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14:37:24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파일:AN00588223_001_l.jpg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사망 시기에 대해2.2. 전9년의 역에서 시모쓰케노카미(下野守)까지2.3. 시라카와 천황의 측근으로써2.4. 후3년의 역2.5. 요시츠나의 대두2.6. 죽음에 이르기까지2.7. 요시이에 사후의 카와치 겐지
3. 환생 전설4. 기타

1. 개요

源義家
1039년 ~ 1106년 8월 4일 (향년 67세)

헤이안 시대 후기의 무장. '이요노카미' 미나모토노 요리요시(伊予守頼義)의 장남이었으며, 통칭은 하치만타로(八幡太郎)였다. 그래서 보통 하치만타로 요시이에(八幡太郎義家)로 많이 불린다.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조상이었다.

2. 생애

2.1. 출생과 사망 시기에 대해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태어난 해와 사망한 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68세로 사망했다는 사료가 많다. 사망한 해는 사료로써 신빙성이 가장 높은 《주우기》(中右記)의 가조(嘉承) 원년(1106년) 7월 15일조로, 여기에 근거해 역산하면 조랴쿠(長暦) 3년(1039년)에 태어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맏아들로, 카와치 겐지(河内源氏)의 본거지인 카와치국(河内国) 이시카와군(石川郡)의 쓰바이(壺井)에 위치한 고로봉(香炉峰) 저택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후도마루'(不動丸) 또는 '겐타마루'(源太丸)였다. 7살 되던 봄에 야마시로국(山城国) 이와시미즈 하치만구(石清水八幡宮)에서 원복을 치르고, 나서 하치만타로(八幡太郎)라 칭했다.

2.2. 전9년의 역에서 시모쓰케노카미(下野守)까지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 겸 무츠노카미(陸奥守)로 임명된 아버지 요리요시가 당시 무츠국의 대호족 아베씨(安倍氏)와 벌인 전쟁인 전9년의 역(前九年の役)에서 요시이에는 겐지측이 수백 명의 전사자를 내고 대패했던 덴기(天喜) 5년(1057년) 11월의 기노미 전투(黄海の戦い)를 겪었다. 그 뒤 데와국(出羽国)의 호족 기요하라씨(清原氏)의 응원을 얻어 요리요시는 아베씨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오슈고산넨기》[1]에는 기요하라노 다케히라(清原武衡)의 유모의 아들인 치토(千任)의 입을 빌어
"네 아비 요리요시가 사다토(貞任), 무네토(宗任)[2]를 치지 못하고 묘부(名簿)를 바쳐가며 돌아가신 청장군[3]를 향해 애걸했고, 그 힘을 빌어 겨우 사다토를 칠 수 있었다"
라고 말해 격노했다는 기술이 있는데, '명부'(名簿)를 바쳤다는 것은 '신하의 예를 취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미나모토노 요리요시가 데와 기요하라씨에 저자세를 취해가며, 무츠 아베씨와의 전투에 겐지의 아군으로써 참전을 부탁했다고 판단된다. 고헤이(康平) 6년(1063년) 2월 25일, 미나모토노 요시이에는 종5위하 데와노카미(出羽守)로 서임되었다.

그러나 데와국은 기요하라씨의 본거지였고, 기요하라노 다케노리에게는 전9년의 역에서 저자세로 나섰던 일도 있었으니만큼 수령으로써의 임국 경영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던지 《조야군재》(朝野群載)에는 이듬해인 고헤이(康平) 7년(1064년), 조정에 엣추노카미(越中守) 전임을 요청했다는 기술이 있다(다만 그것이 승인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해에 요시이에는 수도 교토에 머무르며, 미노국(美濃国)에서 미노 겐지(美濃源氏)의 시조였던 미나모토노 구니후사(源国房)와 싸웠다.

엔큐(延久) 2년(1070년)에 요시이에가 시모쓰케노카미(下野守)가 되어 무츠에서 관인과 국고의 열쇠를 훔친 후지와라노 모토미치(藤原基通) 체포에 나섰다는 것이 《부상략기》(扶桑略記) 8월 1일조에 보인다.

