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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15:30:47

맷 윌리엄스/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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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한민국과의 인연
2.1. 외할아버지 버트 그리피스의 친선전 방한2.2. 1985년 한미대학야구 교류전 방한2.3.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시절 김병현의 동료2.4.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이정후의 코치
3. 야구 관련
3.1. 선수 시절3.2. 지도자 시절
4. 가족 관련

1. 개요

맷 윌리엄스여담을 다루는 문서.

2. 대한민국과의 인연

2.1. 외할아버지 버트 그리피스의 친선전 방한

파일:버트 그리피스1.jpg 파일:버트 그리피스2.jpg
1922년 12월 5일, 매일신보 기사.

7일 오전 9시 50분 경성으로 입국 예정이며, 역사에 없던 야구 대전이 열릴 것이라는 내용.
1922년 12월 10일, 매일신보 기사.

전조선군이 23-3으로 패배했다는 소식과 1회부터 9회까지 경기 내용이 소개되었다. 아래 성적란을 보면, 2번 타자에 그리피스의 이름이 눈에 띈다.

맷 윌리엄스의 외할아버지 버트 그리피스는 브루클린 로빈스(現 LA 다저스)와 미네소타 트윈스의 전신이었던 워싱턴 세네터스에서 외야수로 활동했다.

그는 메이저리그 올스타 자격으로 방한하여 1922년 12월 8일에 만철구장(용산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운동장)[1]에서 전조선군과 맞붙는 친선전에 출전했다. 당시 메이저리그 올스타 멤버에는 케이시 스텡겔, 조지 켈리, 웨이트 호이트명예의 전당 멤버 3명을 주축으로, 메이저리거들이 방한하여 경기를 뛰었다. 여담으로, 당시 숙소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보유하고 있던 조선호텔(現 웨스틴조선호텔)을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1922년 12월 8일 동아일보 기사

사실, 원래 이 경기는 예정에 없던 경기였다. 메이저리그 올스타 감독이었던 헐버트 헌터의 계획은 일본-상하이에 주둔하는 미군-마닐라로 건너가서 마닐라 거주 미국인들과 친선전을 하는 3경기가 원래 계획이었으며, 1923년 초까지 진행 될 예정이었다. 이런 아시아 투어 일정을 알게 된 조선체육회 이원용 이사와 야구인 박석윤이 일본으로 가서 헐버트 헌터 감독과 협상을 했고, 잡음이 있었지만 어찌저찌하여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하여 여러 신문사의 후원을 받아 경성에서 한국야구사 최초의 한반도에서 개최한 외국 팀과 친선 경기를 열게 된 것이다.

아무튼 버트 그리피스는 주 포지션이 외야수인데도 이 경기에서는 2번 타자 2루수로 선발 출전하여 5타수 3안타(1홈런) 1볼넷 2도루의 맹활약을 보여줬다. 경기 결과는 당시 수준 차이를 생각하면 당연하게(?) 메이저리그 올스타가 전조선군을 23-3으로 크게 승리했다. 경기가 끝나고 전조선군 선수단은 메이저리그 올스타 일행[2]명월관[3]으로 초대하여 환영회를 즐겼다. 메이저리그 올스타는 환영회를 오후 10시 반에 마치고 다시 조선호텔로 돌아갔고, 다음 날 9일 오전 10시에 남대문정거장[4]에서 봉천행 급행열차에 탑승하여 베이징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버트 그리피스의 이 친선전 방한은 운명인지 외손자 맷 윌리엄스에게 인연이 이어졌다. 63년이 흘러 1985년에는 친선전을 위해 방한하게 됐고, 98년이 지난 2020년에는 대한민국의 프로야구단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취임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2020년 10월 1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인터뷰에서 윌리엄스는 외할아버지 버트 그리피스에 대해 기억을 하고 있었다. "당시 외할아버지께서 메이저리그 올스타 자격으로 경기를 치르러 한국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기자에게 "굉장히 많은 조사를 한 것 같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웃음과 함께 되물었다.

