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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3:12

무함마드/비판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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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군벌3. 사생활4. 메카 거주민들에 대한 습격과 학살5. 유대인 관련

1. 개요

무함마드비판논란을 정리한 문서.

2. 군벌

다른 범 세계적인 종교 창시자들과 다르게 무함마드는 명백히 군벌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과격한 군벌이었는데, 어떤 지역을 정주하고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지방 세력이 아니라 약탈과 노예매매로 부와 세력을 모으는 무장단체에 가까운 형태의 군벌이었다. 따라서 끊임없이 병력을 모으고 정복하고, 약탈하고, 노예로 잡아 팔고, 학살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문제는 이런 무함마드가 모든 무슬림들의 귀감이 되다 보니, 이런 행태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종교 지도자의 삶은 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궤적이 된다. 예를 들어 불교의 승려들은 석가모니처럼 무소유의 수행자 생활을 하려고 하고, 유교의 유학자들은 공자처럼 선생이자 정치가가 되려고 한다.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들은 예수처럼 영적 구원을 위한 설교가와 봉사자, 치유자가 되려고 하는데 무함마드의 제자들은 군벌이 되려는 성향이 처음부터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코란에서는 무함마드가 실천한 군벌 형성 시도를 독실하고 바람직한 행위라고 보고 있다. 심지어 이런 군벌 조직을 어떻게 만들고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세세하게 다 정해뒀는데 이것이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창궐하는 지역에서 발생하는 학살, 약탈, 강간 등 각종 잔혹행위의 원인이 되었다.

이는 이미 오랜 과거 문제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문제가 되는데 무하히드 왕조는 기존의 술탄이 독실하지 않다고 여긴 광신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립된 왕조이며, 사우디아라비아와하비즘 성직자들을 명분거리로 등에 업은 군벌 가문이 건국한 나라이다. 이런 역사가 있다보니 술탄의 강력한 통제가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사방에서 군벌이 일어나는 일이 상당히 많았다. 전세계에 발흥하고 있는 수많은 이슬람 무장단체들도 이런 전통을 따라서 생겨났다.

이러한 무함마드의 행적에 대해 과거의 기준으로는 괜찮은 일이었는데 현대 기준으로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가 무슬림들의 롤 모델이고, 그가 생전에 해왔던 행적을 그대로 따라가려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무함마드가 이렇게 하라고 말했는데 무함마드가 잘못했다는 말이냐?"라는 식으로 모든 비판을 가로막고 끔찍한 짓을 반복하는 자들이 전세계에서 직접적인 연계도 없이 코란만 가지고도 고립적으로 숱하게 나타나고 있다.

3. 사생활

11번째 아내인 사피야 빈트 후야이는 본디 유대인 부족인 카이바르의 부족장인 케나나 이븐 알-라비(Kenana ibn al-Rabi)의 아내였으나, 정복전쟁의 일환으로 카이바르를 점령한 무함마드는 케나나를 고문해서 살해하고 아내 사피야와 결혼한다. 샤피아는 자기는 이슬람으로 개종하겠다고 했고, 무함마드는 그녀와의 결혼을 통해서 우호적인 세력을 늘렸다. 역사가 John L. Esposito는 이 결혼을 마치 알렉산더 대왕다리우스 3세의 딸 스타테이라 2세와 결혼한 것처럼 유대인 부족과의 화해를 위한 일종의 정략결혼으로 해석했다.

양자의 부인이었다가 9번째 아내가 된 무함마드의 사촌 여동생 자이납 빈트 자흐시의 경우, 역사가 William Montgomery Watt는 자이납이 이왕이면 무함마드 본인과 결혼하고 싶어했던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의붓아들 자이드와 자이납의 부부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의붓아들 자이드는 이를 눈치채고 아내와 이혼하기로 했다고 하자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체면상 일단 거절하는데, 눈치 빠른 자이납은 이후 남편에게 대놓고 개기며 순종하지 않았고, 이혼당한 뒤 무함마드에게로 바로 가서 결혼한다.

