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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11:37:39

제임스 스콧

<colbgcolor=#A7C7DF><colcolor=#000000> 제1대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
James Scott, 1st Duke of Monmouth
파일:James_Scott,_Duke_of_Monmouth_and_Buccleuch_by_William_Wissing.jpg
이름 제임스 스콧
(James Scott)
출생 1649년 4월 9일
네덜란드 공화국 로테르담
사망 1685년 7월 15일 (향년 36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런던탑
장례식 1685년 7월 15일[1]
런던 런던탑 성 피터 애드 빈큘라 교회
배우자 제1대 버클루 여공작 앤 스콧 (1663년 결혼)
자녀 제임스, 앤, 헨리, 제임스(사생아), 헨리에타(사생아)
아버지 찰스 2세
어머니 루시 월터
종교 성공회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작위와 활동2.3. 몬머스 반란2.4. 처형
3. 혈통에 대한 의혹4. 여담5. 제임스 스콧의 가족 및 후손

[clearfix]

1. 개요

영국의 귀족. 초대 몬머스 공작이다.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찰스 2세사생아 중 장자로 태어났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파일:James_Scott,_Duke_of_Monmouth_and_Buccleuch_(1649-85).jpg
어린 시절의 제임스 스콧

1649년에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당시 웨일스 공이었던 찰스 2세와 루시 월터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시 월터는 잉글랜드의 상류층 여성으로, 헤이그에서 망명 중이었던 찰스 2세와 관계를 맺었다.[2][3] 루시는 자신의 아들을 이용해 찰스 2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1658년에 찰스 2세는 아들을 어머니의 곁에서 떼어놔 파리로 데려갔다. 파리에서 제임스는 찰스 2세의 측근인 윌리엄 크로프츠의 보살핌을 받았다. 1663년, 왕정 복고 후 어느정도 지위가 안정된 찰스 2세는 아들을 잉글랜드로 불렀다.

2.2. 작위와 활동

1663년 2월 제임스는 13살의 나이에 아버지 찰스 2세로부터 몬머스 공작, 던캐스터 백작, 타인데일 남작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달에 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1663년 4월에 버클루 여백작 앤 스콧과 결혼했다. 결혼 후 앤 스콧은 버클루 여공작이 되었고 제임스 스콧은 버클루 공작 직위를 역임하게 되었다. 제임스는 아내의 성인 스콧을 쓰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제임스 피츠로이[4] 또는 제임스 크로프츠로 불렸다.

제임스는 다른 여러 귀족들처럼 군인으로 활동하였다. 해군에 복무하면서 숙부 요크 공작 제임스 휘하에서 제2차 영란전쟁에 참전하였다. 이후 성실한 군복무로 계급을 높여가던 제임스는 제3차 영란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군인으로써의 뛰어난 자질을 증명했다. 찰스 2세는 제임스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총장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모든 육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제임스는 잉글랜드 귀족 사회의 명사가 되었다. 그는 서자라고는 해도 왕의 맏아들이었으며 높은 작위와 공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잉글랜드의 귀족 상속녀와 결혼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성공회 신자였다. 이러한 점들은 제임스의 숙부이자 왕위계승자인 요크 공작 제임스와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는 가톨릭교도였으며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많은 귀족들이 제임스 스콧을 지지하면서 제임스는 왕위계승권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1678년에 잉글랜드 사회에 가톨릭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음모론이 퍼지면서 요크 공작 제임스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대중들은 개신교도 왕위계승자를 요구했고, 제임스 스콧은 이 시류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부모님들이 이전에 비밀리에 결혼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자신은 왕비 브라간사의 카타리나 외에 누구와도 결혼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높아져가는 영향력과 왕위계승권에 대한 욕심으로 제임스는 아버지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부자 간의 갈등은 정치적 문제로 번져 1679년에 제임스는 네덜란드로 망명을 가야했다. 제임스는 얼마 안 가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찰스 2세는 아들을 만나길 거부했다.

1683년에 라이하우스 사건(Rye House Plot)이 일어나면서 제임스 스콧은 더더욱 의심을 받게 되었다. 라이하우스 사건은 휘그당 인사들의 찰스 2세와 요크 공작 제임스에 대한 암살 모의로, 이들은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밝혔다. 사건에 연루된 많은 이들이 추방당하거나 처형되는 와중에 찰스 2세는 아들을 용서했다.

2.3. 몬머스 반란

1685년 2월에 찰스 2세가 서거하고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스콧은 왕위계승권을 요구하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침공을 계획했다. 그는 자신의 침공이 '요크 공작 제임스의 폭정으로부터 왕국과 국교를 수호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리면서 대중의 호응을 유도했다.

1685년 6월에 제임스 스콧과 제임스 2세의 군대가 세지모어 평원에서 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제임스 2세의 승리였다. 패배한 제임스는 농부로 변장해 도망갔지만 이내 추격군한테 체포되었다. 붙잡힌 제임스는 제임스 2세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많은 귀족들이 앞다투어 제임스의 구명을 요청했다. 그중에는 제임스 2세의 형수이며 선왕 찰스 2세의 왕비였던 브라간사의 캐서린도 있었다. 그러나 제임스 2세는 이전부터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던 조카를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고 그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2.4. 처형

파일:Monmouth's_Execution.gif
몬머스 공작의 처형, 1685년

1685년 7월 제임스는 런던탑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가 죽는 과정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제임스 스콧의 처형을 맡은 인물은 형편없는 사형집행인으로 유명한 잭 켄치였다.[5] 제임스는 처형대에 서면서 켄치에게 팁을 주며 최대한 편하게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켄치가 처음에 휘두른 도끼는 제임스의 목에 약간의 상처를 남겼을 뿐이었다. 이후 두번 더 도끼를 내리쳤으나 제임스는 죽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제임스는 경련을 일으키며 고통에 허덕였다. 당황한 켄치는 다시 두번 더 도끼를 내리치고서야 제임스를 죽일 수 있었다. 그렇게 총 5번을 내리쳤지만 목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기에 마지막은 나이프로 목을 절단해야 했다.