당시의 무츠노카미는 야마토 겐지(大和源氏)의[4] 미나모토노 요리토시(源頼俊)로,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고산조 천황(後三条天皇)이 요리토시 등에게 북부 무츠 지역의 정복을 명령해,[5] 전투 자체는 승리했으나 이 후지와라노 모토미치 문제 때문인지 요리토시에게는 어떤 은상도 없었으며, 이후의 수령 임관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2.3. 시라카와 천황의 측근으로써

쇼랴쿠(承暦) 3년(1079년) 8월, 미노에서 미나모토노 구니후사와 투란을 일으킨 우효에노이(右兵衛尉) 미나모토노 시게무네(源重宗)를 관의 명령으로 추토했다.

에이호(永保) 원년(1081년) 9월 14일에 검비위사(検非違使)와 함께 온조지(園城寺)의 악승(悪僧, 승병)을 추포했다(《부상략기》). 10월 14일에는 시라카와 천황(白河天皇)의 이와시미즈 하치만구 행차에 즈음해 온조지 악승들의 습격에 대비, 동생 요시츠나(義綱)와 둘이서 각기 낭당(郎党)을 거느리고 호위했는데, 이때 본관(本官, 관직)이 없었기에 칸파쿠(関白, 관백) 후지와라노 모로자네(藤原師実)의 전구(前駆)라는 명목으로 호위에 임했다. 나아가 돌아올 때는 밤이 늦어 속대(束帯) 대신 비상시 전투에 나설 수 있는 포의[6]로 갈아입고, 활과 화살을 찬 상태에서 시라카와 천황의 어가를 경호했다. 12월 4일 시라카와 천황의 가스가 대사(春日社) 행차때는 요시이에가 갑주를 갖추고 활과 화살을 찬 상태로 100명의 쓰와모노(兵, 병)를 거느리며 천황을 경호했다.

이와시미즈 하치만구 행차 때, 요시이에가 포의 차림으로 어가를 호위한 것에 대해 후지와라노 다메후사(藤原為房)는 《위방경기》(為房卿記)에서
"포의의 무사가 봉련(鳳輦)을 호종한다는 것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다."
라고 기술하며 놀라움을 드러냈지만, 2개월 뒤인 가스가 대사 행차에 즈음해서는 《수좌기》(水左記) 등에서
'요즘 일들'
정도로 기술할 정도로 구교들의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관직도 없이 천황을 경호하는 것이 보통 일처럼 생각되게 된 것이다. 훗날 원정 시기 원(院)의 무력이었던 북면의 무사(北面武士)의 시원이 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무렵부터 요시이에, 요시츠나 형제는 시라카와 천황의 근시(近侍)를 맡고 있었다.

2.4. 후3년의 역

에이호(永保) 3년(1083년)에 무츠노카미가 되어 데와 기요하라씨의 내분에 개입했다. 이 일로 후3년의 역이 시작되었다. 다만 이 전쟁은 교토 조정의 추토관부(追討官符)에 의한 공전(公戦, 공적인 전투)이 아니었다. 조정은 간지(寛治) 원년(1087년) 7월 9일에 관리를 보내 '오슈 합전 정지'를 명령했으며, 《고니조모로미치키》(後二条師通記)에서는 이 전투를 '요시이에 합전'(義家合戦)이라고 써서 요시이에 개인의 사전(私戦, 개인적인 전투)임을 명기했다.