또한 3번째 아내 아이샤가 6살일 때 결혼했다. 이는 첫째 아내인 카디자가 사망하자마자 한 결혼이었다. 6살 아동과의 결혼은 현재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슬람권의 악습으로 꼽히는 조혼을 정당화하려는 극단주의자들이 무함마드와 아이샤의 사례를 근거로 들이밀기 때문이다. 아이샤와의 결혼에 대해서는 무함마드의 정략적 의도라고 하는 해명도 있다. 아이샤의 아버지는 무함마드가 천사 지브릴에게서 알라의 계시를 받아온 직후에 개종해 무슬림이 된 인물이자 무함마드 사후 초대 정통 칼리파로써 움마(이슬람 공동체)를 이끌게 되는 아부 바크르인데, 이슬람의 전파에 그의 재력과 인맥이 크게 도움이 되었던, 무함마드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신을 가장 가까이서 지지하던 아내와 부족장 삼촌이 이틀 간격으로 죽고 새로 부족장이 된 사람은 사이가 안 좋아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이 된 무함마드로서는 현실적으로도 기댈 데가 아부 바크르밖에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정략결혼.

역사가 Colin Turner에 의하면 미성년자 조혼이 많던 당시 시대 가치관으로는 별로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무함마드 시대에서 5백 년이 넘게 흐른 서유럽 사회에서도 조혼이 있었다. 안티오크 공국의 레몽 드 푸아티에는 보에몽 2세의 딸인 콩스탕스와 결혼하였는데, 당시 그는 30대였고 그녀는 9살이었다.[1] 그리고 중세 기사의 표본으로 불리는 윌리엄 마셜 (1190년생)도 1224년에 존 왕의 9살배기 딸인 엘레노어 (1215년생)와 결혼, 1231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적극적인 성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서는 18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과학자 라부아지에가 13세 소녀와 결혼하기도 했다.[2]

쿠란주의자 에딥 유크셀(edip yuksel)[3]는 10가지 증거를 가지고 아이샤가 9살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Taberi, Hisam ibn Urwah, Ibn Hambeli 및 Ibn Sa'd에 따르면 Aisha는 7세에 결혼하여 9세에 선지자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그러나 또 다른 연구에서 Al-Taberi는 Abu Bakr의 네 자녀가 모두 이슬람 이전 아내 두 명에게서 태어났다고 보고합니다. 아이샤가 620년에 결혼하여 623년에 선지자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면 이는 그녀가 613년에 태어나 선지자와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9세였음을 의미합니다. 알-테베리(Al-Teberi)의 계산에 따르면, 수치는 아이샤가 계시가 있은 지 3년 후인 613년에 태어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Teberi는 또한 Ayşe가 이슬람 이전 시대에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이 경우 아이샤가 이슬람 이전 시대, 즉 610년 이전에 태어났다면 선지자와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적어도 14세였을 것입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테베리가 자신과 모순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약하면, 역사 증거와 쿠란을 보면 9세에 결혼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다만 무함마드가 진짜 권력자가 되었을 때 취한 여자들이 전부 성인이었음을 생각하면, 무함마드의 성적 취향은 어린 아이가 아니었던 듯하다. 아니, 자기 양자의 며느리를 취한 일이나 위에서 이야기한 샤피아의 사례를 보건데 오히려 성숙한 유부녀 취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미드 압둘 사미드 박사는 저서 <무함마드 평전>에서 무함마드의 성적 취향이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경험'에 근거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무함마드가 나이 많은 여자들을 좋아한 것은 '어머니를 대체하려는 무의식적 욕구', 아이샤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상받으려는 욕구'의 대상이었다는 주장으로, 하미드 박사는 무함마드가 아머니 아미나를 무의식중에, 어쩌면 '의식에서도' 미워했으리라고 본다.

코란에서는 아내를 구타해도 된다고 하고 (쿠란 4:34)[4] 어린이의 결혼을 허용하는 구절도 있다.(쿠란 65:4)[5]

4. 메카 거주민들에 대한 습격과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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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 전투 당시 배신한 바누 쿠라이자에 대한 처벌

