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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10:02:34

멘타나 전투

멘타나 전투
Battaglia di Mentana
Bataille de Mentana
파일:1024px-Lionel-Noël_Royer_-_The_Battle_Near_Mentana.jpg
리오넬 루아예가 1907년에 그린 전투 기록화
날짜
1867년 11월 3일
장소
교황령 로마 특별구 멘타나
(現 이탈리아 라치오 주 로마 수도광역시 멘타나 코무네)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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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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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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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2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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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발타자르 알반 가브리엘 드 포레스 남작
결과
교황령-프랑스 제2제국의 승리
영향
이탈리아 왕국로마 시 강제 편입 시도 좌절
교황령의 수명 연장
전력 8,100여 명 양군 도합 5,000여 명
피해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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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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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의용군
- 사상자 1,100여 명
- 포로 800~100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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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 144명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2제국
-전사 2명, 부상자 36명

1. 개요2. 전투 전 상황3. 전투
3.1. 전초전, 시내의 혼란3.2. 멘타나
4. 전후

[clearfix]

1. 개요

1867년 11월 3일, 로마시 인근의 마을 멘타나에서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의용군이 교황군헤르만 칸츨러프랑스 제2제국이 파견한 수비대의 연합군과 교전하여 패배한 전투. 타오르는 이탈리아 통일의 불꽃 아래 거칠 것이 없던 이탈리아 왕국주세페 가리발디가 저지당한 몇 안 되는 사건이며, 교황령 최후의 저항이 되었다.

2. 전투 전 상황

1861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탈리아 왕국을 선언하며 일차적인 이탈리아 통일이 완수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시킨 이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있었는데, 바로 교황이었다. 통일주의자들은 대부분 자유주의, 계몽주의, 심지어 공화주의의 영향을 짙게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와는 함께 가기 어려웠으며, 또 교황이 세속 권력을 가지고 통치하는 교황령도 통일주의자들의 눈에는 마땅히 통일되어야 할 '이탈리아의 영토'였다. 실제로 1848년에는 대표적인 공화주의자 주세페 마치니가 로마에서 혁명을 일으켜 로마 공화국을 세워 교황 비오 9세를 로마에서 일시적으로 쫓아내기도 했으며, 1860년에는 교황령의 마르케, 움브리아 지역에서 일어난 반교황 소요에 호응해 남하한 피에몬테군이 카스텔피다르테 전투에서 교황군을 이기고 두 지역을 병합하여 교황령을 라치오로 축소시키기도 했다.

풍전등화의 교황령을 지켜주는 방패는 열강인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1849년에 마치니의 로마 공확국을 진압하고 비오 9세를 로마로 돌려보내주었다.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가 직접 의용군을 이끌고 로마 공화국을 지원했으나 결국 패배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로마에 배치되어 교황을 지켰다. 이는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 영향력을 가능한 많이 투사하고자 하던 나폴레옹 3세의 의지였다. 또, 최초의 현대적 독재자로 평가되기도 할 만큼 대중의 지지에 의존하고 대중의 요구를 잘 파악하는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주요 지지층이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에게 교황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부여해 지지율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1864년, 프랑스 제2제국이탈리아 왕국과 9월 조약을 맺었다. 프랑스가 멕시코 제2제국을 성립시켜 멕시코를 속국화하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조금이라도 적을 줄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약의 내용은 프랑스군이 2년 내에 로마에서 철수하는 대신, 이탈리아 왕국이 교황령을 편입하기는 커녕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프랑스 제2제국은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로의 천도를 돕기로 했다. 하지만 이 조약의 또 다른 이해당사자인 교황 비오 9세는 반가톨릭주의 정권을 로마에 들일 수 없다며 조약 승인을 완강히 거부했고, 이탈리아인들은 물론 프랑스의 가톨릭교도들도 이 애매한 안에 반발했다. 그래서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사보이아 왕조의 본거지 토리노에서 로마에 훨씬 가까운 피렌체로 옮겨 간 것을 제외하면 조약은 흐지부지되었다. 조약에 대한 반발 여론을 타고 다시 한번 나타난 인물이 바로 주세페 가리발디였다.

