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아파트 | |
완공 직후의 항공사진. 1964년 이전 사진이다. | |
2차 완공 이후의 항공사진. | |
<colbgcolor=#f5f5f5,#191919> 명칭 | 마포아파트 |
위치 | 서울특별시 마포구 도화동 550[1] |
착공 | 1961년 10월 16일 |
완공 | 1962년 12월 1일(1차 완공) |
1964년 11월 30일(2차 완공) | |
철거 | 1991년 3월 28일 |
층수 | 지상 6층 |
세대 수 | 10개동 642가구 |
높이 | 불명 |
시행사 | |
시공사 | 현대건설 外 다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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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정희 정부가 성립된 후 '생활 혁명' 을 일으킨다고 정권에서 발표하였고, 그 후 대한민국 최초 아파트 단지로 공사되었다.[3]마포아파트보다 8개월 먼저 건설된 부산의 문화, 좌천, 수성, 수정 아파트의 경우도 여러개의 동으로 이루어지기는 했고 이쪽은 현존하고 있으나 전체적인 구성은 종암아파트에 더 가까운 형태였기 때문에 현대적인 아파트 단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형태로 대한민국 최초 아파트단지로 인정되지는 않았다.[4]
마포아파트를 설계한 건축가는 정확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느나 건설 책임자 엄덕문과 대한주택공사의 전신인 대한주택영단(이하 '주택영단') 소속 강명구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을 설계한 건축가로 잘 알려진 엄덕문은 주택영단에서 발행했던 <주택>지에 창간호부터 주거단지 계획이론 등에 관한 글을 실었다. 강명구는 주택영단 소속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1961) 건축부에 마포아파트를 출품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한국에서 처음 시도되는 단지형 고층 아파트였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을 포함한 다수의 건축가가 아파트 설계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도면으로 확인된 설계자들은 김희춘, 김종식, 나상진 건축가 등이 있다. #
이 아파트의 준공식에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축사를 통해 '혁명 한국의 상징이 되기를 바란다' 고 밝힌 바 있다. 원래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희의 의장이 직접 참석할 계획이었으나, 주공이 초청한 USOM 측에서 대표 대신 낫조(Guido Nadzo)의 행사 참석을 결정하는 바람에 김현철 내각수반이 대독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
한국인의 초상(12) 주거문화 바꾼 아파트 대명사(1995.05.26 동아일보) 이 기사에서 마포아파트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2. 건설 과정에서 변경된 점
원래는 한국 아파트 최초로 엘리베이터와 중앙난방 시스템을 적용할 예정이었고, 층수도 10층 규모로 건설될 예정이었다. #1 #2[5] 그러나 한 건축물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지원을 몰아준다는 당시 여론의 반발에다가, 당시 건축 기술로는 연약한 지반에 고층아파트를 짓기에는 위험부담이 있다는 건축 전문가들의 문제 제기가 있었다.[6] 결정타로 원조에 크게 의존하던 당시 한국 정부의 여러 정책에 공식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던 한미경제협력위원회(USOM)의 반대가 있었다. USOM에서는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과 기술적 수준을 이유로 반대했다. USOM 주택국장인 귀도 낫조는 “국민소득 100달러도 안 되는 한국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10층짜리 아파트 단지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자금 원조를 거부했다. 