메디나에 있던 시절, 초기 무슬림들은 타 부족에 비해 생계 유지가 어려웠는데, 이를 본 무함마드는 메카인들을 습격해서 약탈하고, 시리아를 오가는 무역 대상들의 상품을 습격해서 약탈하는 것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또 무함마드는 이슬람화 되기 이전의 메카에 있는 꾸라이시 부족과 싸워 승리한 후 꾸라이시 부족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어가는 이웃 부족민들에게 꾸라이시 부족을 어떻게 할지를 물었는데, 그는 다 죽이라는 말을 했고, 무함마드는 이를 신의 판결이라며 옳다고 칭송한 뒤 대학살을 자행했다. 역사가 William Montgomery Watt에 의하면 이는 가족 내지 부족 단위로 무언가 피해를 당하면 이에 대해 대를 물려서라도 보복하는 아랍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고, 인권이 확립되지 못한 전근대 문화권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수준의 복수를 당연시하는 풍조는 중근동 문화권부터 멀리보면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현재의 관점에서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다만 무함마드보다 더욱 인명경시 풍조가 강했던 기원전에 태어난 예수, 붓다, 공자는 공통적으로 학살행위에 극도로 부정적이고 일생 내내 용납될 수 없다는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함마드만이 4대 종교의 종교 지도자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학살을 긍정한 인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교도 구약에서 야훼가 학살을 긍정한 경우를 생각하면, 무함마드만 특별히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던 것은 아니다. 애당초 예수 이전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가 전체적으로 매우 호전적인 편이였다.

5. 유대인 관련

유대인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선 헤지라 당시를 살펴보아야 한다. 무함마드와 그 일행은 메디나로의 이주 이후, 후이다비야 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후이다비야 조약에는 메디나 원주민만 당사자가 아니라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들 역시 포함되어 있다.[6] 무함마드는 유대인의 종교적 자유를 처음부터 인정하였다.

다만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무슬림들의 이주 후 유대인들과 문제가 생겼고, 유대인들이 무함마드에 의해 학살당했다는게 비판의 초점이 되는 것이다.

쿠란 2:144~145를 참고하면, 알라의 계시에 의하여 바뀌었다는 사실을 파악 할 수 있다. 메카로의 기도는 이슬람의 관점에서는 알라의 계시에 의한 것임이 명확하다. 자의적인 변경이라고 보려면 정치적인 판단으로 즉 유대인들 때문에 변경했다는 기록이 있어야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또한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면서 비판하는데, 우선 이슬람측 기록인 이븐 이스하크나 알 와키디 모두 유대인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하느님의 사도가 메디나로 오자 모든 유대인들이 그와 화해를 했다. 그리고 그는 쌍방의 합의에 대한 문서(키타브)를 작성했다. 하느님의 사도는 모든 부족을 자신의 동맹자들과 화해시켰으며, 그들 사이에 평화보장(아만)을 확립했으며 그들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그 조선에는 자신에 대항하는 어떤 적에게도 지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의 사도가 바드르(메카의 다신교도)사람들을 제압하고 다시 메디나로 돌아왔을 때 유대인들이 불손한 태도를 보이며 그들과 하느님의 사도 사이에 약정된 동맹(아흐드)를 파기했다.

무함마드가 유대인들에게 취한 조치(남성 살해, 여성,아이 포로화 등)는 오늘날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르지만, 우선 그의 행동이 부도덕했다면, 당시(620년대)의 규범을 어긴 것이라면, 긍정적인 묘사에 전념했던 그의 전기작가들은 훨씬 많은 부분을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7]

이전의 서술에서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평온하게 비교적 지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5세기에는 아랍계 유대인들에 의한 학살이 일어난 적이 있으며 5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대인들의 정치적 주도권이 이미 넘어간 상태였다.

또 유대인들이 후이다비야 조약을 먼저 파기한 증거들도 존재한다. 유대인들은 메디나 전투에서 메카의 다신교도들과 내통을 하는등의 행보를 보인적이 있는데 가령 다신교 군대였던 아부 샤피안은 유대인 부족과 내통하여 메카군을 곤란하게 한 경우가 있다. 이는 명백한 후이다비야 조약 위반이다. 지금 현대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가령 휴전 중인 대한민국 기준에서도 한국인이 북한과 내통하는 경우는 전시에 사형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 점을 본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아니다. 단지 연좌제로 죽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만 이 또한 시대적 배경을 참조한다면 참작될 여지는 존재한다. 또 다른 행보로는 #가 있다. 주석을 참조해볼 때 어느 한 유대인은 조약을 어기고 무슬림 여성의 히잡을 벗기고 괴롭히는 등 유대인들 역시 무슬림에게 선빵과 비슷한 행보를 행한 적은 있다.

