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진 대장군 몽오 蒙驁 | Meng Ao | |
생몰연도 | ? ~ 기원전 240년 |
가족관계 | 아들 몽무 손자 몽염 손자 몽의 |
성우 | 이토 카즈아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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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식능력치 | ||||
시기 | 무력 | 지휘력 | 지력 | 기타 |
20권 | ? | 90 | 91 | 누가 범장 허허 |
가이드북1 | 89 | 90 | 91 | 누가 범장 허허 |
가이드북2 | 85 | 90 | 91 | 육장이 싫구나 |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누가 범장이냐?"라고 한다. 첫째 가이드북에서는 팔이 잘린 능력치가 반영되지 않았다.
킹덤의 등장인물. 진나라의 명장 몽무의 부친이자 몽념, 몽의의 조부. 몽무를 연상케 하는 거구와 인자한 외모를 갖춘 대장군. 일명 백로(白老) 장군.
2. 상세
자타공인 범재다. 산양 함락전 개막과 동시에 진시황의 질문에 답하는 창문군은 범용한 장군이라고 평했고, 심심하면 몽오와 싸우라는 왕의의 조언을 염파로부터 전해들은 강연은 몽오가 그럴 만한 재능이 있었냐며 의아해 했다. 아들과 손자인 몽무와 몽념보다도 각각 군재가 떨어진다. 몽오의 무공은 대부분 환기와 왕전 덕에 쌓은 것이라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산양 함락전 도중에는 환기가 다섯, 왕전이 여덞 성을 함락하는 동안 본인은 세 군데만 함락하고도 둘보다 늦게 산양에 도착했다. 또한 염파를 이기기 위해 구상한 요새를 염파에게 선보이는데, 몇십 년이라는 시간과 재산을 투자하며 만든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염파에게 격파당했다. 본인도 유언을 남기던 중에 영웅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되지 못했다며, 자신이 지니지 못한 재능을 지닌 육대장군을 시샘하다 못해 빨리 죽기를 내심 바랐다고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백할 정도였다.하지만 범재라고 까일지언정 (?)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실력이 없었다면 험난한 전국 시대에 이국인이 전국칠웅중 최강인 진나라에서 대장군이라는 직위에까지 오르는 것도 모자라 천수를 누리고 죽지는 못했을 것이고[1], 실제로 산양 함락전 막바지에 염파는 몽오가 제나라를 떠나기 전까지 죽이지 못한 적은 몽오 단 한 명 뿐이었다고 말하며 몽오의 실력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염파 왈 불리해지면 바로 도망쳤다고.[2][3]
애초에 까이는 것도 작중 미친 수준의 천재들과 비교되며 어딘가에 특화된 재능이 없기에 범재라 평가절하되는 것이지 무능하다고 평가받지는 않는다. 범재라 불리는 존재가 말도 안 되는 천재들과 비교되는 시점에서 그의 능력 자체가 수준급임은 충분히 알 수 있다.[4] 또한 육대장군보다 오래 살며 대장군이 되게 해 준 관록은 결코 허투루 쌓은 것이 아니다. 몽오 본인이 본진에서 버티는 동안 왕전과 환기가 전장을 휩쓰는 필승 전략을 고수하는데, 이런 망치와 모루 전술도 모루의 실력이 부족하면 성립하지 못한다.
범용하다는 냉혹하기까지 한 평가를 받아도 어느 의미로는 가장 중요한 산양 함락전의 지휘관으로까지 임명되었는데, 이는 정석에 충실하기에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는 약해도 약한 상대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는 실력은 갖추었고, 따라서 전국칠웅 중 약국에 속하는 한나라와 위나라를 상대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약자가 강자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강자의 방심을 유도하거나 약점을 찔러야하는데 창평군이나 창문군이 범장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이러한 경우를 걱정하지 않는것을 생각하면 일체의 방심도 약점도 없는 장군인 듯.
