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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전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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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군사
2.1. 실책
3. 정치
3.1. 애민
4. 용인술5. 성격
5.1. 상남자5.2. 가족
6. 총평

1. 개요

朕若逢高皇,當北面而事之,與韓彭競鞭而爭先耳.
이 만약 고황(高皇)을 만났다면 응당 북면하여 그를 기쁘게 섬겼을 것이고, 공을 세우기 위해 한신(韓信), 팽월(彭越)과 채찍질을 경쟁하며 선두를 다투었을 것이오.
후조의 초대 황제, 석륵[1]
"인류 역사상 가장 선견지명이 있고 영향력 있는 두 명의 정치가로마 제국을 건국한 카이사르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이다."
아놀드 토인비
고전 문학의 영향으로 유방을 무능하고, 탐욕스럽고, 교활하기까지 하지만, 운이 좋아서 천하를 얻은 인물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기》, 《한서》, 《자치통감》 등의 기록에 적힌 유방은 덕과 능력을 갖추고 인기도 매우 높은 군주다. 남자답고 대범하다는 항우에 대한 평가는 사실 유방에게 훨씬 더 어울리는 것이다. 유방은 크게 베풀어야 할 때는 설령 상대가 가장 미워하던 자라고 해도 망설이지 않고 후하게 베풀었고, 지존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가장 비천한 존재도 신경 썼으며, 상대가 누구라도 태도를 바꾸지 않고, 시정하거나 숙일 때는 바로 행했다. 그러면서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실익을 좇는 진정한 대인이었다.[2][3]

유방은 최초의 평민 천자이자, 귀족과 달리 혈통의 신화에 매달리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신화가 된 인물이었다.[4] 그의 등극은 중화의 천자[5]가 신성한 하늘의 대리인이 아니라 지상의 정치인이라는, 현대에는 당연한 사실을 처음으로 증명한 사건이었다. 무결의 군주라 칭송받는 상고의 제왕들[6]이 고유의 개성을 지니고 실존했던 인간이라기보다 군왕의 마땅한 덕을 표현하기 위한 이상형, 즉 왕도의 인격화에 가까웠다면, 한고조는 현실에서 집단을 이끄는 지도자의 성공적인 예였다.

2. 군사

흔히 유방은 군사면에서 무능하고 졸렬한 지휘관으로 잘못 간주된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바로 그의 비교 대상이 불세출의 천재 지휘관 한신[7]과 중국사상 최강의 무용을 자랑하는 항우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유방은 지휘관보다는 군주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이러한 편견과는 달리, 유방은 당대 가장 풍부한 경험을 가진 역전의 사령관이었다. 동네 패싸움을 이끌던 불량배로 시작한 후, 공성전, 수성전, 야전 등 다양한 전투를 두루 겪었다. 누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방이 참여한 전투는 "큰 전투만 70회, 작은 전투는 40회"에 달했으며, 역사적 기록을 보면 사령관으로서 참전한 전투만 30 ~ 40회가 있다. 심지어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유방은 장량, 한신을 비롯한 천재들의 조언을 들으며 군사적 역량을 키웠고, 전장에서 진두지휘하여 자신의 이점을 최대한 발휘했다. 아첨과는 거리가 먼 한신이 자신 다음으로 고제를 높이 평가하며 10만의 군사를 지휘할 수 있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8]

유방은 패현에서 봉기한 후에 계속해서 전투를 치렀고, 대부분을 이겼다. 옹치 때문에 풍읍을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이후 진승을 쫓아온 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이로서 성과 사람들을 빼앗아 세력을 불렸고, 결국에는 풍읍을 탈환하기까지 했다.

이후 항량의 휘하에서 반 연합군의 무장으로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항량의 명령을 받들어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한을 동아에서 패배시켰으며, 장한이 추격하던 유방과 항우에게 반격을 시도했지만 또다시 이겼다. 이후 진군의 태세가 바로잡히자 사방에서 봉기군이 패주했고, 유방을 잠시 떠났던 장량마저 격퇴당해서 다시 유방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즉, 과장을 좀 하자면 유방은 항우만큼의 실적을 쌓은 것이다.

항량 사후의 유방은 항우와 쌍벽을 이루는 반진 연합군의 희망이었다. 유방에게 능력이 없었다면 일찌기 초의제와 송의 등 연합군의 수뇌들에게 항우의 대항마로 인정받지도 못했을 것이고, 항우보다 훨씬 먼저 함양에 입성해 진나라의 항복을 받아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전공과 배경이 있기에, 거칠 것이 없던 항우조차 홍문연이라는 무리수를 두고, 일인자로 거듭난 후에도 왕작을 줄 수밖에 없었다.

유방의 군사적 능력은 적어도 장량한신의 영입 이전까지 유방이 거느리고 있었던 부하들의 면면으로 능히 짐작할 수있다. 물론 나중에 천하를 통일하면서 모두 열후에 봉해져 고귀한 신분이 되기는 했지만 당시 유방의 부하들은 하나같이 충직할지언정 소하조참을 뺀 나머지는 출신이 한미하고 재능은 범용한 수준이었다.[9] 그야말로 유방이 지휘를 책임지고 부족한 인재풀로 어떻게든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멱살잡고 캐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원래 돌격대장 번쾌는 개백정, 장궁 담당 주발은 곡소리꾼, 전차 담당 하후영은 마굿간지기, 기병대장 관영은 비단장수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 관직을 해봤다는 참모장 조참이 현청 옥리 출신이었다.[10] 게다가 이들이 이끄는 젊은이들은 거의 패현에서 살던 동네 청년들이었고 이 중에는 정말 무슨 쓸모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고제의 친구라는 이유로 진중에 들어와있던 노관 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 사람들이 아무리 일신의 용력이 뛰어나봤자 전문적으로 무술과 군사학을 배운 정규군에 비할 바가 아닌데 유방은 진나라 관군을 상대로 꽤 많은 승리를 거뒀고 불리할 때도 패망하지는 않았다. 이는 기껏해봐야 일개 동네 청년 회장 겸 동대장에 지나지 않았던 유방 본인의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전공이다.

항우와 천하를 두고 다퉜을 시기에는 최후의 해하 전투를 제외하면 항우를 상대로 이긴 적이 없다시피 하지만, 이는 상대가 동양사에서 손꼽히는 야전 지휘관이자 인간흉기인 항우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항우에게 여러 번 패배하고도 살아남은 건 유방이 유능한 장수라는 증거인데, 항우와 겨루고 살아남은 장수는 유방을 제외하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유방의 비참한 (?) 전적은 전술적 능력 하나로 광활한 중국 대륙을 2년만에 제패한 항우조차 몇 번씩이나 작정하고 달려들어도 못 죽였을 정도로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방증이다. 거기에다가 전략적 목표인 '시간끌기'에 성공해준 덕택에 한신과 팽월이 각각 북방과 초나라 후방에서 큰 부담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최소한 리오넬 메시급의 선수를 혼자 마킹해서 끝내 경기장에서 지워버린 격인데, 이런 활약을 한 선수를 '무능하다'고 주장하는 건 어폐가 있다.

전술이 아니라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유방의 진가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소하 덕에 관중이라는 요충지를 유지하며 항우를 중원에서 붙들고 버텼기 때문이다.[11] 이렇게 본인이 모루를 자청하는 한편 장수들을 망치로 삼아 전쟁을 중국 전체로 확대시킴으로써, 판세를 엄청나게 확대시키고 항우의 대응 역량을 고갈시켰다. 심지어는 항우를 상대하는 일에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자, 팽월에게는 군사를 지원하고 한신에게는 휘하의 으뜸가는 무장이었던 관영, 조참 등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한 번은 항우에게 성고와 형양을 내주고 기신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지만, 항우가 팽월을 잡으려고 출진한 사이에 다시 성고와 형양을 점령해서 판세를 복구했다. 이후 성고와 형양이 항우의 공격으로 많이 상해서 거점으로 사용하기 곤란해지자, 오창을 끼고 있던 광무산으로 본진을 옮기고 산을 방어선으로 삼는 대담한 작전까지 펼쳤다.