안 쓰는 물건들을 카이누카 부족의 시장에 팔던 한 아랍 여성이 있었는데, 어느 날 금 세공사 옆에서 장사를 하던 도중 그곳 사람들이 그녀의 베일을 벗겨 얼굴을 보려고 시도했다. 이를 거부하자 금 세공사는 그녀의 옷깃을 잡고서 그녀의 등 뒤로 걷어 올렸다. 그 뒤에 그 여인이 일어서자 그녀의 치부가 드러나게 되었고, 주변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비웃었다. 그녀는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들은 한 이슬람교도 남자가 그 금 세공사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여버렸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뒤 카이누카 일족은 그 이슬람교도 남성을 살해하는 복수를 벌였고, 이것이 무함마드가 카이누카 부족 성곽을 에워싸고 그들을 파멸시킬 결심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안사르의 지도자인 압달라 이븐 우바이의 권유에 따라 카이누카 부족을 추방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카이누카 부족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아드리아트(시리아)로 이주한다.

무함마드는 또 바누 나디르라는 유대인 부족에 대해서 조치를 취했다. 이븐 이스하크에 의하면 이 조처는 우후드 전투에서 이슬람교도들이 패한 후에 일어난 일인데, 그 계기는 유대인들의 무함마드 암살시도와 메카의 다신교도들과의 협력을 이야기한다. 무함마드는 방어시설을 갖춘 그들의 집을 포위하고, 아랍에서 군사대결을 벌일때 금기시되던 종려나무들을 베어냈던것이다. 하지만 그 전의 바누 카이누카 부족들처럼 바누 나디르 부족도 유대인의 오아시스인 하이바르로 쫓겨났다.

그들에 대한 보복조처가 단행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조처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조치이다. 그들은 무함마드와의 협약을 어긴것과. 참호전을 치르는 동안 다신교도들과 협력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슬람측에서는 무함마드가 알라의 엄명에 따라 지브릴에게 전달받아 처리했다고는 한다. 이들의 방어시설에 대해 몇 주동안 포위공격이 시작되었고, 무함마드는 바누 쿠라이자족의 생사여부를 바누 아수스족의 일원인 사으드 이븐 무아드의 수중에 맡겼다. 그는 참호전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고, 죽음을 눈앞에 둔 자였다. 그는 모든 남자는 처형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포로로 받아들이고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도록 명령하였다.

이 두 일화를 참고해보면, 이전 서술인 무함마드가 유대인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살해했다고 서술한건 명백한 사실관계, 인과관계 오류임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아랍 여성에 대한 성추행의 경우는 현대에서도 충분히 분쟁의 원인이 되는 소지가 있으며, 내통의 경우도 많은 선진국들도 형법으로 처벌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적죄로 처벌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최대 형벌이 무기징역임을 감안할 때, 무함마드의 조치가 반유대주의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비판의 소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왜 모든 유대인들을 특히 남자를 살해했는지 정도가 될 수 있지, 유대인에 대해서 사형명령 자체가 단순히 무함마드가 유대인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죽였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서술이다. 여성과 아이를 포로로 잡아 노예로 삼았다는 것도, 이건 그 당시 중동에서도 흔한 일이였기에 무리가 없다. 신명기에도 적들의 처녀를 가지라, 여성과 아이들을 살려두고 남자들을 죽이라는 내용이 있기도 하기 때문.

이슬람의 통치 아래서 수세기를 살았던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은 엄청난 모욕과 박해를 당했다. 무슬림 지도자의 성격에 따라 그 모욕과 박해의 강도는 달랐지만[8],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9] 물론 유대인들은 전근대에는 확실히 그리스도교보다 이슬람교를 더 지지했다. 즉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박해가 좀 더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에서 무슬림들이 살해되고 추방되자 많은 무슬림들이 북아프리카나 서아시아로 도피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모로코, 이집트, 튀르키예 등지의 관리가 되기도 하였고 일부는 바르바리 해적이 되어 그리스도교 세력에 복수하였다.


