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48252><colcolor=#fff> 武三思 무삼사 | |
작호 | 양왕(梁王) → 덕정군왕(德靜郡王) → |
시호 | |
성 | 무(武) |
이름 | 삼사(三思) |
생몰 | ? ~ 707년 |
부친 | 무원경(武元慶) |
조부 | 무사확(武士彠) |
본적 | 병주(并州) 문수현(文水縣) |
주군 | 측천무후 당중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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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당나라의 외척이자 권신. 측천무후의 조카이다.2. 생애
무삼사는 무사확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상리씨(相里氏)의 소생인 무원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즉 측천무후에게는 배다른 조카가 된다.무삼사는 측천무후의 조카로서 기용되어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임명되었고, 측천무후가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하관상서(夏官尙書)[3]로 임명되었다. 측천무후가 무주혁명을 일으키고 여황제로 즉위한 뒤에는 양왕(梁王)으로 책봉되었고, 실봉 1000호를 하사받았으며, 곧이어 천관상서(天官尙書)[4]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는 춘관상서(春官尙書)[5]로 전임되었고 감수국사를 겸임하였으며, 검교내사, 특진, 태자빈객을 역임한다.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관도안무대사(榆關道安撫大使)로 임명되어 이진충 진압을 맡기도 한다.[6]
무삼사는 무주에서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은 총신인 설회의와 장역지, 장창종 형제와 결탁하기도 하였다.
705년, 환언범, 경휘, 원서기, 장간지, 최현위 등이 일으킨 궁중 쿠데타에 의해 장역지, 장창종 형제가 주벌되고 중종이 복위한다. 무삼사는 중종 복위 이후 관직이 사공, 동중서문하평장사가 되었고, 봉읍이 덕정군왕(德靜郡王) 실봉 200호로 강등되었다. 무삼사는 환언범 일파의 집권을 두려워하여, 측근을 시켜 환언범 일파를 조정에서 축출하였고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모함하여 쫓아낸다. 또한 조정에 자신의 측근들을 심어서 조정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중종의 황후인 위황후나 후궁인 소용 상관씨와 사통하면서 아들인 무숭훈, 안락공주, 위황후와 함께 중종의 귀를 가리는 정치 공작을 벌인다. 이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무삼사의 음흉함을 조조나 사마의에 비견했다.
옹주(雍州) 사람인 위월장(韋月將)과 고진(高軫) 등이 모두 상소를 올려 무삼사 부자가 반드시 역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상주하자, 무삼사는 이들을 무고하였다. 하지만 송경이 무삼사의 무고에 이의를 제기하자, 무삼사는 송경을 외직으로 쫓아낸다. 또한 병부상서(兵部尙書) 종초객, 장작대장(將作大匠) 종진경(宗晉卿), 태부경(太府卿) 기처눌(紀處訥), 홍려경(鴻臚卿) 감원간(甘元柬)과 함께 조정을 장악하며 서로 인재를 추천하고 시정에서 무례를 범하였으며, 시어사(侍御史) 주이용(周利用), 염조옹(冉祖雍), 태복승(太僕丞) 이전(李悛), 광록승(光祿丞) 송지손(宋之遜)[7], 감찰어사(監察御史) 요소지(姚紹之) 등 5명은 항상 무삼사의 귀와 눈이 되어서,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삼사오구(三思五狗)라고 불렀다.
한편으로 무삼사는 안락공주, 위황후와 결탁해 중종의 태자인 이중준을 모함하여, 그를 태자 자리에서 쫓아내려고 하였다. 결국 이중준은 무삼사 일파의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707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무삼사의 저택으로 가서 무삼사와 무숭훈을 살해하였다. 하지만 이중준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이중준의 목을 가지고 무삼사와 무숭훈의 무덤에 제사를 올린다. 중종은 무삼사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를 양왕(梁王)으로 추봉하고 선(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사건이 바로 경룡정변이었다.
710년 예종의 아들인 이융기가 일으킨 궁중 쿠데타로 위황후 일파가 주벌된다. 뒤이어 예종이 복위하여 무삼사의 봉작과 시호를 모두 삭탈하고 무삼사 부자를 부관참시하였으며,그들의 무덤도 깎아서 평평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