전투법은 자신의 무용이나 기책에 의존하지 않는 정석중에 정석으로 시간이 걸려도 병사들을 무리시키지 않고 차근차근 진행하는 편. 그렇다고 기책 자체를 부정하는 우장도 아닌지라 필요하면 그것을 채용하는 유연함도 겸비하고 있다. 성격 더럽기론 진군 제일인 환기조차 예를 표하는 덕장. 약한 적에게 강하다는건 의외의 상태에 빠지지 않는 우수한 장군이라는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작중에서 몽오와 비교해 모든 면에서 위인 염파는 천적중에 천적이라는 소리가 된다. 실제 젊은 시절 염파와 몇번이나 겨루고도 불리해지면 바로 철수했다고 하며 제를 떠나 진에 사관한후 수십년간 단 한번도 전장에서 마주치지 않았음에도 염파를 연구하는 집요함과 노력을 겸비힌다. 자신이 싸우는 일이 거의 없어서 오죽하면 직접 창을 들고 싸운게 마지막으로 염파랑 싸울때뿐으로 수십년간 같이 해온 직속부하들도 몽오장군이 이렇게 강했나하고 깜짝 놀랬다. 그리고 가진자가 적다는 축성의 기능도 가져서 대 염파용 진지를 구축하기도 했다.[5]
합종군 방어전 때는 관록 덕에 장당과 더불어 함곡관을 방어하는 중심점이 되었고, 장당의 중독사 후에는 실질적으로 진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함곡관 공방전 당시 장당과 함께 성에 틀어박혀 싸우는 역을 맡은 것은 백전노장의 중량감 때문이라고 하며, 환기는 특유의 임기응변으로 배치된 것이라고 한다.
아들인 몽무가 공언했듯이 군재가 떨어지는 만큼 인재를 보는 안목은 귀신 같으며, 인재를 등용할 때는 출신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여씨 사주라는 직위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의 측근인 신에게 왕의의 창이 벅차면 자신에게 넘겨도 된다며 농담을 건넨 몽무의 부친이자, 신을 처음 만났을 때는 말에서 내려 대등한 눈높이에서 대화를 나누던 몽념의 조부다운 면모.[6] 음지를 전전하던 왕전과 환기를 부장으로 삼았는데, 왕전은 명문가의 큰어른이지만 잠재적 반역자 취급을 받으며, 환기는 중범죄자다. 작품이 진행되며 둘이 전부 육대장군급 재능이라고 인증받는 걸 감안하면, 인재를 판별하는 눈이 귀신 같다는 말은 전혀 허풍이 아니다. 본래는 노비 출신이던 곽비도 몽오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천인장도 모자라 몽오의 측근이 되었으며, 역시 육대장군급 인재로 성장하는 신도 몽오 덕에 몽념, 왕분과 맞춰서 천인장이라는 중요한 계단을 밟았다. 버릇이 일반 졸병 차림을 하고 밤중에 막사를 돌아다니며 손수 일반 장병들 푸념도 듣으면서 맞장구도 쳐주고 더불어 장병들 가운데 인재를 찾는 버릇이 있다. 바로 신도 이렇게 손수 만났는데 당연히 그가 대장군이라는 걸 꿈에도 모르고 신이 아저씨라고 부르며 허울없이 말을 나눌때 맞장구 쳐줬다가 나중에 대장군 차림으로 있는 그를 보고 신이 기절조풍하듯이 놀란 건 당연했다.
백로(白老)라는 별명과 인지한 외모에 걸맞은, 주위를 감복시키는 인자한 성품을 지녔다. 성격이 지랄맞기까지 해도 나름대로 깍듯이 받든 환기가 좋은 예.[7] 산양 함락전 도중에는 자신의 전략을 밝히며 자신의 군대에게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다독이며 말단병들까지 아울러 자신의 형제이자 전우, 자식이라고 불렀는데, 몽오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사망 직후에 빈객과 하인들이 몽오의 자택 안팎을 빼곡히 채우고 통곡하며 흐느낀 모습을 보면, 평소에도 꽤나 부드러운 성격으로 아랫사람들을 잘 대해 주었던 것 같다.
인자한 성품과는 달리,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노력도 마다하지 않는 열정도 가지고 있다. 무공을 쌓기 위해 몽오 본인의 평가마저 깎이는 단점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장에서는 악귀와도 같은 환기를 등용했다. 산양 공략전 당시에는 염파를 이기기 위해 염파의 전법을 연구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투자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염파가 출진한 전장터에까지 몸소 달려가면서 몰래 염파를 약 40년 동안 관찰한 집요함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것도 제를 떠난 이래로 전장에서 단 한번도 마주친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애초에 영웅이 되고자 소유한 자산을 전부 처분하고 조국을 떠나, 밤에는 생면부지의 천민에게 머리를 숙여 잠자리를 비는 고된 방랑길에 오르는 건 어지간한 각오와 근성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자신에게 마지막에 이기고 도망치면 된다고 조언을 해준 답례로 예정에 없던 임시 천인장에 신을 임명하면서도 신에게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오장으로 강등시키겠다는 단서를 달고, 윤호의 목을 노리며 멋대로 행동한 몽염이 자신의 부장들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부장들에게 화를 내기는 커녕 웃으며 넘긴 것을 보면, 공과 사는 칼같이 구별하는 성격이다.