[1] 1136년에 결혼했는데 콩스탕스는 1128년생이다.[2] 18세기의 조선 영조만 해도 66세 때에 무려 51세 연하인 15세의 정순왕후와 결혼하기도 했다. 다만 당시엔 대개 초경은 치르고 혼인을 했기 때문에 왕자들이나 명문가의 첫 장가처럼 일찍 장가가는 경우는 대개 아내가 연상이었다. 영조가 51세 연하인 중전을 맞이한 이유는 '후궁은 중전이 될 수 없다'는 숙종의 법안 때문이었고, 당시 명문가의 흠 없는 여식은 초경을 치르고 얼마 안 되어 대개 시집을 갔기 때문에, 중전이 될 만큼 명문가에 건강하고 외모 단정한 처녀 중 시집도 안 가고 흠도 없으면서 나이도 있는 처녀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사정상 초경 전에 혼인을 한다 해도 잠자리는 초경 이후에 했다. 유럽도 보통은 그렇긴 했었다.[3] 튀르키예/미국 복수국적의 쿠란주의자, 이집트 생화학자 라샤드 칼리파가 쿠란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면서 내세운 코드 19를 가지고 19.org 라는 쿠란주의 사이트를 운영중이다.[4] 그러나 그 구타가 정말 얼굴을 때리고 하는 그러한 구타는 아니다. 오해가 있는게,주먹으로 후드려 패는게 아니라 팔이나 손 같은 부위를 때려야하며, 때릴 때는 시와크(칫솔)같은 것으로 때려야한다.(출처:탈프시르 앗 따바리 vol8, p315) 참고 시와크는 이쑤시개보다는 조금 크고 각설탕 막대정도 되는 크기이다... 또한 하디스에서는 (무슬림이 수집한 하디스 1218) "여성에 관해 하나님께 두려워 하라, 자국이 남을 정도로 여성을 세게 때려서는 안되노라"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볼때, 이슬람에 의도에서는 단순한 경고로 활용하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아내를 구타하는 등 무시하는 무슬림들이 많고 이슬람국가들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은 점이 있기에 논란이 되고 있는 구절 중 하나이다. 확실한건 구타라고 보려고 해도, 얼굴을 때리면 안되고, 아프게 때리면 안되는 등 한계를 지정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구타 자체를 금기하는 구절이 없다는 점을 비판 할 수 있다.[5] 65장은 배우자간의 갈등으로 인해 이혼이 발생한 경우 무슬림이 지켜야 할 자정기간에 대한 설명인데, 그 설명에서 보면 생리에 이르지 않은 여성도 마찬가지로 이혼이 가능하다는 점으로 보아 혼인 역시 가능하다고 볼 수 있으니, 이슬람에서 조혼이 허락된다는 것 때문에 비판이 되고 있다. 다만 4:19와 같은 다른 구절들을 참고해보면, "여성들을 의롭게 살라"라는 점을 비추어 볼 때, 특히 마으루프라는 아랍어 단어가 '훌륭한'이라는 점을 볼 때 조혼이 권장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나 마으루프가 사회적으로도 용납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면 더더욱. 다만 그와 별개로 65:4라는 구절에서 조혼에 대해서 허용한다고 보여지는 구절은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6] 무함마드는 이렇게 말했다,하르트무트 보브친 저 2011, p 153[7] 무함마드는 이렇게 말했다, 하르트무트 보브친 저, 2011, p171[8] 무굴제국의 예를 보아도 악바르 대제는 지즈야를 폐지하고, 힌두교도 공주와 결혼하는 등 유화정책을 펼쳤지만 아우랑제브의 경우는 확실한 원리주의적 정책을 펼쳤다.[9] 다만, 중세의 시대를 감안할 때는 비교적 나은 것일 수는 있는게, 같은 지역 그리스도인들은 작센족의 토속신앙을 아예 말살 시켜버렸지만(튜튼 기사단 처럼 발트 신화를 말살 시킨 경우도 덤)무슬림들은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쿠르드 족의 전통 신앙등이 아직까지 남아는 있다. 다만 팔 다리를 짤랐을 뿐이지. 심지어 조로아스터교도 그정도 급으로 말살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현대 이슬람이 더 중세 이슬람보다 폐쇄적이고 극단적으로 변한 것이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에게 의례행사 제한, 옷착용 제한, 이동수단 제한, 거주구역 제한 및 지즈야를 통해서 숨죽일 필요가 있게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교회나 시나고그의 크기 제한, 교회의 십자가를 달지 못하게 하는등의 제약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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