후3년의 역에 동원된 쓰와모노(兵) 병력은 이시이 스스무(石井進)의 국아군제(国衙軍制) 개념에 따라 분류할 때 국수(国守)군의 다테노 모노도모(館の者共) 즉 수령의 '사적인 낭당'로써 동원된 기나이(近畿) ~ 미노(美濃) 및 사가미(相模) 지역 무사들과 데와 기요하라씨 세력 외에 무츠 남부의 고쿠노 쓰와모노(国の兵共)들이었다. 이는 '지방 호족군'으로써 무츠 오쿠 6군(奥六郡)의 남부 3개 군이 중심지였던 기요하라노 기요히라(淸原清衡)의 군대와 데와의 기미코노 히데타케(吉彦秀武)의 군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최종 국면에서 주요한 작전은 데와 기요하라씨의 호족 기미코노 히데타케(吉彦秀武)로부터 나왔던 점, 나아가 전9년의 역의 사례를 감안할 때, 후3년의 역 당시 카와치 겐지측 최대 병력은 히데다케의 군이었고, 그 다음이 기요히라의 군이었으며, 요시이에 자신이 거느린 고쿠슈 군사력은 무츠 남부의 '고쿠노 쓰와모노'를 더해도 그보다 많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간지 원년 11월에 요시이에는 데와의 가나자와 요새(金沢柵)에서 기요하라노 다케히라(清原武衡), 기요하라노 이에히라(清原家衡)를 쳐부수고, 12월 이를 보고하는 <국해>(国解)에서
"저의 힘을 가지고 우연히도 이리 평온하게 되었습니다. 어서 추토의 관부를 주시옵소서"
라고 말미에 붙인 추토관부를 요청했으나 교토 조정은 이를 듣지 않았고, 오히려 '사전'으로 간주되어 은상도 없었으며, 나아가 간지 2년(1088년) 정월에는 요시이에를 무츠노카미에서 파면했다.

무엇보다도 무츠국의 쓰와모노(兵)를 동원한 전투였기에 요시이에 자신이 <국해>에서
'정사(政事)를 제쳐두고 오로지 쓰와모노(兵)를 거느리며'
라고 적고 있듯이, 이 기간 동안 무츠국에 정해진 할당량의 관물을 공납하는 것이 더뎌졌고, 그 뒤 몇 년이나 이를 재촉했던 것이 《주우기》 에이초(永長) 원년(1096년) 12월 15일조와 2년(1097년) 2월 25일조 등 기록에 남아 있다. 당시의 법 제도에서는 정해진 관물을 거두고, 수령공과정(受領功過定)에 합격하지 못하면 새로운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기에 요시이에는 관위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후3년의 역은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개인에게 있어서 겐지의 무문(武門)으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한 가지 계기가 되었다. 앞에서 미나모토노 요시이에는 무사들을 동원해 데와 기요하라 씨 일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러한 무사들의 동원은 어디까지나 요시이에 개인의 연줄로서 나아가 기요하라 소료 독재에 대한 반발로 데와 기요하라 씨에 등을 돌린 데와 호족들의 일조로 이루어졌다.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는 그나마 전9년의 역을 나중에라도 '공적인 전투'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후3년의 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요시이에와 데와 기요하라 일문 사이의 사적인 전투'로 취급되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공적인 전투가 아니기 때문에 요시이에나 그의 편에 서서 싸운 무사들의 전적이 '공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고, 공훈이 없으니 그에 대한 포상 조치 같은 건 꿈도 못 꾼다는 얘기다. 게다가 개인적인 전투인 후3년의 역 때문에 요시이에는 현지 수령으로서 조정에 의무적으로 바쳐야 할 공물[7]을 제때 못 바쳤으니 조정의 입장에서는 이런 요시이에에게 포상은 고사하고 사적인 싸움 때문에 관리 본연의 임무도 소홀히 한 근무 태만자로 취급해 처벌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조정의 입장에서 요시이에 스스로도 조정을 위한 목적으로 벌인 '공적인 전투'도 아니고, 전쟁에 동원되어 싸운 무사들의 전적도 국가에 대한 공훈으로 인정받지 못한 전투였기에 국가로부터의 포상 조치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나모토노 요시이에는 자신의 편에 서서 데와 기요하라 씨와 싸운 무사들에 대해, 요시이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은상을 준다는 결정을 내렸다. 국사로서 벌인 전투에 대한 포상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국사로서 업무 태만의 책임을 물게 된 판이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자신을 위해 싸운 무사들의 전적에 대한 보상을 그것도 개인 재산을 털어서 시행한 요시이에는 당연히 현지 무사들의 지지도를 크게 끌어 올릴 수 있었고, 훗날 겐지로서 거병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아시카가 다카우지 등도 숱하게 '하치만타로 요시이에'라는 영웅이자 자신들의 조상의 이름을 내세워 무사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2.5. 요시츠나의 대두