장동운 대한주택영단 이사장은 "아파트 수명이 50년이 넘는데 50년 후에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이 100달러밖에 안 되겠느냐"면서 시범적으로 아파트를 짓는 것이니 자금 원조를 압박했지만, 미국의 협조를 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마포아파트는 결국 한국 정부의 자금으로 건설되는데, 1963년 정부 전체 예산이 768억 원이었으니 마포아파트 건립에 소요된 5억 원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결국 예산 부담으로 인해 10층 규모에서 6층 규모로 층수 감소, 엘리베이터 미설치[7], 중앙난방 형식에서 연탄 보일러 개별난방으로 대폭 축소되었다.[8] 물론 이 정도만 해도 1962년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획기적이었다. 1960년대 당시만 해도 많이 남아 있던 기와집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는 온돌식 난방이 대다수였고, 1980년대 초중반까지 분양된 주공아파트만 해도 대개 5층 규모에 연탄온돌식 보일러가 기본이었다. 여담으로 1980년대 초중반까지 분양된 연탄온돌식 난방을 채택한 주공아파트들은 올라가기 앞서 1층에 연탄가스 배출기 작동표시등(좌측 세대는 좌세대분으로 표기, 우측 세대는 우세대분으로 표기.)이 있었다. 또한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설치되었는데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된 아파트는 아니고 비록 공용이었다고는 하지만[9]대부분의 일반가정에서는 재래식 화장실이 대세였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이것도 충분히 혁신적이기는 했다. 일부 세대의 경우는 공용화장실이 아닌 지금의 아파트처럼 세대별로 욕실을 겸하는 화장실이 도입되었는데#, 변기도 양변기 형태였다.[10]동 형태와 배치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원래 마포아파트의 동 형태는 일자형, T자형, Y자형 3가지를 계획했으나 T자형 동은 지어지지 못했다. T자형 동 도면 1 T자형 동 도면 2 일자형 동도 10층 설계 당시에는 복도식 구조였지만, 6층으로 변경 후에는 계단식 구조로 건축되었다. 일자형 동 도면 10층 설계 당시 동 배치도 화보들을 통해 지금까지도 확인 가능하다. 초기 동 배치
3. 역사
1991년 당시 철거 모습 | 야경 |
단지 내부 전경 |
3.1. 건설 과정
1962년 주거동 A, B형 6개동(Y자형) 450가구, 1964년 주거동 6층 4개동(일자형)이 완공되었다.연면적 6,316평, 총 사업비는 3억 5600만 원이었다. 이 중 정부 지원금과 주공 자금이 2억 7800만 원이었고 입주자 부담금은 7800만 원이었다. 공적 자금으로 건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3.2. 연탄가스 누출 괴담
연탄보일러에서 연탄 가스가 누출된다는 괴담이 퍼지기도 하였다. 애초에 부유층들 대상으로 지은 아파트였던지라 월세비가 일반 서울시민 월급의 반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비쌌는데 입주대상이 된 부유층들이 연탄가스 누출 소문때문에 입주를 하기 꺼렸으니 마포아파트의 초기입주율이 겨우 10% 남짓한 수준이었고 수도관이 동파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주공 측은 모르모트 동물 실험을 하여 안전성을 검증하였으나 인정받지 못하여 결국 현장 소장이 연탄가스가 샌다는 방에서 하루를 묵고 나오기도 하였다. 그 뒤 입주율이 높아졌다고 한다.3.3. 임대아파트에서 분양아파트로 전환
마포아파트는 1964년 준공 당시에는 모두 임대주택이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급격한 도시화와 인구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먼저 시도된 정부 주도의 집합주택은 모두 임대주택이었다. 공공 주택을 통한 시장 안정과 도시의 공공성 담보를 위해 건설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부가 주택을 관리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들을 참고한 마포아파트도 임대주택으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1967년 자금난을 겪던 대한주택공사는 마포주공아파트를 분양하기로 결정한다.[11] 임대로 들어온 입주자들은 갑자기 분양을 받아야 해 큰 경제적 부담을 느꼈다. 6개 동의 주민들이 뭉쳐서 국회와 주택공사 등에 분양가가 너무 높으니, 분양가를 여러 차례에 나눠서 내게 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12]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포아파트 이후에도 정부 주도의 분양아파트들이 계속 공급되면서 한국의 아파트 공급 방식은 분양 위주로 고착되었다.3.4. 철거
