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 명하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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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明昇1356년 ~ 1391년
중국 원말명초 시기의 인물로 명하의 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부황은 명옥진이며 모후는 팽황후(彭皇后)고 비록 그가 다스리던 명하는 명나라에게 멸망당했으나 항복한 점이 참작되어 귀의후에 봉해졌다.
2. 생애
1366년 아버지 명옥진이 죽자 즉위했으며 이때 명승의 나이가 10세에 불과했기에 모후인 팽태후가 섭정하였다. 당시는 원명교체기로 진한의 진우량, 장오의 장사성, 주명의 주원장이 격렬하게 싸우던 시기였고 이 상황 속 주원장의 우세해진 승기 역시 명하 역시 향하게 되었다. 당초 주원장은 명승에게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했으나 명승은 거부하였는데 이에 주원장은 본보기로 명하의 수도 충칭을 함락,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명승이 항복하여 명하는 멸망하고 말았다.비록 명승은 초기엔 항복을 거부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항복했다는 점이 참작되어 귀의후(歸義侯)로 봉해졌고 난징에 거주하게 되었으나 곧 고려로 일가가 유배되었다. 다만 명목상 유배일 뿐 당시 고려 국왕인 공민왕은 그를 하대하지 않았으며 당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그를 화촉군(華蜀君)으로 봉하고 녹까지 지급하는 등 유배자라곤 생각하기 힘든 높은 대우를 받기까지 했다. 이 시기 명승은 개경의 흥국사(興國寺)에 정착하였으며 모후인 팽씨가 그곳에서 사망하자 고려 조정으로부터 장례를 지원받았고 조정은 사당까지 세워주기에 이르렀다.
이후 1391년 사망했다. 생전 명승은 윤씨(尹氏)[1]와 혼인하여 4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4명의 아들 모두 조선의 대부(大夫)를 역임하는 등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3. 가족
- 부황: 태조 명옥진
- 모후: 팽황후
4. 참고 항목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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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희왕(尹熙王)의 딸이다.[2] 명승이 황제로 재위할 당시 황후였으나 명하 멸망 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3] 명하가 멸망한 후 화촉군의 신분인 명승과 혼인했기에 황후가 아닌 군부인(君夫人)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