유방 덕에 유가와 노관의 지원을 받은 팽월이 보급을 끊고, 한신이 북방을 휩쓸 수 있었으며, 번쾌조참주발을 비롯한 쟁쟁한 장수들[12]이 그의 지시를 받들어 활약을 펼칠 수 있었다. 유방의 장수들이 단독으로 군을 이끌고 다닌 시기는 천하통일 후에 반란 진압을 하던 때였고, 그나마도 영포, 한왕 신, 장도를 비롯한 난적은 대부분 유방의 친정으로 토벌되었다. 즉, 유방의 신하들이 쌓은 전공은 모두 유방의 지휘나 영향력 하에서 거둔 것이었다.

결국 항우는 광무 대치 시점에 이르러서는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항우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관중 방면까지 보급선을 확장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인질극과 저격을 시도하는 등 초조한 심경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용저가 한신에게 격파당하고 북방이 완전히 한신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자신이 내친 한신을 회유하려고 했다. 결국에는 중국을 반으로 나누고 전쟁을 끝내자는 유방의 제안을 승낙하는, 항우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항복에 가까운 결정까지 내렸다.
황제(유방)는 이미 나이가 들어 노쇠해져 싸움을 싫어하니 틀림없이 직접 출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휘하의 장수를 보낼 터. 내가 두려워하는 자가 둘 있으니 오직 한신팽월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이미 죽었으므로 남은 장군 중에는 내가 두려워할 만한 사람은 없다.
회남왕 영포, 반란을 일으킬 때 장수들에게 호언장담하며.

천하통일 후에 벌어진 수많은 반란을 진압한 것 또한 유방이었다. 개국 초기의 반란은 위험하기 마련이지만, 유방은 모든 반란을 제압했다. 유방은 주설이라는 신하가 "시황제가 천하를 정벌할 때도 스스로 나서지는 않았는데, 유방이 자꾸 친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못 미더워서 그러는 게 아니냐?"고 고했음에도 친정을 계속 추진함으로서 이 말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당대에도 이름이 높았던 경포[13]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방은 태자를 보내려 하면서도 찜찜해 했고, 이후 태자가 화를 입을까 걱정한 여후가 울며 사정하자 자기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여후를 달랜 후 결국 친정에 나섰다. 이후 경포는 자기가 두려워한 세 사람 중 하나인 유방에게 수차례 패배한 후에 결국에는 죽임을 당했다. 유방은 자타공인 대부분의 장수보다 한 수 위였던 것이다.

정리하면 유방은 경험과 조언으로 당대 최고 수준의 군사적 역량을 쌓았다. 타고난 군사적 천재라고까지 평가하긴 어려워도, 말 그대로 크고 작은 전투를 평생동안 무수하게 치르며 경험을 쌓은 견실한 지휘관이었다. 대부분의 승리하지 못한 전투에서도 유방의 군은 크게 피해를 입는 일 없이 다음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나아가 유방의 패전은 항우를 상대한 전투를 제외하면 대부분 공성전인데, 공성전은 원래 악명높은 난이도를 자랑한다. 유방이 실패한 공성전은 주로 진나라 관중 가도에 존재하던 성채를 공격하다가 잘 안 되면 물러나서, 일부 군사만 남겨서 견제하는 한편 다음 성을 공격하여 지원을 끊는 식이었다.

2.1. 실책

유방의 군사적 실책은 크게 두 가지가 있으니, 바로 팽성 전투백등산 포위전이다.

유방 인생 최대의 패배인 팽성 전투는 유방의 심각한 오판이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전력을 집결시켰다가 항우에게 군대가 공중분해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크게 혼이 난 유방은 항우의 진가와 자신의 결점을 깨닫고, 전역과 배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등 대전략에서 용의주도해졌다. 실제로 해하 전투에서의 유방은 팽성 전투처럼 제후 연합을 지휘했고, 군정비에서는 한신의 늑장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겪었던데다가, 항우의 파멸이 가시화되어 방심하기 더욱 쉬운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얕보거나 약점을 만들지 않았다. 선봉과 중군 사이의 빠른 연락과 연계, 30만 대군의 원활한 전술적 움직임, 관영을 중심으로 한 기민하고 집요한 추격 등, 유방은 항우라는 난적을 상대로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원껏 발휘했다.

보통 유방을 변호하고자 두 가지 사유를 들지만, 둘 다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는 바로 지위 체계와 기강이 약했다는 것이다. 제후 연합군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한 지휘권 혼란, 지도부의 방심 등 당시의 상황이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이 문제를 방치하고 키운 것이 유방 본인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지휘 체계를 바로잡고 군의 기강을 제대로 정비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군사적 능력이다. 또 하나는 방심했다는 것인데, 전장에서의 방심은 군사적 무능함 그 자체다. 왕이자 총사령관인 유방 자신이 솔선수범했다면 다른 지도자도 대놓고 방종하지 못했을 텐데, 유방이 음주가무를 벌이는 바람에 항우의 공격에 맥없이 당한 것은 유방의 어마어마한 실책이 맞다.[14]

백등산 포위전으로 말하자면 유방이 아무 생각도 없이 포위에 말려든 건 아니었다. 유방은 여러 차례 흉노의 상황을 살피면서 신중한 면모를 보였는데, 묵돌은 일부러 패배하면서까지 유방을 속였다. 간신히 도망친 유방은 자신이 내쳤던 유경을 복직시켜 흉노에 대한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후대의 원소가 비슷한 상황에서 자신의 권력을 위해 전풍을 죽인 것과 비교하자면 유방이 엄청난 대인임이 드러난다.

3. 정치

유방의 정치력은 당대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도 가장 고단수라고 평가받는다. 적어도 거시적인 식견이 눈꼽만큼도 없던 항우에 비해 유방은 몇 배나 앞선 인물이었다.

유방은 거병 초기에 소속을 바꾸면서도 이득을 얻고 자신의 입지를 최대화하며 정치적 능력을 보였다. 첫 두 해에는 경구, 항량, 초의제의 세력을 전전하고[15] 최대한의 실리를 뽑아내 강력한 세력으로 거듭났다. 비교적 늦게 합류한 항량의 기의군에서도 유방은 금세 주동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며, 관중을 놓고 항우와 다툴 때에는 의제의 신하들이 항우는 너무 난폭하다며 그의 대항마로 추천했고, 의제 또한 유방이 항우보다 훨씬 편한 경로[16]를 가도록 배려했다.

또한 본격적으로 패권을 놓고 다투기 전부터 민심을 장악하는 데는 항우보다 훨씬 뛰어났다. 함양에 입성한 후에는 약탈을 금하고[17] 가혹한 법을 없애겠다고 공언하며 진나라의 마지막 군주 영자영이 여생을 조용히 누리도록 배려했는데,[18] 이는 신안대학살을 저지르고 함양에서는 온갖 만행을 부린 항우와 대조된다. 이 둘의 행보를 똑똑히 지켜본 진나라 사람들이 유방을 지지하고 목숨까지 바치며 항우와 싸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예가 이끄는 오월, 파촉의 판순만 일곱 씨족을 비롯한 이민족 상당수 또한 유방이 타국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유방을 지지했다.