윌리엄스는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20년대 일이다. 당시 외할아버지는 워싱턴 세네터스에서 뛰고 있었다. 그들이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으로 뽑혀 어디서 투어를 하며 경기를 했다는데, 어디를 갔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매우 오래 전 외할아버지가 그 팀에서 뛰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고 밝혔다. 이런 대한민국과의 인연에 대해 "정말 그렇다. 대단히 신기하다. 참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2.2. 1985년 한미대학야구 교류전 방한

파일:한미대학야구 맷 윌리엄스1.jpg 파일:한미대학야구 맷 윌리엄스2.jpg
도루를 하다가 류중일에게 태그아웃 당하는 당시 사진 도루를 하다가 아웃 된 윌리엄스, 옆에서 서서 지켜보는 류중일

63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서 외할아버지 버트 그리피스가 그랬던 것처럼, 맷 윌리엄스도 1985년에 친선전을 참여하기 위해 방한한다.

맷 윌리엄스는 1985년 7월 10일부터 20일까지 미국 국가대표 자격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한미대학야구 교류전에 참가하였다.[5] 당시 7월 13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미대학야구 2차전에서 4회말에 솔로포를 기록하고, 도루 시도도 했으나 위의 동아일보 기사 사진과 같이 한양대 포수 김상국의 송구와, 유격수 류중일에게 저지당하기도 했다.[6]

맷 윌리엄스는 방한했을 당시 서울에서 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사이렌 소리를 뚫고 야구장으로 이동하던 순간을 인상깊게 여겼는데, “우리 팀이 이태원에 머물고 있었다. 경기장을 가기 위해 버스를 타야 하는데 사이렌이 울리더라”며 “이동을 못 한다고 해서 택시를 탔다. 다른 차들이 다 옆에 멈춰있어서 택시 기사에게 빨리 가 달라고 했다. 사실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잘 몰랐다”고 말했다.

미국 국가대표가 묵는 호텔 근처엔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호텔에 도착해서 내렸는데 군인들이 서있더라. 다들 기분이 좋지 않은 채 서 있었는데 나에게는 그게 가장 선명한 기억이다”라고 회상했다. 설명대로라면 당시 민방위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자들에게 설명을 들고 나서는 “우리는 그런 걸 전혀 몰랐다. 그 절차를 완전히 무시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2.3.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시절 김병현의 동료

파일:맷 윌리엄스와 김병현.jpg

한국인에게 맷 윌리엄스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역시 김병현의 디백스 시절이 가장 컸다. 2001년 NLCS에서 김병현은 무실점으로 든든하게 뒷문을 지켜주고 있었는데, 2001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유독 부진하며 시리즈를 극적인 상황으로 끌고가는 홈런을 여러 차례 맞았다.

4차전 9회말에 티노 마르티네스에게 동점 투런을 맞고, 10회말에는 11월 1일을 알리는 자정의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데릭 지터에게 끝내기 솔로 홈런을 맞으며 경기를 내주게 된다. 이어진 5차전에서도 세이브 상황에 또 등판했으나 스캇 브로셔스에게 동점 투런을 맞으며 이틀 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김병현은 마운드에서 주저 앉고 말았으며, 맷 윌리엄스를 비롯한 내야진이 마운드로 달려가 김병현을 위로해주는 장면이 중계화면에 잡히고, 사진으로도 남으면서 화제가 되었다.
2019년 10월 23일, 함평군 기아 챌린저스 필드 마무리캠프에서 만난 두 사람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2019년 10월 15일, 맷 윌리엄스가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김병현과의 인연이 화제가 되었다. 결국 둘은 마무리캠프에서 16년 만에 재회하여 이야기를 나눴고, 디백스 시절 지갑을 잃어버려서 맷 윌리엄스에게 500달러를 빌렸던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그 후 김병현은 2020 시즌 KIA 타이거즈의 스프링캠프 투수 인스트럭터로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개인 사정으로 인해 불발되었다.