간지 5년(1091년) 6월, 요시이에의 노토(낭당) 후지와라노 사네키요(藤原実清)와 요시츠나의 노토 후지와라노 노리키요(藤原則清)가 카와치에 위치한 영지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고, 이 때문에 요시이에, 요시츠나 형제의 병력이 서로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시츠나는 동년 정월에 후지와라노 모로미치(藤原師実)가 절회(節会)에 참내할 즈음, 행례(行列)의 전구(前駆)를 맡은 것 외에 이듬해인 간지 6년(1092년) 2월에는 후지와라노 타다자네(藤原忠実)가 가스가 제사(春日祭使)가 되어 나라(奈良)로 가는 길의 경호를 맡았으며, 간지 7년(1093년) 12월 미나모토노 도시후사(源俊房)가 입궐할 때의 전구를 맡았다는 것이 구교의 일기에 보이지만, 요시이에는 조지(長治) 원년(1104년)까지 어떠한 활동에 대한 기록도 없다.

간지 7년 10월 제목(除目)에서 요시츠나는 무츠노카미로 취임했고, 이듬해 8년/가호(嘉保) 원년(1094년)에는 데와노카미를 습격한 재지 개척 영주 타이라노 모로타에(平師妙)를 노토를 시켜 추포하고 종4위상에 서임되어, 관위가 형과 같아졌다. 가호 2년(1095년) 정월 제목에서 요시츠나는 미노노카미(美濃守)가 되었다. 이는 지방관으로써 무츠노카미보다 격이 높은 지위였다.

그러나 미노국에 위치한 히에이산(比叡山) 소유의 장원과의 분쟁에서 승려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져, 히에이산은 요시츠나의 유배를 요구하며 강소(強訴)를 벌였다. 관백(関白) 후지와라노 모로미치(藤原師通)는 '야마토 겐지'의 미나모토노 요리하루(源頼治)와 요시츠나에게 명령해 이를 실력으로 격퇴했는데, 이때 히에이산 엔랴쿠지(延暦寺), 히요시 신사(日吉社)측의 신인(神人), 대중(大衆)으로부터 사상자가 나왔고, 히에이산 측은 조정에 대해 저주를 퍼부었다. 나아가 4년 뒤인 조토쿠(承徳) 3년(1099년) 6월에 당사자인 모로미치가 38세로 사망하자, 조정은 히에이산의 저주에 공포를 느꼈다. 이후 요시츠나가 수령에 임관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2.6. 죽음에 이르기까지

미나모토노 요시이에는 후3년의 역에서 10년이 지난 조토쿠(承徳) 2년(1098년)에 이르러,
'今日左府候官奏給云々, 是前陸奥守義家朝臣依済舊國公事, 除目以前被忩行也 件事依有院御気色也, 左大史廣親候奏'
라는 기록대로 시라카와 법황(白河法皇)의 의향에 따라, 정월에 무츠노카미 시절에 바치게 되어 있었던 관물 할당분을 완납할 수 있었고, 수령공과정도 통과해 4월의 소제목(小除目)에서 정4위하로 승진, 10월에는 원(院)에 승전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시라카와 법황의 이러한 요시이에에 대한 파격적인 우대는 당시 형성되어 있었던 귀족 사회의 가격(家格)에 얽매인 공경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나카미카도 우대신'(中御門右大臣)이라 불렸던 후지와라노 무네타다(藤原宗忠)는 그의 일기 《주우기》 조토쿠 2년 10월 23일조 이서(裏書)에
"요시이에 아손(義家朝臣)은 천하 제일의 무용(武勇)을 가진 무사이다. 승전(昇殿)이 허락되는 것에 세상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자가 있을까. 그냥 말하지 않을 뿐이니"
라고 적었다.