이러한 정치적 식견의 차이는 초한전쟁이 발발하자 극대화되었다. 유방은 대전략부터 항우보다는 몇 단계나 우월했다. 항우에게 살해당한 의제를 추모하여 명분을 확립했고, 팽성대전 패배 직후에 영포를 회유했고, 팽월과 연락을 유지하며 노관 같은 지휘관을 보내 지원을 하는 등, 기본적으로 유방은 항우보다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유방의 정치력은 분배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정치의 근본은 바로 분배를 잘하는 것이다. 팽성 전투 이후 항우는 자기 본진이 털렸다는 것 때문인지 미녀와 금은보화를 언제나 진중에 가지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시점부터 측근들의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다. 항우가 일족을 편애한 것도 문제겠지만, 뻔히 보일 정도로 보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인색하게 굴었던 것 역시 불만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반면에 유방은 금은이 쌓일 틈이 없었는데, 모략에든 상참에든 아낌없이 썼기 때문이다. 범증을 제거할 때만 해도 진평에게 금 수천 근을 줬고, 영포를 설득할 때도 엄청난 물자를 예물로 보냈다. 저런 대조적인 면모 때문에 천하통일 후 유방이 고기와 왕릉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자신이 천하를 얻은 이유를 논하라고 하자, 그들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이 바로 "유방은 오만무례하긴 해도 잘 나누지만, 항우는 성격은 어질지만 인색했다"는 것이었다. 사소한 일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챙겼는데, 유태공에게 예법을 지키라고 간언한 신하를 칭찬하며 금 500근을 상으로 내렸고, 죽기 전에는 여후와 신하들이 데려온 의원에게 욕을 퍼부으며 치료를 거부하면서도 금 50근을 주고 돌려 보냈다.

유방은 자신의 부하에게 능력과 성과에 맞는 보상을 가능한 많이 줬고, 때문에 혼란기에 많은 인재를 수하에 모으고 충성을 받을 수 있었다. 초한전쟁기 동안 절대적 충성은 없었다. 그런 사람들은 형양 국경전에서 먼저 죽었다. 소하와 조참은 유방이 지면 반란죄를 덤터기씌울 생각이었다는 언급이 사기에 나오고, 전한 개국공신 중 충신의 대명사로 통하는 진평과 주발조차 고후기까지의 행적을 살펴보면 의문스러운 부분이 많아서[19] 주발은 자기가 옹립한 문제에게 신뢰를 잃고 죽을 뻔했을 정도다. 이런 약삭빠른 인재들이 유방과 항우를 놓고 초한전쟁 내내 주판을 열심히 굴리면서도 끝까지 유방에게 충성한 것이다.[20][21]
諸侯子在關中者,復之十二歲,其歸者半之。民前或相聚保山澤,不書名數,今天下已定,令各歸其縣,復故爵田宅,吏以文法教訓辨告,勿笞辱。民以飢餓自賣為人奴婢者,皆免為庶人。軍吏卒會赦,其亡罪而亡爵及不滿大夫者,皆賜爵為大夫。故大夫以上賜爵各一級,其七大夫以上,皆令食邑,非七大夫以下,皆復其身及戶,勿事。」又曰:「七大夫、公乘以上,皆高爵也。諸侯子及從軍歸者,甚多高爵,吾數詔吏先與田宅,及所當求於吏者,亟與。爵或人君,上所尊禮,久立吏前,曾不為決,甚亡謂也。異日秦民爵公大夫以上,令丞與亢禮。今吾於爵非輕也,吏獨安取此!且法以有功勞行田宅,今小吏未嘗從軍者多滿,而有功者顧不得,背公立私,守尉長吏教訓甚不善。其令諸吏善遇高爵,稱吾意。且廉問,有不如吾詔者,以重論之。
제후의 자식으로 관중에 있는 이는 12년간 요역을 면하게 하고, 돌아간 자는 그 반만 면하게 하라. 백성들이 이전에 난을 피해 혹 산이나 못에 모여 살며 목숨을 보존하다 호적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제 천하는 이미 안정되었으니, 영을 내려 각자 제가 살던 현(縣)으로 돌아가게 하고, 옛 작위(爵)와 전택(田宅)을 돌려주며, 관리들은 법조문으로 그들을 깨우쳐 알려주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백성들이 굶주림 때문에 스스로를 팔아 남의 노비가 된 자는 모두 면(免)하여 서인으로 삼아라.

부대의 관리나 사병 가운데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작위가 없는 자나 제 5급인 대부 작위가 없는 자에게는 일률적으로 대부 작위를 하사한다. 원래 대부 작위를 가진 자나 이보다 더 높은 작위를 가진 자에게는 일률적으로 원래 작위보다 한등급 높은 작위를 하사한다. 또 7급인 공대부 작위를 가지는 자는 일률적으로 식량 및 토지를 받는 대우를 누릴 수 있다. 공대부 이하의 작위를 가지는 자와 친척은 모두 요역에 복무하지 않을 특권을 누릴 수 있다.

공대부와 8급인 공승 이상의 작위는 모두 고급 작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나를 따라서 천하를 탈취한 사람은 고급 작위를 가질 수 있다. 나는 수차례 휘하의 관리들에게 우선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토지와 가옥을 나눠 줘야 한다고 명령했다. 고급 군작과 식량 및 봉록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은 사실 우리의 존중과 예우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많은 관리들은 그들에게 누려야 할 대우를 해주지 않고 있다. 이는 참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진나라가 통치하고 있었을 때 공대부 이상의 작위를 가졌던 사람은 현령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다.
한서》 <고제기>

천하통일 이후에는 부하 중 결격 사유가 없는 자들에게는 일괄적으로 대부 작위를 줬고, 대부 이상의 부하에게는 전부 한 단계 높은 작위를 줬으며, 공대부 이상에게는 모두 식량과 토지는 물론 친척에게는 요역을 지우지 않는 특권을 내렸다. 특히 공대부 이상의 부하는 그만큼 유방에게 헌신한 자들이었기에, 관리들에게 우선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토지와 가옥을 주라며 수차례 명령했고, 이게 잘 되지 않는 듯하자 다시금 시정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렇게 전후에까지 포상에 노력한만큼, 사람들이 유방에게 충성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러한 정치력 때문에 한신이 옛 조나라 땅과 제나라까지 석권했으면서도 감히 유방을 배신하지 못했다는 견해가 있다. 한신 휘하 병사는 전부 유방을 우러러봤고, 인재는 괴철을 제외하면 전부 유방이 보낸 유방의 사람[22]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3.1. 애민

함양 입성 뒤의 공약과 미앙궁에 대한 일화에도 드러나듯이, 유방은 평민 출신 황제답게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싫어했다. 진나라의 법을 거의 그대로 쓰기는 했지만, 죄를 지은 자는 최대한 무겁게 처벌하던 진나라의 체제와 달리 처벌하더라도 범죄자를 최대한 가볍게 다루는 정책을 세웠다. 또한 백성들의 삶도 개선했다.[23][24]

우선 세금 부담을 크게 줄였다. 관리들이 항상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한다고 하여 해마다 바치는 공물을 단 한 번으로 줄였고, 그 양은 63전 이상이 되지 않게 하였다. 이마저도 너무 높다며 계속 줄이려고 했다. 금제 또한 줄였으며, 전조는 15분의 1로 경감했다. 무엇보다 귀족이 피지배층의 재산을 강탈하는 관습과 제도를 많이 제거해서, 황족과 귀족조차 재산을 잃으면 몰락하기 시작했다.

유방은 특히 요역을 싫어했다. 애초에 요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난세에 발을 들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건수만 생기면 요역 면제권을 가족 단위로 뿌렸고, 아이를 낳은 사람은 2년 동안 모든 요역에서 면제하자는 정책을 내기도 했다. 또한 군대 일에 노역을 제공하면 2년 동안 조세를 거두지 않았고, 군졸로서 종군한 자의 집에는 1년간 부역을 면제했으며, 23세가 되어서야 조세와 군역 대상인 부적에 올리게 하였다.[25]

유방의 관대함은 하층민과 범죄자들도 빠뜨리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터전을 잃어버린 유랑민들을 돌려보내고, 혼란 중에 노비가 된 사람들에게 해방령으로 자유를 줬으며, 잊을 만하면 사면령을 내렸다.