마포아파트는 건축된지 29년 가량이나 지나면서 노후화가 진행되었고, 세대당 면적이 9,10,16평으로 좁다보니 1990년대의 생활상에 맞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파트 자체가 입지는 좋은 데다가 6층에 불과한 저층, 넓은 동간 간격으로 인한 대지지분이 많았고, 건폐율과 용적률도 각각 11%, 67%에 불과해 재건축시 수익성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1987년부터 재건축이 추진되어 1988년에 재건축이 확정되어 1991년 3월 28일부터 1992년 2월까지 기존 마포아파트를 철거한 후[13], 현재 이 자리에는 삼성건설이 1994년 7월[14], 한국 역사상 최초의 재건축 아파트인 마포삼성아파트(14개동 982가구)가 준공되어 현재까지 있다. 최초의 아파트 단지였던 만큼 첫 재건축 사업으로 지어진 아파트인 셈.[15] 재건축된 마포삼성아파트에도 과거 마포아파트 원주민들이 생각보다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주민의 증언이 있다.[16] 일부에서는 마포 아파트가 '역사적 가치' 가 있다며 마포아파트 철거 및 삼성아파트 준공은 일방적이며, 현재까지 남아있었다고 해도 입지가 좋은 데다가[17] 아파트 건물 디자인이 수려했기 때문에 흉물까지는 되지 않았을거라는 주장이 있다.[18] 하지만 좁은 세대 당 면적, 엘리베이터 부재, 공동화장실 등 현재 시점 기준으로 열악한 구조로 인해 철거하지 않았다면 흉물, 혹은 슬럼으로 전락했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만약 초기 구상대로 그대로 지어졌다면, 장동운 대한주택영단 이사의 말대로 50년 넘는 수명을 채웠을지도 모르는 일이다.4. 여담
- 1970년대부터 영화촬영의 단골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부자 동네라는 인식이 강하여 그랬을 듯.
- 1984년에 방영되었던 베스트셀러극장 '고깔'의 촬영장소로 쓰였다.
- 주공에서는 “기본개념은 근대 서구의 집합주택 계획에서 목표로 삼았던 르 코르뷔지에의 녹지 위의 고층주거(Tower in the park) 개념을 그대로 도입한 것으로 후일 대한민국 주거지의 단지식 개발을 견인한 선도적인 사례로서 평가되고 있으며 중산층을 위한 주택공급 정책의 산물로서 기록되고 있다” 고 표현한 바가 있다.
- 국가기록원에 이 아파트의 완공 당시 내 외부 사진이 등록되어 있다. # #
- C형, D형 평면의 경우 현대에도 서구권과 일본에서 쓰는 중복도식 실내구조였다.(평면도) 그 이후로도 한강맨션 등 몇몇 아파트에서 방이 모두 한쪽에 몰려있고 실내에 중복도가 형성되는 형태의 평면이 시도된 바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고 한국인 취향에 맞게 현지화된 구조[19]만이 살아남아 현대 대한민국 아파트 구조의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 196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국내 최초의 단지식 아파트이지만, 건물 디자인이나 디테일은 1970년대~198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주공아파트나 민영아파트[20] 보다도 더 뛰어나며 오늘날의 기준으로 봐도 크게 손색없을 정도이다. # # 특히 발코니의 끝 부분 가장자리, 계단 가장자리의 곡면 처리나, 옥상의 장식 조형, 현관 출입구의 조형은 지금 봐도 매우 참신하다. 그 외에도 동 마다 조각 작품이 있었고, 단지 안에 분수대도 있었으며 놀이터의 미끄럼틀이 코끼리 모양이라서 코끼리 아파트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 심지어 마포 아파트의 설계도의 경우 글씨의 서체 까지도 지금 시점으로 봐도 매우 세련된 느낌으로 표현되어 있다.#
- 개그맨 최양락이 거주했던 아파트라고 하며, 동료 개그맨 김한국이 2개월 정도 같이 살았다고 한다.
- 2024년 故 박철수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의 유작으로 이 아파트에 대한 도서인 「마포주공아파트」가 출간되었다. 본 문서에서도 故 박철수 교수의 X(구 트위터) 계정에 업로드된 관련 정보들을 참조하였다.