고와(康和) 3년(1101년) 7월 7일, 둘째 아들인 쓰시마노카미(対馬守) 요시치카(義親)가 진제이(鎮西, 진서)의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 오에노 마사후사(大江匡房)에게 고발당하자, 조정은 요시이에에게 요시치카 소환을 명령했다. 그러나 요시이에가 이를 위해 파견했던 낭당 슈토 스케미치(首藤資通)는 이듬해인 고와 4년(1102년) 2월 20일 요시치카와 함께 요시치카를 소환, 추궁하러 왔던 관리를 살해해버렸다. 12월 28일에 이르러 조정은 요시치카의 오키(隠岐) 유배와 스케미치의 투옥을 결정했다.

《주우기》에 따르면 조지(長治) 원년(1104년) 10월 30일에 요시이에, 요시츠나 형제는 함께 엔랴쿠지(延暦寺) 악승 추포에 나섰는데, 이것이 요시이에의 마지막 공적 활약이었다.

가조 원년(1106년)에는 다른 아들인 요시쿠니(義国)가 숙부인 미나모토노 요시미츠(源義光) 등과 히타치(常陸)에서 합전을 벌였고, 6월 10일 요시이에에게 요시쿠니를 소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요시쿠니와 싸우던 요시미츠, 타이라노 시게나리(平重幹) 등에게도 포박 명령이 내려진 가운데 요시이에는 7월 15일,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다음날 후지와라노 무네타다(藤原宗忠)는 자신의 일기 《주우기》에
"무위(武威)가 천하에 가득했던, 실로 이는 대장군(大将軍)에 어울리는 자였다."
라고 추도했다. 요시이에 사후 셋째 아들인 요시타다(源義忠)가 가독(家督)을 이어 '카와치 겐지'의 도료(棟梁, 동량)가 되었다.

2.7. 요시이에 사후의 카와치 겐지

요시이에가 사망한 이듬해인 가조(嘉承) 2년(1107) 12월 19일, 오키(隠岐)로 유배되어 있었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치카가 이즈모 모쿠다이(目代, 목대)를 죽이자, 주변 여러 쿠니에서 요시치카에게 동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시라카와인은 이즈모 인근 이나바노카미(因幡守)로써 인의 근신(近臣)이기도 했던 타이라노 마사모리(平正盛)[8]에게 요시치카 추토를 명령했다. 이듬해인 덴닌(天仁) 원년(1108년) 1월 29일에 마사모리는 요시치카의 수급을 가지고 교토로 개선했고, 시라카와 태상천황의 측근으로써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날의 개선식을 후지와라노 무네타다(藤原宗忠)는 《주우기》에서 이렇게 썼다.
"돌아가신 요시이에 아손(朝臣)은 지난날 무자(武者)의 장자로써 많은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그 남은 악이 마침내 자손에게 미친 것인가"

또 당대의 이야기집에는 요시이에가 죽던 날 이웃집에 살던 사람이 지옥에서 온 사자가 요시이에의 집에서 요시이에를 끌고 나오는 꿈을 꾸었는데, 정확히 그 시각에 요시이에가 죽어 그 가족이 곡을 하고 있었다고도 한다. 고시라카와 법황이 엮은 이마요(당시 유행하던 노래) 모음집 <료진히쇼>에 실린 노래 중에는 "독수리 사는 깊은 산에도 오만 가지 새들이 모여 사는데 같은 겐지라 해도 하치만타로는 두렵다네"(鷲の棲む深山には、概ての鳥は棲むものか、同じき源氏と申せども、八幡太郎は恐ろしや)라는 노래도 실려 있기도 하다.

덴닌 2년(1109년) '카와치 겐지'의 도료였던 미나모토노 요시타다가 노토(낭당)인 타이라노 시게나리(平成幹)에게 암살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요시츠나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요시아키라(義明)로 지목되어, 요시치카의 아들(요시타다의 동생이라고도 함) 미나모토노 타메요시(源為義)가 요시츠나 일족을 추토했다. 요시츠나는 사도 섬(佐渡島)으로 유배되었고 요시아키라는 살해되었다.

'카와치 겐지'의 가독은 미나모토노 타메요시가 이었으나 이후 카와치 겐지의 세력은 일시 쇠퇴했다. 하지만 요시미츠, 요시쿠니(義国)나 요시타다의 아들 카와치노 쓰네쿠니(河内経国), 타메요시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토모(義朝) 등이 간토(関東, 관동)로 내려가서 세력을 확대했고, 이는 훗날 증손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세우는 토대가 되었다.