4. 용인술

"군막 안에서 계책을 짜서 천 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라면 나는 장량만 못하다.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다독거리고, 먹을 것을 공급하되 식량 운송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몰아 싸웠다 하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는 것이라면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들이다. 내가 이들을 기용할 수 있었고,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다. 항우에게는 범증 한 사람 뿐이었는데 그마저 기용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내게 붙잡힌 까닭이다."
《사기》 권8 <고조본기>(高祖本紀), 5년 5월 기사

지략으로 뛰어난 범증, 무력으로도 상위권인 경포, 본래 초 밑에서 일했지만 푸대접으로 한으로 가 천하통일을 실현한 한신 등등 자신의 휘하에 있던 쟁쟁한 인물들을 본인의 부족한 용인술로 대부분 잃은 항우와 달리 유방은 사람을 적재적소 쓸 줄 알았다. 난세에 인재를 기용하고 동고동락하여 천하를 통일한 것은 엄연한 유방의 업적이다. 유방은 인재 운만 좋거나 패현은 영웅들의 동네였다는 농담이 사실이었다면, 같은 패현 출신이었으며 유방보다 월등한 입지를 지녔었던 왕릉이 유방의 신하가 되고서야 이름을 떨친 점을 설명할 수 없다.

유방은 인재를 대하는 태도부터 항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속이 있었다. 항우는 명문 귀족 가문 출신답게 겉으로는 예법과 귀족의 품위에 따라 예의 있고 다른 사람들을 공경했지만, 실제로는 타인을 무시하며 존중하지 않았다. 항우 측 핵심 인물인 용저종리말 등마저 눈물을 흘리며 범증에게 항우는 자신들을 높이 사지 않는다고 호소할 정도였다.[26] 반면에 유방은 겉으로는 사람을 하찮게 대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남을 무례하게 대하는만큼 남들이 자신을 무례하게 대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역이기와 같이 정론으로 반박하면 오히려 존중했으며 옹치처럼 혐오하는 사람까지 기꺼이 기용했고, 하층민이나 한신처럼 사회적으로 비참한 사람이라도 옳거나 능력만 있으면 크게 중용[27]했다. 또한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를 잘했는데, 일례로 항우한테 전향한 전적이 있는 위표를 다시 장수로 삼았다.[28]
"이 어르신(乃公)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시서(詩書)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육생이 대답했다.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고제(유방)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나를 위해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잃었고, 내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으며, 과거에 나라를 얻은 일, 잃어버렸던 일을 글을 지어 올려주시오."
사기》 <역생 육가 열전>

또한 유방은 거칠어도 올바른 직언은 받아들였다. 유방의 신하들은 유방에게 충고하며 유방은 무례하다, 어린아이 같다, 짐승만도 못하다, 걸주 같다,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식으로 그를 구박했다. 유방의 세력은 숙손통이 예법을 세우기 전까지는 황궁에서 칼질을 했을 정도로 막 나갔다는 것을 고려하면, 사관이 에둘러 기록하기 전에는 거의 폭언에 가까운 발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방은 그런 말을 들어도 화를 낼지언정, 올바른 비판은 경청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했다. 자신에게 충고한 아랫사람이 욕을 좀 했다고 사람을 삶아 죽이거나 목을 친 항우와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우리 자신이 살며 면전에서 단점을 지적하는 말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기껍게 받아들인 적이 얼마나 있는지 돌이켜 보면, 최고의 자리에서 저런 충고를 거듭 수용한 유방은 실로 대단했다.

이렇게 충고를 듣는 태도는 용인술과 직결된다. 아무리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도 충고와 제안을 받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한 비판을 수용할 줄 안다는 것은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한신이 유방과 대화하며 항우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냐고 묻자, 자신은 항우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다고 깨끗하게 인정했다. 유방은 아돌프 히틀러 같은 독선적인 지도자가 자주 드러내는 아집, 자만심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나아가 유방은 인재들의 반목하는 의견을 비교하고 가장 좋은 것을 고르는 식견까지 지녔다. 타인의 말을 잘 듣기만 하는 사람은 비판을 잘 수용하는 게 아니라 귀가 얇을 뿐이다. 이는 역이기와 장량의 의견을 듣고 후자의 말을 바로 따른 예시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태도는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거나 회유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몇몇 핵심 인재만 봐도 소하조참은 진나라의 관리라고는 해도 각각 서기와 옥졸에 불과했고, 장량은 진시황 암살 기도를 주도할 정도의 저력이 있던 망국의 귀족이었으며, 한신과 진평은 본래 항우 휘하의 사람이었다. 나머지 공신들도 천하통일 후에 공을 다투며 칼로 기둥을 찍을 정도로 거친 자들이었다. 유영이 경포 토벌의 임무를 받을 기색이 보이자, 여후가 '유방의 장수들은 양처럼 온순한 태자의 말을 들을 리가 없으니, 차라리 유방이 병든 몸을 이끌고 출진해 마차에 누워 있는 것만 못할 것이다' 라며 유방을 뜯어말린 데는 이유가 있던 것이다.

이렇게 유방이 용인술과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끌어들인 인재들은 특히 형양 · 성고 전역에서 저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유방을 살려낸 기신, 반 항우 세력을 만들어 항우의 여력을 분산시킨다는 대전략을 제시한 장량, 영포를 회유한 수하, 하북을 평정하는 한편 위표와 용저의 군을 섬멸해 대세를 결정지은 한신, 항우의 보급로를 계속 끊은 팽월, 범증을 제거한 진평, 오창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전황을 유리하게 이끈 역이기, 그리고 보급과 기반을 제공한 소하. 이러한 수많은 인재를 기용하고 그들의 조언을 수용한 덕에 유방은 팽성에서의 패배를 딛고 전황을 뒤집을 수 있었다. 또한 유방 본인은 부하들이 활약을 펼치도록 배려하는 한편 항우를 상대로 대치했는데, 본인이 노력하는 대신 숟가락만 얹으려고 했다면 진승[29]처럼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천하통일 후 《고문원》(古文苑)에 실린 수칙태자문(手敕太子文), 즉 유방이 유영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지은 글에서는 유방의 이러한 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내가 난세를 만나 진나라가 학문을 금하자, 스스로 기뻐하여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되고 난 뒤로부터 비로소 때때로 책을 살펴보았는데 글 쓴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에 비추어 내가 옛날에 행동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니 옳지 않은 일이 많았다."[30]

유방의 인재를 보는 눈은 죽는 순간까지 건재했다.
"왕릉으로 하시오. 그러나 왕릉은 우직하므로 진평으로 하여금 돕도록 하시오. 진평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그렇다고 그에게 모두 맡기지는 마시오. 또한 주발은 행동거지가 무겁고 믿음직하오. 비록 배운 바는 부족하지만 장차 유씨 왕조를 지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주발일 것이오. 그를 태위로 삼으시오."
소하조참이 죽는다면 그 후임 재상들을 어떻게 임명하면 좋겠냐는 여후의 질문에 답하며.

유방 사후 왕릉은 여씨의 전횡에 항거했으며, 진평은 여씨와 적당히 타협하는 척하며 정국을 안정시키는 한편 여후 사후에는 주발에게 군권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주발은 군권으로 여씨를 숙청하여 유씨 왕조를 안정시켰다. 죽는 순간까지 부하들을 정확하게 평가한 유방의 안목이 돋보인다.

한신을 추천한 건 소하이니 유방은 인재 보는 눈이 형편 없었다고 비하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는 굉장히 단편적인 시각이다. 인재는 인재를 부르는 법이다. 이런 논리면 순욱 덕에 당대의 명참모를 줄줄이 등용한 조조의 인재 감식안은 형편없었다는 소리가 된다. 또한 한신은 진가를 알아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고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초군에서조차 찬밥 신세였는데, 심지어 범증조차 한신을 추천하지 않았을 정도다.[31] 소하도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한신의 능력을 파악했다. 게다가 유방은 하후영의 추천을 받자 한신을 치속도위, 즉 보급을 총괄하는 핵심 관리로 임명했었다.