3. 작중 행적
여씨사주 몽무의 아버지로 언급된 것과 승상 여불위의 호령 하에 몽오 대장군이 부장들과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한나라를 정복하러 출진해 승승장구하며 한나라의 성들을 계속 빼앗아 진나라 조정을 들뜨게 한다. 이때 왕전, 환기는 몽오의 부장들이라고만 나오고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몽오가 대군을 이끌고 한나라를 정벌하러 간 사이 때를 노리던 조도양왕이 방난과 이목을 대장군으로 삼아 진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면서 진나라가 위기에 처했다. 진나라 조정에서 몽오를 회군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몽오와 부장들은 그대로 한나라 정복을 계속하고 본국에 남은 병력과 백성들을 징집하고 복귀한 왕의와 몽오의 아들 몽무를 보내 조나라 대군에 맞섰다. 어쨌든 몽오에게는 나름 다행히었는데 범재이고 정석적인 몽오에게 방난과 이목 같은 괴물들은 몽오가 상대하기 최악인 난적들이다. 몽오를 불러들이지 않고 왕의를 보낸 진나라 조정의 판단이 정확했던 것이다. 왕의가 사망한 후 몽오의 원정군은 한나라 원정을 마치고 잘 귀국한 모양이다.3.1. 산양 공략전
승상 여불위의 계략으로 진조동맹이 성사된 기회를 틈타 중화통일의 첫 걸음을 딛으려는 진나라가 위나라의 요충지 산양을 함락시키기 위해 한나라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몽오를 다시 출진시키며 몽오와 부장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한나라를 정벌할 때와 마찬가지로 부장인 환기, 왕전과 함께 20여 군데의 성을 함락시키며 승승장구하면서 전진하였고, 정석대로만 성을 공략하였기에 환기와 왕전보다 늦게 산양에 도착한다. 도중에 염파 사천왕의 일원 윤호가 유능한 부장들을 베어넘기는 바람에 인선에 차질을 겪었지만, 왕분, 몽념, 이신을 임시 천인장으로 발탁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재정비한다.[8]산양으로 진군하던 도중 염파가 위군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을 떨 정도로 내심 크게 동요한다. 염파는 오장으로서 데뷔하고 계급이 오를 때마다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는 상대였으며, 연패를 기록하던 몽오가 결국 조국인 제나라를 떠나 고된 방랑길에 오르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몽무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몽오는 노병으로 변장[9]한 채 풀밭에 누워서 고민하다가
이후 전투에서 왕전과 환기를 위해 위군의 공세를 방어하고, 마지막 날에는 염파가 본진으로 쳐들어오자 도망치지 않고 일기토를 치르며 몽무의 부친다운 괴력을 보인다. 비록 염파에게 왼팔을 잃기는 했지만, 몽오가 시간을 끈 사이에 염파의 한쪽 팔인 윤호가 이신에게 죽고, 위군의 본진도 환기에게 함락당한다. 자신이 외통에 몰렸으며, 벽이 부대를 이끌고 몽오를 구출하러 오는 걸 본 염파의 화친 요청을 수락하고 승리를 거둔다.[12]
결국 마지막까지 염파를 상대로 한 전투에선 승리하지 못했지만 전쟁에서는 승리하여, 자존심 강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염파조차 깨끗하게 인정한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3.2. 합종군 방어전
함곡관 방위전에선 합종군을 상대로 하는 진군의 중심으로서 톡톡히 그 역할을 수행한다. 함곡관 방위를 맡은 무장 중 장당과 몽오를 빼면 모두 비교적 젊은 무장이었고, 유일하게 둘의 동기뻘인 표공은 전선에서 직접 싸우는 데 더 적합했기에 사령관의 역할은 장당과 몽오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장당이 중독사한 후에는 실질적으로 총사령관이 되어 진군을 지휘한다. 장당 님이라며 존대를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장당 또한 몽오에게 존칭을 쓴다.[13] 젊은 시절 잘나가던 육대장군이 매우 싫었다며 투덜거리다 오래 사는 것도 재능이라면 그 쪽에서는 우리들이 이겼다면서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킬킬거리기도 했다.나는 영웅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재능이 없었지. 출발은 최악이라 모국인 '제'에서는 전혀 싹이 돋지 못했고,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각국을 떠돌아다녔지만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서쪽 끝의 '진'나라에 도착해 마침내 조금씩 싹이 돋기 시작했다. (중략) 진나라로 온 후... 나는 조금씩 공을 쌓아갔다... 하지만 그 옆에서는 그 육대장군들이 몇 배나 빨리 무공을 올려갔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런 괴물들과 겨루기가 어디 쉬워야 말이지. 빨리 죽기를 바랄 만큼 싫어했다. 하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언제나 그 모습이 멋있어 보였단다... 흐음. 참으로 멋있었지. 육대장군도. 삼대천도. 그리고 지금 영웅을 꿈꾸는 두 젊은이에게 영웅이 되지 못한 늙은이가 금언 한 마디 남겨주마. 몽념과 신과 왕분. 셋이서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거라. 손을 맞잡을 필요는 없다. 때로는 대립하는 게 당연하겠지. 그래도 세 사람이 서로 의식하며 함께 올라간다면 그 관계는 반드시 큰 힘을 낳을 거다. 육대장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형태의 전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허허허, 나는 그 안에 끼지 못했지만. 그리고 녀서들에게 뒤지지 않는 영웅이...아니, 그렇다 해도... 참으로 긴 여행이었다.