3. 환생 전설

이마가와 료슌이[9] 저술한 난태평기(難太平記)에는 아시카가 이에토키(足利家時)[10]와 관련한 전설이 저술되어 있다. 생전 미나모토노 요시이에는 "나는 사후 7대 손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환생하여 천하를 잡을 것이다(自分は七代の子孫に生まれ変わって天下を取る)"라고 했는데, 그 내용을 쓴 치문을 아시카가 집안에서 전해 왔고, 요시이에로부터 7대 손에 해당하는 인물이 아시카가 이에토키였다. 하지만 이에토키는 자신의 대에서는 도저히 7대 조 요시이에가 말한 대로 천하를 쥘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 앞에 "나로 세어서 3대 후의 자손이 천하를 쥐게 해 주시오"라고 기원하는 원문(願文)을 남기고 이에토키 자신은 자결을 택했다. 그렇게 3대 후손으로 태어난 것이 아시카가 타카우지였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전한 이마가와 료슌은 "내가 이에토키가 쓴 그 원문을 직접 눈으로 봤고 읽었다"고 했는데, 아시카가 집안의 친족이자 최측근 무장으로 아시카가 쇼군케와도 연이 깊었던 인물이니만큼 보고 들은 것도 많았을 테고, 실제로 쇼군 타카우지의 동생인 다다요시의 편지 중에서 "할아버님이신 이에토키가 당시 집사 고노 모로우지(高師氏)에게 보낸 서장을 고노 모로아키(高師秋)[11]가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그걸 얻어 보고 감격하여 서장을 직접 베껴 모로아키에게 보내고 나는 그 원본을 가지고 있다"고 쓴 내용이 있어서 이에토키가 뭔가를 기원한 원문을 남겼던 건 맞는 것 같은데, 문제는 다다요시가 이 편지를 쓴 것은 겐무의 난(1335년) 즉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덴노의 겐무 신정에 반발하는 무사들의 추대로 신정에 맞서 봉기하고도 15년이 지난 뒤의 일이라서 이에토키의 서장이 타카우지의 거병의 동인이 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애초에 요시이에의 '7대 손'이 꼭 이에토키 한 사람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좀 떨어져서 그렇지 아시카가 타카우지와 마찬가지로 가마쿠라 막부 멸망에 일조한 무장인 닛타 요시사다의 할아버지 모토우지(基氏)도 계보로 치면 요시이에의 7대 손이다. 이에토키의 원문이 실존했다 해도 그 내용은 이마가와 료슌의 주장처럼 '천하를 얻겠다'는 험악한 내용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료슌이 말한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아시카가 이에토키가 천하를 잡겠다 운운하는 원문을 남겼다는 것도 무로마치 막부 성립 이후 「아시카가야말로 겐지의 적류다」라고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프로파간다로써 퍼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4. 기타

파일:源義家.png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에서 고대 무장으로 동생 요시미츠와 함께 등장한다.


조반선 나코소역에 가면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동상이 있다.


[1] 奥州後三年記, 《속군서유종》(続群書類従)에 수록[2] 무츠 아베씨였다.[3] 清将軍, 진수부장군 기요하라노 다케노리[4] 카와치 겐지와 같은 세이와 겐지 계열의 가문.[5] 엔규 에미시 합전(延久蝦夷合戦)[6] 布衣, 평상복(常服)[7] 무츠노카미가 조정에 바쳐야 하는 공물 중에는 금도 있었는데, 금은 단순히 금전적인 가치뿐 아니라 조정에서의 의례에도 필요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당시 일본에서 무츠 안에서만 나는 것이었다.[8]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할아버지이다.[9] 무로마치 시대 초기의 무장. 한때 규슈 대부분의 슈고와 단다이직을 겸임한 권력자였으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견제로 좌천된 인물이다.[10]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으로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할아버지이다.[11] 모로우지의 손자로써 다카우지의 집사가 된 고노 모로나오(高師直)의 종형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