4.1. 토사구팽?

유방은 몇몇 공신을 숙청한 것 때문에 토사구팽으로 악명이 높은 편이다. 이러한 악명 탓인지 유방이 토사구팽의 선례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토사구팽 항목에 나왔듯이 춘추전국시대 월왕 구천 관련으로 처음 나온다. 당시에 그러한 속담이 돌았다는 건 그 이전에도 기록되지 않은 사례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세히 고찰하면 유방에게도 억울한 면이 많다. 토사구팽이라고 나열되는 예시의 상당수는 정말로 죽을 죄를 지은 경우거나 유방 사후에 여후의 손에 죽은 것이다. 유방은 설사 신하를 제거하더라도 책임자와 가족만 사형시켜 사건의 파장도 최소화했다. 후대의 홍무제, 영락제 같은 피의 군주들과 비교하면 토사구팽의 대명사라 불리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유방은 부하를 의심할지언정 능동적으로 숙청을 한 적이 없으며, 신하가 용서를 빌거나 기개를 보이면[32] 어지간하면 용서했다. 여러 허물이 있던 노관이 유방에게 용서를 빌려다가 그의 사망 소식을 듣자 바로 흉노에게 의탁한 데는 이유가 있던 것이다.

또한 전한 초기의 공신들은 숙청의 공포에 떨면서 살기는 커녕 굉장한 우대를 받으며 그만큼의 충성심을 보였다. 일례로 전한 초기의 승상과 상국은 모두 공신이었으며, 한문제 대에 와서 대부분의 공신들이 늙어죽자 신도가라는 대단하지 않은 공신을 승상 자리에 앉혔고, 문제는 이런 미약한 자조차 굉장히 정중하게 대우했다.[33] 여후의 난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던 진평과 주발 등도 공신이었는데, 만약에 유방이 진짜로 공신을 무분별하게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펼쳤다면 이러한 충성스러운 신하도 없었을 것이다.

토사구팽하면 언급되는 한신, 팽월, 영포등은 일단 죽을 만해서 죽었다. 한신은 공명심 때문에 이미 항복한 제나라를 공격하여 공신이자 참모인 역이기를 죽였고, 항우와 힘겹게 대치하던 유방한테 제나라 왕을 시켜 달라[34]고 요구하며 태업하기까지 했다. 팽월 또한 해하 전투 때 움직이지 않다가 유방 쪽에서 후한 보상을 약속해서야 군을 움직였고, 왕이 된 후에는 세금 및 공물 납부를 게을리하며 노쇠를 핑계로 황제에게 예를 올려야 하는 의무도 저버렸다.[35] 영포는 아예 황제 해보고 싶다고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유방은 한신과 팽월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한신은 회음후로 강등하는 선에서 그쳤고 팽월은 반란죄로 죽을 뻔했던 것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끝내려고 했다. 저 둘은 죽인 것은 여후였다.

설령 유방이 능동적으로 토사구팽을 주도했더라도 그것을 무작정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일단 유방 본인부터 제후왕에서 패자로 발돋움한 경력을 지녔으니 잠재적 불온분자를 견제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또한 기나긴 난세 끝에 찾아온 평화를 권신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옹치를 제후로 세우고 숙손통으로써 예를 일으키기 전에는 권신들이 공을 다투며 왕궁에서 칼부림을 해서 기둥에 칼자국을 남길만큼 권신의 횡포는 심각했다. 유방 생전의 한나라는 완성된 통일제국인지 확신할 수 없는 단계에 있었다. 진 제국은 3대도 못 갔고, 의제와 항우가 다시 세운 초나라조차 몇 년을 버티지 못했다. 즉 유방은 춘추전국시대에 쉼표를 찍을지, 마침표를 찍을지의 기로에 놓여 있었고, 공신 숙청은 마침표를 택하여 한나라라는 새로운 장을 확고히하는 방침이었다. 유방이 권신을 잡는 선례를 세운 덕에 제후왕의 궐기는 개국 후 한참을 지난 한경제 시절에서야 오초칠국의 난으로 표면화되었고, 이를 성공적으로 제압함으로써 전한은 군현 제도를 확립하고 고대의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왕망을 쓰러트린 후한의 광무제가 공신과 척신을 쳐내지 않은 것이 결국 후한의 쇠퇴를 부른 것을 감안하면, 토사구팽은 신 왕조의 입장에서는 장기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당태종 이세민도 옛날에는 한고제가 공신들을 토사구팽하는 잔인한 군주라고 생각했지만, 황제가 된 후 휘하 공신들의 언행을 보니 한고제의 심정을 이해했다고 말했다.

5. 성격

사서에서 드러나는 면모를 보자면, 귀공자 같은 항우와는 달리 유방은 스스럼없고 직선적이며 괴팍한 성격을 상대를 가리지 않고 드러냈다. 스스로 3인칭으로 언급하는, 신분 사회에 맞지 않는 파격적인 언행이 좋은 예시. 이런 면모는 일개 건달이 황제가 되는 입지전적인 서사에 인간미를 더한다.

5.1. 상남자

그가 감문(문지기)에서부터 일개 수졸을 볼 때마다 그 대하는 태도는, 흡사 옛날의 친구를 만나 대하듯 하는 것이었다.
자치통감》 12권 中

유방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남자다웠다. 일단 상대가 누구든 일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유방은 유명인사, 세력가, 유력자는 무례하게 대했지만, 부하들 또한 계급에 상관없이 자신의 옛날 친구나 되는 양 스스럼없이 대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상대가 누구든 평등하게 대했다는 말이다. 유방의 일관적인 태도는 난세에 의지할 곳을 찾던 사람들에게 그릇이 크다는 인식을 심어 줬을 것이다. 황제가 된 후에도 딱히 자격지심을 드러냈다는 기록은 없는데[36], 이는 탁발승 시절의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발작을 일으키다시피 했던 홍무제와는 대조되는 성격이다.

유방의 대범한 성격은 거병하기 전부터 드러났다. 술집 주인이 자발적으로 외상 장부를 찢어 버릴 정도로 무뢰한들과 친하게 지내며 함께 몰려다녔고, 진시황릉 노역에 끌려갈 인원들이 탈주하기 시작하자 술을 마신 후 느닷없이 전부 해산시키키도 했다. 유방의 처지에 놓인 사람은 의지할 공범자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꼬드길 생각을 하지, 회유조차 하지 않고 전부 해방시킨 후 혼자 떠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끌려가던 사람들이라고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결국 열 명씩이나 유방을 따르기 시작한 데에는 이런 화끈한 면모도 한몫했을 것이다.

초나라 귀족 출신이라는 배경 덕에 예법으로 사람을 대한 항우와는 달리, 유방은 언행이 방자하며 성질을 자주 부리고 욕을 엄청나게 많이 했다. 최대한 점잖게 서술했을 사기마저 유방의 욕을 열두 건이나 기록하는데, 한신, 왕릉, 소하 등이 지적한 사실이 암시하듯이 고대 중국에서는 심각한 결점이었다. 유방은 실제로 이 습관 때문에 상당히 손해를 봤는데, 유방의 욕설을 배신의 명분으로 삼은 위왕 위표와 분노해서 유방 암살 음모를 꾸민 부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조왕 장오가 대표적이다. 다만 화끈한 성미만큼이나 뒤끝이 없었고, 용서하거나 베풀 때에는 확실하게 행했다. 한신에 대한 추천을 들을 때마다 치속도위와 대장군으로 임명한 것, 현상금까지 붙이며 계포를 수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합리적인 변호를 듣자마자 바로 용서하고 낭중으로 임명한 것, 그리고 반란을 막기 위해 배신자 옹치에게 포상을 내리고 후하게 대접한 것과 해하전투 이전 한신, 영포, 팽월에게 독립왕국을 인정하는 수준의 분봉이 좋은 예다.