하라 야스히사, 킹덤 34권
합종군이 해산한 지 약 1년 후, 시황 7년(기원전 240년)에 서거한다. 임종을 앞두고 찾아온 몽념과 이신에게 회한에 찬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제나라 출신이지만 영웅이 되기 위해 조국을 떠나 여기저기 떠돌은 끝에 간신히 진나라에서 대장군까지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간신히 도착한 진나라에서도 육대장군이 있어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며 괴로운 표정을 짓고 한을 털어놓는다. 이후 유언[14]을 남기고 앉은 자세 그대로 미소를 지은 채 편하게 사망한다.하라 야스히사, 킹덤 34권
몽염은 몽오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 있어서 천하 제일의 대장군은 육대장군이 아니라 몽오였다고 슬퍼한다.
싸움이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토록 고생을 했으니, 그건 몽오 장군이 제일 잘 알 것이다. 술을 내와라. 한잔 해야겠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훗. 정말 지독히도 긴 여행이었군요. 아버님... - 진, 위 국경 부근 각염(角炎)에서 몽오의 서거를 전해들은 몽무
하라 야스히사, 킹덤 34권
최전방에 주둔해있던 몽무는 전방의 적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바람에 몽오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몽무는 몽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무표정하게 알았다고 했지만, 홀로 술을 마시며 몽오와 함께 어릴 적부터 여기저기 떠돌며 고생하던 시절을 떠올리고, 지독히도 긴 여정이었다고 독백하며 석양을 향해 술잔을 들어올려 몽오의 명복을 빈다.하라 야스히사, 킹덤 34권
환기는 몽오 사후에 함락시킨 성의 포로들을 산 채로 묶은 후, 몽오에게 바치는 공물이랍시고 전부 화형시켜 몽오에게 나름대로 예를 표했다.
몽오의 죽음은 킹덤 이야기에서 나름대로의 분기점 역할을 하는데, 왕기가 마지막 육대장군이라면, 몽오는 왕기, 장당, 표공을 비롯한 진나라의 대장군 중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즉, 몽오의 죽음으로 기존 진나라의 대장군들이 모두 퇴장하고, 새로운 진나라의 대장군, 새로운 육대장군이 등장할 시대임을 암시한다.
환기 사후 환기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나왔는데 환기에게 패배해서 붙잡혔지만 환기에게 내 휘하로 들어오라고 했고 환기 부하들은 저 영감이 미쳤냐며 죽이자 하는데 나도 사람 보는 눈 있지만 너도 사람 보는 눈이 있을테고 마지막 기회이니 잘 선택하라 하는데 환기 부하들이 몽오를 죽이기 직전 환기가 몽오의 휘하로 들어가겠다 하고 그럼 "백로" 라고 예를 취하라 하는데 환기가 그에 따른다. 그러자 묶은 포승줄을 자기 스스로 힘을 줘서 끊어버린다(...) 몽오의 비범함을 보여줌과 함께 몽무의 괴력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보여주는 장면.