가리발디는 교황에 강력한 적대감을 품은 강경 반가톨릭주의자로, 이미 1862년에 독단적으로 의용군 2,000명을 모아 '로마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로마를 공격하려다 아스프로몬테에서 프랑스와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이탈리아 왕국군에게 가로막혀 체포당한 전력이 있었다. 이후 잠시 연금되었다 나와서 영국으로 가 혁명가들을 만나고 여론을 모으며 웅크리고 있던 가리발디는 1866년 보오전쟁의 일환으로 일어난 제3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이탈리아 장군들 중 유일하게 승전을 거두었다. 그 외의 장성들이 부진하며 이탈리아군은 많은 곳에서 패배했지만, 동맹국 프로이센 왕국오스트리아 제국을 크게 깨뜨리며 만토바베네토 지방 합병에 성공했고 가리발디는 또 다시 큰 인기를 몰았다. 때마침 프랑스군도 1866년 12월에 완전히 철수했다.

이제 이탈리아 반도에서 이탈리아 왕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곳은 교황령밖에 남지 않았기에, 여세를 몰아 가리발디는 또 한번 로마로 진격할 의용군을 모았다. 1867년 9월, 제네바에서 가리발디가 주최한 의용군 모집 대회는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10,000여 명의 지원자가 들어왔다. 또 가리발디는 로마 시내의 통일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진격할 때 로마 시내의 호응을 받기로 했다. 이탈리아 왕국은 프랑스의 눈치를 보아 겉으로는 가리발디에게 호응하지 않았으나, 뒤에서 은밀히 가리발디를 지원했다. 로마 병합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하지만 과시적인 가리발디의 행동에, 프랑스 제2제국은 위협을 느끼고 다시 로마에 수비대를 파병했다. 또 교황군도 1861년 이후, 헤르만 칸츨러의 지휘 아래 일련의 군사개혁을 진행하였다. 가리발디는 프랑스군이 로마에 들어간 것을 알았으나, 패기 있게 다시 한번 '로마 아니면 죽음을!'을 외치며 1867년 10월에 로마로 진군했다.

3. 전투

3.1. 전초전, 시내의 혼란

가리발디의 진격 소식이 들려오자, 10월 22일에 가리발디와 내통하던 로마 시내의 통일주의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콜론나 광장과 캄피돌리오 언덕을 점거했고, 아자니 모직공장에서도 노동자들이 봉기에 가담했다. 그들 중 특히 강경하던 주세페 몬티와 가에타노 토그네티는 보르고 리오네[1]에 있는 교황군 주력부대 주아브의 병영으로 쓰이던 세리스토리 궁전에 폭탄을 터뜨려 건물 한 축을 무너뜨리고 주아브 병사 23명과 민간인 4명을 살해했다. 같은 때에 가리발리 부대도 지원군으로 엔리코 카이롤리와 조반니 카이롤리 형제에게 70명의 병사를 딸려 보내 티베르 강에서 배를 타고 로마로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주아브들은 폭탄이 사용된 기습공격에도 침착하게 대응하였다. 이들은 로마 원도심 각 구역에 포진한 통일주의자들을 포위하고 하나씩 무너뜨렸다. 그 결과 10월 22일 해질녘엔 이미 봉기가 가라앉았다. 이 상황을 모르고 그날 밤에 로마 시내로 진입한 카이롤리의 분견대는 빌라 글로리 공원 즈음에서 포위당해 전멸했다. 지휘관인 형 엔리코는 전사하고 동생 조반니는 중상을 입은 후 사로잡혔다. 이후 남은 잔당들도 차례차례 전멸당해, 10월 25일에 모든 봉기가 진압되었다.