또한 성질을 자주 부리기는 했지만, 올바른 간언을 듣는 순간에는 웬만하면 노하지 않았다.[37] 소하는 평소에 오만하고 무례하다고 지적했고, 왕릉은 항우만도 못하다고 박하게 평가했고, 진평은 유방이 욕하고 천박하게 행동하니까 부패인사들이 몰려든다고 지적했으며, 주창은 걸주 같다는 욕을 말을 면전에서 했다. 그런데도 유방이 화를 냈다는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주창의 경우에는 웃어넘겼다고 한다.[38] 이런 화통한 면모는 측근에게만 제한되지 않았다. 생면부지의 제나라 평민 누경이 한나라가 덕망 높은 주나라를 따라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으니 도읍을 바꾸라는 제안을 결국에는 받아들인 후, 누경에게 상으로 자신의 성을 하사했다.

그리고 배짱도 두둑했다. 팽성에서 대패한 뒤 오히려 사방을 공격해 순식간에 배신자를 소탕하거나, 맨몸으로 한신의 진영에 잠입해 군사를 빼앗거나, 아슬아슬한 상황인데도 군사를 쪼개서 팽월을 지원하는 등,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빠르게 결정하고 이루기 위해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다. 항우와 대치할 때는 항우의 쇠뇌에 가슴을 맞자 자신의 발을 쓰다듬으며 항우에게 버릇없다고 꾸짖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이후 장량이 유방에게 순찰하여 사기를 유지하라고 충고하고 유방이 이를 실행에 옮기다 죽을 뻔한 것을 보면, 유방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을 본 유방의 군대가 엄청나게 흔들린 듯하다. 유방은 이를 간파하고 허세를 부린 것이다.

다만 젊은 시기를 한량으로 지낸 시절이 많아서인지 은근 쪼잔한 면도 없진 않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예시가 있다.

5.2. 가족

너와 나는 같이 북면을 하고 회왕에게 명을 받았고, 약속하여 형제가 되었으니, 나의 아버지가 바로 그대의 아버지다. 반드시 팽하려거든 나에게 국 한 그릇이나 나누어주면 좋겠다!

생애 문서의 관련 단락에도 나왔듯이, 난세에 발을 들이기 전의 유방은 골치덩어리 그 자체였다. 초한전쟁 도중에도 항우가 유방의 부친 유태공으로 인질극을 벌이자, 희대의 패드립으로 응수하며 부친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이 좋은 예.

그래도 황제가 된 이후에는 가족을 나름 극진하게 대우했다. 유태공과 닷새에 한 번 만나며 평민처럼 편안하게 놀았는데, 보다 못한 유태공의 집사가 예를 갖추는 게 좋지 않겠냐며 유태공에게 간언했을 정도였다. 또한 서경잡기에 따르면, 유태공은 장안의 궁궐에서 융숭히 대접받으면서도 우울해 했다. 평민 출신의 유태공은 적막한 궁궐 생활이 불편했던 것이다. 이를 안 유방은 아버지를 위해 장안 근처에 신풍이라는 마을을 지어 고향 풍읍의 사람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고, 유태공도 이를 매우 기뻐했다. 또한 아버지가 간청하자 툴툴거리면서도 조카인 유신에게 갱갈후라는 작위를 주기도 했다.
한낱 짐승 새끼들도 제 자식 귀한 줄은 압니다. 그런데 폐하께선 도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팽성대전에서 참패하고 도주하던 유방이 마차 속도를 높이려고 자기 자식들을 몇 번이나 달리는 마차 밖으로 던지자 마차를 몰던 하후영이 노하여 유방에게 했던 말.

유방은 모범적인 가장 또한 아니었다. 위에서 나왔듯이 항우에게서 도망치던 중에 장녀 노원공주와 후일 태자가 되는 장남 유영을 버리려고 했으며,[40][41] 여색을 밝혀 여후가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백등산 포위전 이후에는 이미 결혼한 노원공주를 묵돌에게 주려고 했다. 물론 이건 자신이 처음에 간언을 하는 유경을 무시하고 흉노에게 참교육을 당하고는 시정하고자 유경의 계책을 따르려 한 것이기는 하다. 결국은 사정사정하는 여후를 못 이기고 다른 딸을 줬다.

자신의 가족은 박하게 대했으면서 정작 외척인 여씨 일족은 제대로 견제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듣기도 하는데, 사실 외척은 유방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유방은 제후왕 숙청을 끝내자마자 죽어서 미처 여씨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유방이 죽은 이유 자체가 경포와의 싸움에서 맞은 화살 때문이었다. 실제로 유방은 죽기 직전에 여씨 일족의 강력한 우군인 번쾌[42]를 참수하라며 외척을 제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또한 여씨 일족은 유방 본인이 아니라면 누구도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여후는 유방의 정실이었다는 막강한 정통성을 가졌었고, 설령 여후와 그녀의 친족을 제거해도 유영이 삐뚤어지고 신하들이 피를 볼 가능성도 있었다.[43]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외척을 몰살시킨 신하들조차 여후 본인의 명예를 훼손하지는 못하고 여씨의 만행을 전부 그녀의 일족에게 뒤집어 씌웠으며, 여후 본인의 명예는 후한 성립 후, 즉 전한 건국으로부터 200여 년이나 지나서야 떨어졌다.

6. 총평

한고조는 참으로 고집 센 사람이었다. 그러나 기회를 틈타고 신속히 변화하는 신묘함은 용이나 호랑이도 그에게 미칠 수 없었다. 그가 형양(滎陽)에서 패하고는 홀연히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가서 한(漢)나라 사신이라 일컬으며 조(趙)나라 성으로 달려 들어가 군리(軍吏)를 바꿔 세웠지만 한신(韓信)과 장이(張耳)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한신이 제나라를 점령하고서 제나라의 임시 왕이 되겠다고 하자, 고조는 그가 보낸 사신을 뜰에 엎드리게 하고는 크게 노여워하며 욕하고서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런데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고조의 발을 밟아 제지하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간청하자 갑작스레 다시 꾸짖기를

"대장부가 왕이 되려면 진짜 왕이 되어야지 어찌 임시 왕이 되려 하는가."
하였다. 말을 민첩하게 바꾸는 것은 장량과 진평도 그만 못하였다.

또 고조는 광무(廣武)에서 가슴에 화살을 맞았으나 발을 문지르면서
"저 놈이 내 발을 맞췄다."

하였다. 이는 소열제(昭烈帝)천둥소리에 임기응변한 것과 거의 같다. 이런 임기응변이 있었기에 많은 책사를 굴복시키고 강한 적을 이긴 것이다. 소하, 한신, 장량, 진평이 모두 천하의 영웅이고 재주와 지략이 모두 고조보다 나았지만 기꺼이 고조의 신하가 된 것은 다 까닭이 있다.
청성잡기》의 저자 성대중
인류 역사상 가장 선견지명이 있고 영향력 있는 정치인은 로마 제국을 세운 율리우스 카이사르한나라를 세운 유방이다.
아놀드 토인비

유방은 우수한 군사적 역량과 통치력과 용인술을 갖춘 군주감이었다. 물론 단점이나 실수가 없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고 시정할 줄 알았다.

최초의 평민 출신 군주로 즉위한 유방은 중국사, 나아가 동양사를 바꿨다. 한나라를 탄생시키고 기반을 다져 진나라처럼 온 천하의 욕을 다 처먹으며 허무하게 무너지는 일을 막았고, 덕분에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을 통틀어 426년의 역사를 이어가며 분열된 중국을 하나의 중국으로 만들었다. 사회, 문화, 인종, 외관이 달랐던 중국인들이 차이를 뛰어넘어 하나가 되어갈 실질적 계기를 제시한 것이다. 또한 한나라의 유교,[44] 군현 제도, 율령 등은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유방은 중화를 시작한 최초의 중화인이라 칭해도 지나치지 않다. 항우는 봉건제 선호에서 드러나듯이 최후의 전국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완전히 대조적이다.