2.4.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이정후의 코치

2024시즌을 앞두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3루 주루코치를 맡게 되며 이정후를 코칭하게 되었다.

3. 야구 관련

3.1. 선수 시절

3.2. 지도자 시절

3.2.1. 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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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와인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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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야구장 조깅

KBO 리그 입성 이후, 홈구장인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서는 외야 펜스 앞 워닝 트랙을 따라서 뛰지만 원정 경기에는 경기 시작 전인 오후 2시~3시 쯤에 구기환 통역코치와 원정구장 그라운드와 관중석 계단을 달리는 루틴을 가지고 있다. 건강 관리 겸 달리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한다. 매일 경기장에 가장 먼저 나와 운동하는 모습이 KIA 코칭스태프, 선수단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주는 효과를 무시할 수 없을 듯 하다.

창원 NC 파크가 오르기가 제일 편했다고 하고,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는 연식이 있고 가파른 각도 때문에 제일 힘들었다고 한다. 고척 스카이돔은 실내 구장이라 시원하긴 한데, 계단이 가파른 편이어서 힘들었다고 한다.

파일:맷 윌리엄스 대전구장.jpg
파일:맷 윌리엄스 문학구장.jpg
파일:맷 윌리엄스 수원구장.jpg
파일:맷 윌리엄스 고척돔.jpg
파일:맷 윌리엄스 사직구장.jpg

4. 가족 관련



[1] 당시에는 동대문야구장도 없던 시절이었다. 동대문야구장의 개장은 1925년이다.[2] 모두가 참석한 것은 아니고, 같이 온 가족 포함 일행과 함께 10여 명 정도가 참석했다고 한다.[3] 1909년, 조선 왕실의 마지막 대령숙수였던 안순환이 현대의 동아일보 사옥 근처에 세운 요정이다. 1918년에 화재로 한 차례 소실되었다가 종로구 돈의동(현재 피커디리 극장 자리)에 다시 세웠다. 경성부의 고위층 인사들이 단골이었으며 6.25 전쟁 때 파괴되었다.[4] 1922년 당시에는 명칭이 '서울역'이 아니라 '남대문정거장'이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23년부터 '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뀌고, 광복 후 1947년에 지금의 명칭인 '서울역'으로 이름이 바뀐다.[5] 당시 연세대 조계현 투수도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 하지만 맷 윌리엄스와 조계현이 직접 맞붙은 기록은 없다고 한다.[6] 맷 윌리엄스가 KIA 감독으로 부임한 뒤, 와인 투어로 선물을 주고받는 2020년 8월에 류중일 LG 감독이 위의 사진들을 맷 윌리엄스에게 보여주며 서로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해당 기사[7] 2013년 6월 11일 잭 그레인키가 헤드샷을 맞고 시작된 그 유명한 난투극이다.[8] 그런데 이는 당연한 반응인데 일단 전체주의 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딸과 주선해주고 싶을 정도로 매우 맘에 드는 사람이 있냐는 의미도 있겠지만 개인주의가 강한 외국인에게는 사생활 침해에 가까운 질문이다. 특히 자식이어도 배우자 선택권은 자식의 사생활이기에 거절 의사를 내비추는 건 당연한 반응이다.[9] 드래프트 순위를 보면 알겠지만 미국은 드래프트도 한 팀이 수십명씩 뽑는데, 하위픽은 구단 레전드들이나 코칭스태프들의 가족들을 많이 뽑는다. 하위픽은 메이저리그 진입을 기대하고 뽑는 건 아니고 마이너리그도 어쨌든 숫자를 맞춰서 경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마이너 머릿수 채우기용으로 뽑는 것인데, 어차피 아무나 뽑을거 좋은게 좋은거라고 기왕이면 직원이나 구단 레전드의 가족을 뽑아주는 것. 물론 레전드의 가족이라도 진짜 재능있으면 타티스 주니어, 마이크 야스트램스키처럼 상위 순번에서 타 팀이 채간다. 윌리엄스는 디백스 스타 출신에 2011년 당시 디백스 주루코치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도 지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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