한편 가리발디 본대는 진격하여 10월 25일에 티볼리 , 아쿠아펜덴테 , 몬테로톤도를 차례로 점령한 후 몬테로톤도에서 멈춰서 로마 시내의 봉기를 기다렸다. 그에게는 통일주의자들과 카이롤리 분견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0월 28일에는 이상할 정도로 봉기가 일어나지 않자 로마로 진격했으나, 29일에 도로 몬테로톤도로 들어왔다. 가리발디가 4일을 이렇게 허비한 사이, 프랑스와의 충돌을 저지하려는 이탈리아 왕국군이 가리발디를 추격해왔고 프랑스군이 29일 로마에 들어왔다.

3.2. 멘타나

파일:Plan_of_Battle_of_Mentana_1867.jpg

멘테나 전장 지도

가리발디는 자신이 세 국가의 군대에 포위된 것을 알았으나,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가리발디를 몰아넣었다고 판단한 교황군 총사령관 헤르만 칸츨러는 공격을 결단, 프랑스군 지휘관인 드 포레스 남작과의 협의 하에 11월 3일, 로마 시 동북부로 나가서 몬테로톤도로 진군했다. 그러자 가리발디 역시 남하하여 멘타나 마을에서 교황령-프랑스 연합군을 영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가리발디의 의용대는 사기도 충만하고 병력 수도 훨씬 많았으나, 병력의 질이 낮았다. 전 병력이 머스킷으로 무장했으며, 포병과 기병은 가리발디의 4남 리치오티가 이끄는 분견대에만 편제되어 있었고 오히려 본대에는 전혀 없었다. 반면, 연합군은 모든 면에서 가리발디의 군대보다 나았다. 교황군은 교황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인 독실한 가톨릭교도들로 구성되어 사기는 옛 십자군에 맞먹었으며, 프랑스군은 1866년에 처음 개발한 따끈따끈한 신무기 샤스포 소총으로 무장하고 왔다.

11월 3일 아침에 멘타나를 방어하던 가리발디군 3개 대대가 연합군과 조우했다. 연합군은 후장식 볼트액션 소총인 샤스포를 든 프랑스군을 전열에 앞세우고 경보병 교리을 채택한 교황군이 양익을 맡아 공격적으로 나섰다. 볼트액션 전열과 경보병이 뿜는 압도적인 화력에 3개 대대는 순식간에 괴멸해, 오후가 되기도 전에 퇴각했다. 그 대신, 마을 내로 연합군이 진입하기 전에 가리발디 본대가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가리발디는 화력의 차이를 직감하고,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싸움을 끌고 갈 수 있게 마을의 건물들을 점거하고 시가전을 유도했다. 이 전략은 주효해, 연합군은 늦은 오전에 공격을 시작해 해가 넘어갈 때까지 공격을 퍼부었으나 멘타나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이때, 헤르만 칸츨러가 계략을 내었다. 프랑스군이 공격을 퍼부어 가리발디 군의 시선을 잡아두는 동안, 교황군 일부 부대가 마을을 우회하여 퇴로를 끊고 마을을 완전히 포위한 듯이 겁을 주는 것이었다.

전략은 완전히 적중했다. 교황군 주아브 3개 중대가 어둠을 틈타 마을을 돌아, 몬테로톤도와 멘타나를 잇는 길을 점거한 후,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사격을 개시했다. 후방에 교황군이 나타난 것을 본 가리발디 군대는 웅성거리다, 도망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리발디가 몸소 나서서 병사들에게 일갈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밤새 많은 병력이 도망쳤고, 수가 줄어든 가리발디 군대는 마을 중간의 성으로 모였으나 결국 저항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다음 날 아침에 가리발디 및 5,100여 명의 병력은 몬테로톤도로 퇴각했고 1,000여 명의 병사들은 항복했다.

4. 전후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한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왕국으로 귀환, 구금되었다가 곧 석방되어 그의 아지트인 카프레라 섬에 연금되었다. 그 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 아무 활동도 하지 못했다.