중세 시대 때 공개처형은 민중의 최고의 오락거리였는데, 몬머스 공작의 처형은 그중에서 최악이었다. 분노한 대중들은 싸구려 처형을 선사한 켄치를 비난하며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그래서 켄치는 호위를 받으며 처형대에서 퇴장해야 했다.[6]

제임스 스콧의 시신은 런던탑의 성 피터 애드 빈큘라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의 공작령은 몰수되었으나 그의 자식들은 아내의 버클루 공작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제임스의 혈통은 이어졌으며 현 제10대 버클루 공작인 리처드 스콧이 그의 직계 후손이다.

3. 혈통에 대한 의혹

당대에 그가 정말로 찰스 2세의 아들인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제임스 스콧은 찰스 2세가 루시 월터를 처음 만나고 약 9달 후에 태어났다. 이 시기가 절묘한 가운데 루시 월터는 원래 남성 편력이 꽤 있는 여성이었다. 루시 월터가 찰스 2세와 헤어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도 다른 남성을 만나고 다녔기 때문이다. 또한 제임스가 루시가 만나던 남자 중 한명을 닮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은 몬머스 공작이 왕위에 대한 욕심을 보이면서 요크 공작의 지지자들이 퍼트린 소문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2012년에 제임스의 후손인 제10대 버클루 공작의 DNA 검사 결과 그가 스튜어트 가문의 후손임이 입증되면서 제임스 스콧의 혈통 논란은 종결되었다.기사

4. 여담

5. 제임스 스콧의 가족 및 후손[7]

월터 몬태규 더글래스 스콧 이후
* 월터 몬태규 더글래스 스콧 (1806 ~ 1884) 5대 버클루 공작 / 妻 샬럿 틴 (1811 ~ 1895)
* 2남 윌리엄 몬태규 더글라스 스콧 (1831 ~ 1914) 6대 버클루 공작 / 妻 루이자 해밀튼 (1836 ~ 1912)
* 2남 존 몬태규 더글라스 스콧 (1864 ~ 1935) 7대 버클루 공작 / 妻 마거릿 브리지먼 (1872 ~ 1954)
* 1남 월터 몬태규 더글라스 스콧 (1894 ~ 1973) 8대 버클루 공작 / 妻 메리 라셀레스 (1900 ~ 1993)
* 1남 존 스콧 (1923 ~ 2007) 9대 버클루 공작 / 妻 제인 맥닐 (1929 ~ 2011)
* 1남 리차드 스콧 (1954 ~) 10대 버클루 공작 / 妻 엘리자베스 커 (1954 ~ )
* 1남 월터 스콧 (1984 ~) / 妻 엘리자베스 코비 (1986 ~ )
* 1남 윌러비 스콧 (2016 ~)
* 2남 찰스 스콧 (1987 ~) / 妻 프랜시스 서머필드
* 1남 루프스 스콧 (2017 ~)
* 2남 윌프레드 스콧 (2019 ~)
* 3녀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 왕자비 (1901 ~ 2004) / 夫 글로스터 공작 헨리 왕자 (1901 ~ 1974)
* 5남 허버트 스콧 (1872 ~ 1935) / 妻 마리 조제핀 에드워즈
* 1녀 마리안 스콧 (1908 ~ 1996) / 夫 앤드류 퍼거슨 (1899 ~ 1966) / 夫 토마스 엄허스트 (1895 ~ 1982)
* 2남 로날드 퍼거슨 (1931 ~ 2003) / 前妻 수잔 바란테스 (1937 ~ 1998) / 妻 수잔 댑포드 (1946 ~ )
* 2녀 사라 퍼거슨 (1959 ~ ) / 前夫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1960 ~ )


[1] 아무리 왕족이라도 죄수로서 죽으면 장례조차 안 치뤄 주거나 치루더라도 어느 정도 동정여론이 생길 무렵 치뤄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처형된 당일날 바로 장례가 치뤄진 이례적인 케이스다.[2] 즉, 아버지내전에서 죽어가고 있던 시국임에도 여자를 만나 관계를 맺은 것.[3] 이 때문에 할아버지 찰스 1세는 손자의 탄생을 보지도 못하고 두달 반 전에 참수되었다. 물론 제임스 스콧은 혼외자이므로 공식적인 첫 손자녀는 1년 뒤인 1650년에 태어나는 고종사촌인 윌리엄 3세다.[4] Fitzroy, 왕(Roy)의 아들이란 뜻으로 영국 왕의 사생아가 받는 성씨이다.[5] 일설에 의하면 제임스 2세가 증오스러운 조카에게 마지막으로 최대한 고통을 선사하고 싶어 직접 잭 켄치를 지정했다고 한다.[6]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잭 켄치의 이름은 후에 사형집행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몬머스 공작의 처형에서 제대로 하지 못하자 당황해 울기까지 했음에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잔인한 성격 탓에 일부러 그런 식으로 처형을 진행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7] 공작위 소유자와 영국 왕실과 관련된 사람만 기재[8] 사후 몰수[9] 할머니보다 먼저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버클루 공작 작위 승계[10] 이 사람부터 퀸즈베리 공작도 겸임하기 시작했다. 퀸즈베리 공작으론 5대로 버클루 공작 대수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