3.3. 외전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몽무가 장군으로서 실적을 쌓아갈 때 몽오보다 빠르다는 식으로 언급된다. 또한 혈기가 넘치던 몽무가 싸움만 하고 다니는 걸 금지시켰다고 하는데, 행인이 몽무는 부친 이상으로 혈기왕성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본편과는 달리 상당히 드센 성격으로 설정된 듯하다. 외전의 드센 성격은 본편에서는 전부 아들이 가져간 듯하다.3.4. 기타
아들이 여씨사주의 하나임에도 작중 몽오와 여불위가 마주하는 장면도 없고 몽오와 여불위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나온 적이 없다. 추측해 보자면 서로 관심이 없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몽오는 원체 소탈한 성품이기 때문에 여불위의 야망이나 권력욕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고, 여불위는 각 분야별 최고의 인재들을 모아 세력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세간으로부터 '범재'라는 평가를 듣는 몽오를 영입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몽오와 몽무는 언뜻 보기에는 전혀 안 닮은 부자 같으나 나름 닮은 면이 있다. 몽오는 출세를 위해 조국 제나라를 버렸는데 완전히 비슷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의 아들 몽무는 진나라의 신하로서 진나라 왕이 아니라 여불위에게 더욱 충성했었고 자신이 진나라 왕보다도 더욱 충성을 바쳤던 여불위가 망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었는데 여씨사주라고 불렸던 몽무는 여불위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이나 씁쓸한 감정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다른 진나라 사람들도 몽무의 냉혹한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몽오, 몽무 부자는 하나의 주군에게 충성하는 절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섬길만한 가치가 있는 주군만을 섬기며 얼마든지 주군을 갈아치울 수 있는 '좋은 나무를 가려 앉는 새' 같은 자들이다. 그래도 자신을 중용해준 사람이나 나라에 대한 의리는 지키는 편이다. 몽무도 먼저 여불위를 저버린 적이 없고, 몽오도 합종군 당시 패배할 상황에 몰리자 마음 속으로 왕과 진나라 백성에게 사죄하는 점에 잘 나타난다.[15]
몽오가 제나라 시절 합종군을 당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으나 정황상 몽오는 그때 합종군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몽오는 남들은 평생 한 번도 안 당하는 합종군을 무려 두 번이나 경험했다. 그것도 둘 다 당하는 쪽으로...
4. 관련 문서
[1] 사망장면이 나온 장수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리며 죽었다[2] 물론 일기토가 아닌 전쟁에서는 잘 도망치는 것도 실력이다. 단순히 도망치는 걸로는 군세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후방의 적들에게 금방 따라잡히고 다 죽기 때문.[3] 작중 직접적으로 묘사된 바는 없지만 이 시기 제나라는 전토가 유린되어 성 2개만이 남아 간신히 유지되던 시절이다. 이 시절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다는것 자체가 평범한 인물은 아님을 증명한다. 괜히 염파가 몽오의 존재를 기억해준 게 아니다.[4] 공식능력치만 보면 조나라의 삼대천 후보 경사와 동일한 수준이다. 물론 경사는 한창 성장 중인 젊은 장수지만, 적어도 평범한 장군이나 몽오를 범용하다고 평가한 창문군보다는 몽오의 군재가 훨씬 위임을 보여준다.[5] 물론 뚫리기는 했지만 지원군이 와줄 때까지 본인이 일기토를 하면서까지 버텨냈다.[6] 신을 천인장으로 임명할 때, 몽오와 몽무의 부관들은 출신과 나이를 이유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몽오는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 며 반박했고 몽무 역시 아버지의 판단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몽오를 필두로 한 가문 자체의 성품이 좋다는 증거.[7] 산양 함락전에는 몽오가 없는 자리에서는 노친네라고 부르긴 했지만 몽오를 맞이할 때는 정중히 절을 하며 존댓말까지 했다. 합종군 방어전 때 중독된 장당이 몽오를 들먹이며 환기를 몰래 호출했는데, 호출에 응한 환기는 몽오가 없다는 사실을 알자 정색하고 그대로 떠나려고 했다. 상관이자 선배인 장당은 반말을 쓰며 무시해도 몽오의 명은 기꺼이 응할 정도로 몽오를 존중하고 따른 셈이다.[8] 다만 다음날 전투에서 이 셋 이외의 임시 천인장들의 부대가 약점이 되어 고전한다.[9] 젊을적부터 압박감을 느끼면 이렇게 변장하고 병영을 살피는게 버릇이라고 한다. 문제는 덩치가...[10] 산양 함락전이야말로 최후의 역전을 이룰 기회이며, 이번에 이기고 도망치면 몽오가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것.[11] 전투가 끝나기 전에 천인장 셋 혹은 장군 하나의 목을 벨 것.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오장으로 강등시키겠다고 했지만, 신이 자진하여 병졸로 내렸다.[12] 염파가 필패하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개자방과 염파 자신의 부대로 싸우면 몽오, 몽염, 신을 모두 죽일 수 있었기에 몽오가 화친 요청을 수락하였다.[13] 아마 동년배의 숙장들이니 상호존중의 의미로 서로 존대를 한 듯.[14] 왕분, 몽념, 이신이 서로 경쟁하고 어울리며 함께 성장하여 영웅이 되라는 조언.[15] 사실 배신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전국시대에 저 정도 의리도 없으면 절대로 중용될 수가 없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