로마 내부에서 봉기를 일으켰던 이들 중 죽지 않고 포로로 잡힌 이들은, 1868년에는 모조리 처형되었다. 카이롤리 분견대의 유일한 생존자 조반니는 1869년에 죽었는데, 죽는 순간까지도 이 전투에서 전사한 형 엔리코에 이름을 외며, 프랑스와 교황을 욕하다 사망했다.

교황군 총사령관 헤르만 칸츨러는 교황령의 영웅이 되었다. 비오 9세는 그에게 높은 작위를 수여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칸츨러는 자신이 부유하지 못해 고위 귀족이 되면 품위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한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그 대신, 그는 전훈을 분석했다. 그는 가리발디 군의 동태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 전신을 통한 감시망과 철저한 암호 사용을 통한 기밀 유지를 승리의 비결로 판단하고 이를 군에 보급하는 한편, 레오 4세가 쌓은 성벽 및 산탄젤로 성을 견고하게 요새화했다. 프랑스군도 멘타나 전투를 명분으로 다시 주둔하기 시작해, 로마는 난공불락의 도시가 되었다.

프랑스군 사령관 포레스 남작은 이미 각종 탐험과 크림 전쟁 등을 거친 명성 있는 장수였는데, 이 전투로 한층 명성을 높여 19사단 사단장의 직위까지 갔으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병력 기동에서 미숙한 면을 보이면서 패전에 일조했다고 비난받고 1879년에 전역했다. 그래도 1904년에 90세로 사망하며 천수를 누렸다.

샤스포 소총은 프랑스군이 이 전투에 대해 프랑스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경이로운 무기"라는 후한 평가를 받았다. 이후 짧은 기간 동안 세계 최고의 소총으로 평가받았으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영 미적지근한 성과를 낸 후 1874년부터 금속 탄피를 도입한 그라 소총으로 대체되었고, 엉뚱하게 한동안 일본 제국군 주력 소총으로 남게 된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발발을 계기로 정세가 뒤집혔다. 프랑스군이 위기에 몰리자, 로마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군이 본국을 지키러 철수한 것이다. 그러자 이탈리아 전역에서 로마 점령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탈리아 왕국은 일단 사태를 관망했다. 그러다 프랑스 제2제국이 무너지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들어서자 공화정이라면 교황을 위해 무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 비오 9세에게 명목상으로 교황령을 이탈리아 왕국의 보호국으로 하여 이탈리아군이 평화롭게 로마를 점령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비오 9세는 편지를 집어던지고 화를 내며 완강히 거부하고, 형식상으로라도 무력 저항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1870년 9월 19일, 라파엘 카도르나가 지휘하는 이탈리아군이 로마에 당도했다. 이탈리아군은 끝까지 협상을 시도했으나, 회답은 없었다. 비오 9세 역시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으나, 조약을 통한 교황령의 영구 상실과 나아가 세속 국가 이탈리아가 교황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면 안된다고 판단하여 싸울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교황이 총력전을 선포하자, 이탈리아군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하루 종일 포격을 퍼부어 일부를 무너뜨렸다. 그러자 9월 20일에 신속 점령을 위해 이탈리아군 최정예 부대 베르살리에리 경보병 연대가 성벽의 틈으로 진격했는데, 교황군 주아브가 막아섰다. 주아브와 베르살리에리는 격전을 치루어, 주아브 벙사 19명이 전사하고 베르살리에리 병사 49명과 장교 4명이 전사하였다. 이 정도면 기백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 비오 9세는 추가적인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저항 중단을 명령, 마침내 로마가 점령되었고 시민 투표를 거쳐 동년 10월 8일에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와 라치오를 합병, 통일 대업을 완수하였다. 교황은 추가적인 협상을 거부하면서, 바티칸 유수가 시작된다.


[1] 로마 시의 전통적인 행정구역이다. 현대에는 구에 대응하는 무니피키오로 대체되었지만 여전히 관습 지명으로 기능한다. 모든 리오네는 무니피키오 I(1구) 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