[1] 현재 도로명주소는 마포구 도화길 28[2] 건설산업, 남광토건, 신광건설, 신양사, 현대건설[3] 이전에도 종암아파트, 개명아파트 등이 건설되었으나, 아파트 단지가 아닌 단독 건물이었다.[4] 아파트가 건설되기 전에는 마포형무소(현 안양교도소)의 수감된 죄수들을 노역시키기 위한 연와공장이 자리잡았다고 한다. 관련 기사[5] 이러한 발상은 9년후인 1971년에 지어진 여의도 시범아파트에서 실현되었다.[6] 「한국인의 초상(12) 주거문화 바꾼 아파트 대명사」, 동아일보, 1995-05-26[7] 당대에는 엘리베이터는 백화점이나 호텔, 일부 관공서 및 고층건물에나 있는 고급 기계였다. 오늘날 아파트에도 엘리베이터가 보급되기 시작된것은 1970년대 중~후반 이후의 일이다. 계획 변경 이후에도 엘리베이터 설치 공간을 확보해 두었으나, 1991년 철거 전까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는 일은 없었다. (관련 기사) Y자형 동 도면 1 Y자형 동 도면 2[8] 「한국 아파트 단지 특징은 모두 이곳서 시작」, 한국아파트신문, 2024-04-22[9] 지금이라면 반발이 나올법도 하지만, 1970년대까지는 화장실을 방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구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냄새나는 재래식 화장실이 아직 많았던 시절이라 그랬다.) 단독주택이라 해도 화장실 이용하는 게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다가 이웃사촌이라면 어느정도 알고 지내는 것이 일반적인 시대라서 어느정도 신뢰하고 다녔기 때문에 굳이 반발할 거리가 없었다.[10] 당시 대한민국에서 양변기가 생산이 되지 않아서 전량 일본에서 수입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양변기가 생산된 것은 1960년대 후반 이후[11] 「우리는 여전히 ‘마포주공아파트’ 체제에 산다...정치권력이 낳은 아파트공화국」, 조선비즈, 2024-04-12[12] 「지극히 한국적인 ‘K-아파트’ 탄생기, ‘마포주공아파트’」, 경향신문, 2024-04-05[13] 「마포아파트 현대식 1호·재건축도 1호」, 경향신문, 1992-02-23[14] 네이버 부동산에는 1994년 7월이라고 정정해 놓았으나 업데이트 과정에서 입주 년,월을 여전히 1997년 5월이라고 잘못 기재해 놓았다. 역시 다음 부동산도 정정하지 않았다.[15] 공교롭게도 삼성건설(현 삼성물산)의 박기석 당시 회장과 인연이 있었으며, 1962년 당시 주택공사 총재로 있었을 당시 마포아파트를 건립하였다.(관련 기사) 그런데 재건축한 마포 삼성아파트도 2023년 기준 29년이나 되었다.[16] 「[한국아파트 60년]⑬ 1962년 준공 마포아파트, 입주 직후 ‘동물실험’한 사연은」, 조선비즈, 2022-03-18[17] 마포역과 공덕역이 도보 6분 거리에 있다. 게다가 여의도의 개발과 아현뉴타운 재개발로 입지는 건축 당시보다 더 상승했다.[18] 부산에만 해도 구도심 지역에 마포아파트 보다 먼저 지어진 아파트들(종암아파트와 비슷한 수준)이 아직도 년식대비 양호한 관리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도 동대문아파트, 정동아파트 같은 서울시내 소재의 동년배 아파트들이 대체로 관리상태가 양호하게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19]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거실과 부엌이 개방되어 있고 각 방이 둘러싸는 듯한 구조. 이게 바로 한옥의 안마당 영향을 받은 것이다.[20] 당시의 주공아파트의 경우는 서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기 위해서 외관 디자인에 원가 절감이 불가피하였고, 당시 민영 아파트들은 수익성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 당시 기준으로는 호화로운 내부 시설에 비하면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었던 외관 디자인에 크게 공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쪽은 한술 더 떠서 조경 조차도 신경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