[1] 오호십육국시대 최고의 명군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2] 정작 이와 같은 대인의 풍모가 군주로서 천하 대사를 위해 때로는 숙이고 뒤통수치는 선택을 내리게 하여 비열한 모습에 일조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부분이다.[3] 그리고 이런 대인과 같은 모습은 아래에 서술되는 용인술, 정치적 능력을 비롯한 수많은 것들에 상당부분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귀를 열어두고, 편견에 마냥 휩쓸리지 않고, 불쾌하게 말해도 그 말에 악의가 아닌 옳지못함에 대한 분노나 상황에 대한 다급함이 느껴지면 새겨들으며, 남들의 소리에 크게 연연하지않고 자존감이 높은 등 그릇자체가 방대하게 넓었기 때문에 아첨꾼들이 쉽게 달라붙지 않고 자신의 능력이나 뜻을 펼치려는 자들이 유방을 따르게 되고, 그렇게 그들을 기용한 경험이 쌓여 용인술의 대가가 되었으며,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실익을 좇았기 때문에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한신에게 "가왕이라니? 진짜 왕을 해야지!"라는 탁월한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만드는 것과 같이, 단순히 군주로써 자질이 있다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닌 유방 개인의 능력 자체가 전체적으로 후한 평가를 받게 만들 수 있는 요인인 것이다.[4] 춘추전국시대의 왕통들은 족보를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후직이니 백익이니 하는 실존여부도 불명확한 상고시대의 성인들에게로 소급되며, 그들의 정통성은 그로부터 나왔다. 이는 시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방은 시골 촌구석 평민의 자손이었으며, 굳이 조상에 연연하지 않았다. 사서에는 용의 아들이니 적제의 아들이니 하는 노골적인 신격화용 뻥이 첨가되어 있지만, 그 내용을 적은 《사기》조차 유방의 친부인 유태공을 뻔히 드러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당대 누구도 고조가 신의 자손이라고 진지하게 믿지 않았다.[5] 유방은 시황제 이후 실질적인 두 번째 천자라고 보는 것이 맞는데, 그 시황제도 하늘이 내린 신성한 황통 따위와는 거리가 멀고 약육강식의 시대에 힘으로 중원을 통일하여 황제가 된 것이다. 황제가 천자다라는 개념은 유방 본인이 세운 한 왕조 이후에 정립된 것이다,[6] 문명의 건설자인 삼황오제, 성군의 대명사인 당요우순, 황하의 물길을 정비해 본격적인 세습왕조를 세운 대우, 최초의 역성혁명가이자 상 왕조의 창업자인 성탕, 3대에 걸쳐 주 왕조와 고대 중국 봉건 제도의 기틀을 세운 문왕, 무왕, 주공단 등. 삼황오제쯤 가면 명백하게 신화의 인물이고, 역사적인 입법자로 인정받는 탕 이후의 지도자들도 여러 윤색을 거쳐 사실상 전설의 영역에 반쯤 걸치고 있다.[7]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인정받는 군사 천재인 한신만 못하다는 건 유방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아니다. 또한 한신은 북벌 때문에 팽성 전투부터 해하 전투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항우를 직접 상대한 적이 없었다. 유방 대신 항우를 상대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는 아무도 모른다.[8] 이 대목에서 제 주군이자 통일 왕조의 황제인 유방을, 제후국의 왕임과 동시에 황제의 신하인 자신보다 아래로 평가한 한신이 얼마나 도도하고 패기 넘치는 성격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9] 그 소하와 조참도 - 나중에 거대 제국의 승상이 되긴 하지만 - 원래는 그냥 지방 하급 관리와 옥졸에 불과했다.[10] 인터넷에서는 종종 이들을 각각 동네 정육점 주인, 장의사, 운전직 공무원, 동대문 옷가게 사장, 교정직 공무원에 비유하고는 하는데, 전혀 과장이 아니다. 해당 직종의 사람들이 무시받을 이유는 전혀 없지만, 이들이 군사 전문가들은 아니다. 이미 고대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겪으면서 군사 방면에 치밀한 체계를 완성했고 대대손손 장군을 배출한 군인 가문이 즐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전문가들을 이끌고 천하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물론 이들도 난세에서 살아남아서 결국은 군사 전문가가 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들은 군략에 대해 이론부터 배운 적은 없었다.[11] 그리고 항우는 홍문관 이후로는 아예 관중 땅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고제의 군대를 완전히 박살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대로 군대를 밀고 가봤자 보급을 받을 길이 없는 상태에서 양쪽으로 샌드위치가 되었을 것이 뻔했기 때문.[12] 주발은 강궁병, 번쾌는 돌격대, 관영은 기병대에 특화된 지휘관들이었다.[13] "경포의 용병이 뛰어나 백성들이 두려워한다.(布善用兵, 民素畏之)", "천하의 명장으로서 전투에 뛰어나다.(黥布, 天下猛将也, 善用兵)", "제후들 가운데 공은 으뜸(功冠諸侯)"이라는 표현이 《사기》에 기록된 경포에 대한 평가다.[14] 다만 유방의 실책 못잖게 항우의 무시무시한 기동전 능력도 고려해야 한다. 애시당초 항우의 3만 군대에 기습을 당했을 때도 항우가 말도 안 될 정도로 신속하게 공격했기 때문에 방심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15] 이 부분에 유방의 잘못은 없다. 원래 풍읍에서 배신당하고 살기 위해 경구를 섬기러 찾아갔는데, 그 사이 경구가 항량에게 망하는 바람에 항량을 섬기게 되었던 것. 이후 항량이 의제를 옹립하면서 의제의 신하가 되었다.[16] 당시 함양으로 가는 길은 함곡관으로 가는 길과 무관을 통해 가는 길이 있었는데, 함곡관에는 험난한 지형에 진나라의 정예가 모여있었지만 무관은 덜 험난하고 군사적으로도 더 쉬웠다. 관중왕을 위한 속도전에서 이러한 인선을 배정했다는 것은 의제의 의중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당장 하북에는 장한이 있었고, 하남에는 장한이 없었다. 정말 편하게 갔던 것이다.[17] 별개로 소하는 진나라 승상부와 어사부의 문서들을 모두 수집하여 보관했다.[18] 이세황제에 대한 반감과는 별개로 영씨 황족들에 대한 지지는 확고했다. 때문에 진승과 오광은 진시황의 장남인 부소를 자칭했고, 조고도 자영을 황제로 세워야 했다.[19] 여후가 장안에서 무소불위의 위치가 되게 만든 군사와 문고리 권력 이 두가지 모두 진평과 주발에 의해 양도되었던 것이고, 심지어 황제인 전소제가 여후에 의해 끌어내려져 죽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신하들의 반응으로 나오는 건 '조정 중신들이 한 마음으로 태후의 결정에 찬성했다' 는 언급 뿐이다. 여씨의 난 당시의 행적도 <제도혜왕세가> 쪽에선 또 약간 말이 다르게 나온다.[20] 반론하자면 소하와 조참은 유방에게 반란죄를 덤터기씌울 생각을 한 시점에는 유방의 신하가 아니나 진나라 관리였다. 현령만으로는 도저히 패현을 지킬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유방을 끌어들였는데, 당시 유방은 일개 도적이었다. 진평과 주발로 말하자면 그들은 여후 집권 당시에는 군권이 없었다. 여씨가 군권을 장악하고 그들의 수장인 여후에게는 태후로서 정통성이 있었기에, 진평과 주발은 둘째치고 유씨 제후마저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21] 물론 여후도 이런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전소제가 성장하기 전에 그를 모살하고 후소제를 세우는 식의 꼼수를 부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여후 자신의 수명은 어쩔 수 없었기에 여후 사후에는 명분이 사라졌고 공신과 유씨들이 힘을 쓸 수 있게 된 것.