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타크 왕조 관련 문서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000,#CCC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정치·국가원수 | 아미르 |
역사 | 담간 전투 · 머체호트 전투 · 칸다하르 공성전 | |
인물 | 미르와이스 호타크 | |
행정구역 | 칸다하르 · 이스파한 | |
언어 | 파슈토어 · 다리어 | |
민족 | 파슈툰인 | }}}}}}}}}}}}}}} |
1. 개요
호타크 왕조를 세운 파슈툰족 아미르.2. 생애
1673년 헤라트에서 파슈툰족 길지(파슈토어: غلجي, Ghiljī) 부족 출신으로 태어났다.2.1. 배경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사파비 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는데 조지아의 왕이자 사파비 제국의 신하이기도 했었던 기오르기 11세는 반란에 실패하여 사바비 제국을 위해 사파비 제국령이었던 칸다하르에 보내져서 그곳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기오르기 11세는 자기가 맡은 장소를 마치 자신이 점령한 땅처럼 대하면서 수많은 파슈툰족을 노예처럼 부렸다.또한 1707년에는 칸다하르가 무굴 제국과 사파비 제국 사이의 분쟁에도 휘말렸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길지 추장들 사이에서 선망이 두텁고 권력도 있었던 호타크를 지지했었다.
2.2. 유배와 반란
호타크 역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였으나 반란이 실패하여 기오르기 11세에게 투옥되어 사파비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파한으로 끌려가서 유배되었다.페르시아 궁정에서 일했던 그는 페르시아군의 약점이나 상황을 주시했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메카에 성지 순례를 갈 때에도 사파비 제국이 수니파였던 파슈툰족들에게 강제로 개종하는 것을 막으려 했었다.
이후 1709년 4월, 미르와이스는 자신들을 추종하는 부족들을 이끌고 칸다하르의 파슈툰족 백성들을 모아서 반란을 이끌었다.
소풍을 가있던 기오르기 11세를 처리한 후 미르와이스는 페르시아의 통치가 끝났다고 주장했다.
이후에도 이스파한에서 키질바시와 조지아인 군인을 보내서 그의 반란을 진압하라고 했지만 도리어 파슈툰족 백성들에게 패배했다.
미르와이스는 자신을 황제라 칭하는 걸 바라지 않았으며 오히려 많은 파슈툰족들에게 "국군의 아미르"라 불렸다.
1715년 11월, 미르와이스는 자연사했다. 코카란에 미르와이스를 위해 세워진 영묘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