들은 1위에다 마이클을 뽑았을 정도, 논란이 많았지만 인기도 높아 영국 갤럽에서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영국 왕실을 제치고 영국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 시기 마이클은 괴짜라는 이미지를 가지기도 했고, 극성 안티팬들도 꽤 있었지만 그 어떤 가수도 넘볼 수 없는 폭발적인 상업성과 대중성도 소유하고 있었다. '캐서린 잭슨'은 이맘때쯤 마이클이 어땠는 지 회고한 부분에서 마이클이 어느 마을을 갔다고 하면 그 마을 언론사는 하루종일 마이클을 취재하기 위해 극성이었다고 한다. 물론 일반인들도 마이클 얼굴 좀 보려고 엄청나게 몰렸다고 한다. 80년대를 마무리 하며 1990년 마이클은 41%의 로열티를 받았는데 당시 스타들의 평균 로열티인 12%보다 훨 높았다.

마이클의 친한 친구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89년 시상식에서 마이클을 'King of pop rock soul'이라 칭했다. 이것이 마이클 잭슨의 별명이 'King Of Pop'이 된 계기라는 게 지난간의 말들이었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다. 'King Of Pop'이라는 칭호는 테일러 이전에도 이미 몇몇 언론에서 마이클을 칭하는 데 사용했던 별명이었다. 근데 이것이 유명 스타에게 관례적으로 붙여주냐 아니면 엘비스 프레슬리의 'King of Rock And Roll' 처럼 독자적인 것이냐는 거다. 전자의 경우 휘트니 휴스턴 사망 때 한 언론에서 'Queen of Pop is Dead'라고 칭한 것이나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이 사망했을 때 언론에서 'Prince of Pop is Dead'라고 한 것처럼 혹은 국내 언론이 오아시스 같은 밴드에게 브릿팝의 황제다라고 해주는 것처럼 유명인들에게는 관례적으로 써주는 호칭인 것에서 벗어나 언제부터 'King of Pop'이 마이클 잭슨만의 고유한 명칭이 된 것이냐는 의문이다. 마이클의 변호사 존 브랑카는 마이클이 'The Glove One (한 개의 장갑)'이라는 별명이 언론에 많이 쓰였었고 마이클은 자신이 그렇게 대접받는 것에 화를 냈다고 한다. 가령 프랭크 시나트라는 리더로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보스로 불리며 엘비스는 왕으로 불리는 데 스릴러로 큰 성공을 거둔 나는 무엇이냐는 거다. 에픽 레코드 임원인 Larry Stessel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은 'Boss','King'과 같은 별명 즉, 자신이 'King Of Pop'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를 원했었고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그의 홍보 담당자 Bob Jones를 이용해 'King Of Pop'이라는 보도자료를 배포했었다고 한다. 'MTV'의 역사를 설명하는 MTV : Uncensored Story of the Music Video Revolution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은 1991년 초 자신이 King Of Pop으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MTV에게 요청했고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를 방영할 때 모든 방송사에서 그렇게 불리길 원했으며 MTV는 자신들의 회사에 마이클 잭슨이 끼친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고 그가 팝 최고의 슈퍼스타임이 분명하기에 일주일에 2번 이상 'King Of Pop'으로 말하기를 지시했다고 했다. 추가적으로 대만의 프로모터는 Dangerous Tour 를 회고하며 마이클이 'King Of Pop'을 투어 판촉 포스터에 꼭 포함시키길 원했다고 했으니 종합하자면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King'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생각했고 그 바람을 언론이 인정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해외의 마이클 안티들은 이걸 비꼬아 'Self-King Of Pop'이라고 비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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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은 마이클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세기의 아티스트 상' 을 수여한다. 마이클 잭슨은 음악인이 누릴 수 있는 온갖 영예란 영예는 다 누렸으며 대통령들은 마이클 잭슨과 만나길 바랐다. 그는 피부색을 초월한 슈퍼스타 였기 때문이다.

Bad를 이름으로 한 모든 캠페인이 마무리 되고 마이클은 더이상 퀸시 존스와 함께 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마이클이 퀸시와 더이상 일하기를 원하지 않은 이유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편견 때문이었는 데 앞에서 인용문으로 쓴 1987년 스핀 매거진의 보도에는 사람들은 마이클이 몇 곡을 작곡했지만 뛰어난 작곡가는 아니라며 무시해 버리고 모든 성공을 퀸시의 공으로 돌려버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을 의식해서 인지 Bad 앨범 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퀸시 존스의 사단인 A팀과는 작업하지 않고 자신의 B팀과 1985년 하반기에서 1986년까지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Dirty Diana, Smooth Criminal 등을 독자적으로 만들었으며 사운드에서도 퀸시와 의견 차이가 있었고 Larry Williams 도 확실한 마찰이 있었다고 동의했으며 Michael Boddicker도 마이클은 자신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었다고 말했다. 퀸시는 한편 마이클을 힙합- 열풍에 맞춰 음악을 그렇게 움직이기 위해 힙합 그룹 Run DMC와 미팅을 열고 Bad 앨범에다 힙합 트랙 Crack Kills[7]를 넣으려고 했는 데 모종의 이유로 결렬됐다. 퀸시는 2010년 가디언과 인터뷰하길 마이클은 퀸시는 사업을 몰라, 랩은 죽었어라고 말했다고, 또 Smooth Criminal 곡을 앨범에 포함시키길 퀸시가 싫어하여 불만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이클이 퀸시를 싫어했던 건 아니다. 그는 많은 시상식들에서 퀸시에 대한 경의를 표했으며 퀸시의 딸과 화보 촬영도 했었고 하지만 마이클이 원했던 것은 완전한 제작의 자유 그리고 성공이 퀸시 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퀸시와 마이클의 결별에 대해 루머가 퍼졌는 데 마이클이 돈이 없으니 퀸시를 짜르자고 한 걸 우연히 퀸시가 듣고 불같이 화를 내며 마이클은 퀸시에게 다시 작업해달라고 용서를 빌었다는 스토리로 출처는 1990년 동아일보의 유명 팝 칼럼니스트가 쓴 이야기인데 당시까지만 해도 컴퓨터가 없어 팝 음악 정보는 오로지 잡지나 팝 칼럼니스트들에 의지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폐쇄적인 국내의 배경 때문인지 진실로 받아들여져 우리나라의 팝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책들에는 저 설명이 대부분 들어가 있다. 어느 해외 기사에서 나온 소스인 지 알아보기 위해 추적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고 퀸시와 마이클의 결별을 설명하는 해외 매체 그 어디에도 저런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하는 대표적인 마이클의 루머(..)


[1] 정확하게는 엘리펀트 맨의 뼈이다. 엘리펀트 맨은 심한 기형에 의해 서커스 구경거리가 되어 버린 19세기의 영국인이다. 물론 마이클이 이것을 샀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루머이다.[2] 약물 실험용 침팬지였으며, 이름은 '버블스'이다[3] 특히 특유의 목소리, 성형, 섹스할 것 같지 않은 무성애 이미지에 집중하며[4] 마이클은 1984년 그래미 시상식 때 퀸시가 한 개의 상도 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CBS의 사장 월터 예트니코프에게 말했었다.[5] 다른 사람들은 결코 하지 못했던 퀸시 존스의 테이프에서 마음대로 가져가 수정하는 행동을 마이클이 했었다고 한다.[6] 이 기록은 후에 영국의 테이크 댓이 웸블리 8회 연속 매진에 성공하며 갱신된다.[7] 사비에서 'Demerol' 부분이 Morphine과 흡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