[22] 대표적으로 조참, 장이, 관영이 있다. 조참은 소하와 더불어 거병 초기부터 유방을 섬긴 측근이었다. 장이는 유방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진여가 장이의 목을 내주면 군사를 원조하겠다고 유방에게 제안했는데도, 유방은 장이를 살리는 것을 택하고 비슷하게 생긴 사형수의 목을 보내 진여를 속였다. 관영은 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용맹을 떨쳐 유방의 눈에 들었다. 이런 사람들이 유방을 배신하고 한신에게 붙는다는 것은 택도 없는 말이었다.[23] 사실 진나라의 법 체계는 멀쩡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양산하는 체제에 가까웠다는 문제가 있었다. 당장 상앙은 새로운 법을 내놓고는 법에 대해 혹평하는 이도 호평하는 이도 전부 처벌했을 정도.[24] 사실 어차피 제국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진나라의 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이유도 없었다. 다만 사람들이 워낙 진나라의 엄격한 법에 시달린 터라 이에 대처하기 위해 임시로 약법 삼장을 내세운 거고 나중에 가면 진나라 법을 참고해서 법을 만들었지만 엄격하지는 않게 시행했다.[25] 이 마지막 법안은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바람에 곧 사라졌다. 당시에는 현대와 같은 의무교육 제도 같은 건 없었을 때라 보통은 10대 중후반에 결혼해서 사회생활을 했다. 30대에 주민등록증을 발급시키는 것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26] 나중에 용저, 종리말, 계포 같은 핵심 인물들에게는 사과하기는 했지만, 한신 같은 인물에게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27] 대표적인 사례가 한신으로 초한지 등 소설에서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장량의 증표를 능력을 보여준 뒤 제시하여 총대장이 되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를 보면 알듯이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군서열 1위 총대장 직위를 주는 대담함 자체가 유방의 사람보는 눈이 대단하다는 것이다.[28] 그러나 위표는 총대장을 맡고 졸전으로 말아먹은 것도 모자라 다시 항우에게 전향하며 배신을 때렸음에도 작위만 빼앗는 조치로 살려보냈다.[29] 거병 후 눈에 띄는 군공도 세우지 못하면서 욕심을 앞세워서, 인망을 잃고 숱하게 배신을 당하다 끝내 부하의 손에 죽었다.[30] "吾遭亂世,當秦禁學,自喜。謂讀書無益。洎踐祚以來,時方省書,乃使人知作者之意,追思昔所行,多不是"[31] 범증이 한신을 추천했다는 말은 사기에선 나오지 않는 야사다.[32] 좋은 예로 괴철과 장오의 가신 관고가 있다. 백등산 포위전에서 패해 화가 났던 유방이 조나라 왕이자 첫째 딸 노원공주의 남편인 사위 장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무례하게 굴었는데, 관고는 이를 보고 격분하여, 유방을 암살을 획책하다 잡혔다. 관고가 모진 심문에도 기개있는 모습을 보이자, 유방은 관고를 석방하고 장오를 조나라 왕에서 해임하는 정도로 처벌을 끝냈다.[33] 문제의 신하 중에 등통이라는 자가 문제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 등통이 문제의 세를 믿고 신도가에게 무례하게 굴어서 신도가한테 처형당할 뻔했다가 문제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34] 당시 유방은 칭제하지 않았기에 직위는 한왕이었다. 즉 한신의 부탁은 결론만 놓고 보면 둘을 일시적으로나마 대등하게 만드는 것이었다.[35] 사실 이는 역심이 있다고 의심해도 이상하지 않은 짓이었다. 이후 팽월은 아랫사람의 참소를 받아 죽는데, 이렇게 죽을 이유를 미리 쌓아놓지 않았다면 있기 힘든 일이었다.[36] 황제가 된 후 자기 고향의 세금을 깎아주고 자주는 아니지만 고향에 방문하기도 했다. 또, 아버지를 편히 모시기 위해 수도 근처에 자기가 살던 마을을 본떠 새로운 마을을 세우고 고향 사람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37] 한신이 역이기를 죽이면서까지 제나라를 정복하고 나서 구원을 요청하는 고제의 서신에 대한 답변으로 "현재 제나라 민심이 안 좋음. 왜겠냐고 자신을 임시왕으로 봉하면 지원을 가겠음."이라는 딜을 걸자 고제는 진짜 극대노하여 "이 놈이 잘 봐줬더니 어쩌고 저째!"라며 한신의 사신 앞에서 화를 냈다. 이때 장량이 살짝 발을 밟으면서 "일단 봉하십시요. 지금 이를 거절했다가는 분명히 변고가 일어날 것입니다."며 간언을 듣자마자 화를 멈추고 "남자가 무슨 임시왕이냐 진짜 왕 해라!"라며 인정하였다.[38] 사실 주창의 발언은 농담이라고 넘길만한 상황이었다. 주창이 유방을 만나러 갔을 때 유방이 여후 혹은 척부인을 희롱하고 있었는데, 주창은 이를 보고 당황해서 나중에 오겠다며 도망쳤다. 아무리 측근이라도 신하가 주군의 침소에 함부로 드나들 수는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주창은 유방이 집무실에서 몰래 여자를 희롱하던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이때 유방은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도망치던 주창을 넘어트린 후에 그를 깔아뭉개고 자기가 어떤 군주냐고 물었다. 유방이 측근에게 장난삼아 시비를 거는 상황이었기에, 주창의 욕설에 가까운 대답을 웃어넘겼던 것.[39] 이 일로 유중은 대왕에서 합양후로 작위가 깎였다.[40] 사실 <항우본기>와 <번역등관열전>에 의하면 사실 이 둘을 구한 사람은 유방이었다. 유방은 정공에게서 벗어나자 가족을 구하려고 패현에 들렀는데, 당연히 항우도 유방의 가족을 잡으려고 사람을 보낸 후였다. 유방의 가족은 대부분 도망쳤지만, 어찌 된 일인지 유영과 노원공주는 길거리에 버려져 있었다. 유방이 이들을 발견하고 자신의 수레에 태웠던 것이다.[41] 당시 유방은 혼란, 허탈감, 죄책감 때문에 착란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세력이 처참하게 붕괴되고 있었는데, 수많은 병사들이 죽는 와중에도 혼자 자식들을 챙겨 무사히 도망치는 중이었던 것이다.[42] 번쾌의 부인은 여후의 동생이었고, 여씨 친족 중 가장 강력한 군권을 지녔던 사람은 바로 번쾌였다.[43] 그게 아니더라도 원래 외척은 황제의 강력한 뒷배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차기 황제의 보위를 위해서라도 함부로 숙청할 수는 없었다. 전랸이 끝나고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차기 황제의 뒷배를 그리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 여씨들이 숙청된 것도 사실 혜제 사후 유씨 대신 여씨들이 군권과 제후 자리를 차지해서 유씨를 지지하는 공신들 입장에서 위험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44] 유방의 유교에 대한 태도는 시간이 흐르며 변했다. 처음에는 유방의 병사조차 알 정도로 유생이나 세객을 업신여겼다. 하지만 역이기, 수하, 육가 등의 유학자들이 혁혁한 공을 세우고, 기신, 주가, 종공 등이 유교적 충성심에 입각해 스스로를 희생하자 유학을 업신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숙손통이 예를 세우자 그의 제자들에게까지 후한 상을 내리고, 상술했듯이 태자에게는 자신이 공부를 하지 않아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며 공부하라고 당부했을 정도였다. 결국 유교는 한무제 즈음부터 한나라의 명실상부한 지배적 사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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