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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12:47:18

미토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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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미토 번
水戸藩
파일:img-map-mito.png
중심지
이바라키현 미토시
다이묘 미토 도쿠가와 가문
고쿠다카 35만 석

1. 개요2. 상세3. 역대 미토 번주4. 메이지 시대 이후 역대 미토 도쿠가와 가문 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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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가와 가문의 고산케 중 하나로, 현재의 이바라키현 미토시 일대를 다스린 일본의 옛 이다.

2. 상세

이 지역을 다스리던 사타케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애매하게 있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아키타로 쫓겨났다. 이에야스의 5남 다케다 노부요시가 들어왔으나 21세로 요절했고, 10남 도쿠가와 요리노부가 미토를 받았지만 곧 슨푸로 이봉되어 최종적으로는 11남 도쿠가와 요리후사가 미토성(水戸城)을 차지했다. 이후에 막부 말기 때까지 도쿠가와 가문이 직접 미토를 통치했었다.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관련된 사찰 등 여러 유적들이 많이 보인다. 도쿠가와 뮤지엄도 이곳에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품들이 다수 전시되었는데, 가장 인기있는 전시품으로는 도쿠가와가 썼던 검의 도신인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가 있다. 대개 이것을 보러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산케 중에서는 가격으로나 고쿠다카로나 가장 아래 대우를 받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쇼군 자리는 오와리나 키슈 도쿠가와 가문에서 나오도록 하고 미토 도쿠가와 가문은 이를 보좌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막부 수도 에도에서 가장 가깝기도 해서 중앙에서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상당했다. 참근교대를 수행하지 않고 계속 에도에 머무를 의무가 있어 재정난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쇼군의 보좌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정식 직함은 아니지만 속칭 부쇼군(副将軍)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대일본사'를 편찬하는 등 번주 가문에서 일본 역사 및 국학 연구를 지원했으며, 유학을 숭상하는 가풍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막말 존황양이 사상의 기반이 된 소위 '미토학'의 정립으로 이어졌다. 또한 미토 사무라이들은 사상적으로 완고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악명이 높아 1860년 사쿠라다문밖의 변으로 안세이 대옥의 책임자 이이 나오스케를 참살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탈번 낭인들이 양산되어 일본 곳곳에서 존황양이 테러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막부말, 무진전쟁쯤 되면 번주와 지도부는 좌막파인데 하급무사들은 오히려 존황양이파의 정신적 고향이라 할만큼 유신지사들을 많이 쏟아냈고, 양쪽 모두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고지식한 성리학자들이라 결국 좌막파, 도막파가 번갈아가며 서로 피의 숙청을 벌이다가 타이밍을 계산하는 것 자체도 최악으로 막부가 건재할 때는 도막파 세력인 텐구당이 집권해서 막부한테 응징을 당했고 막부가 무너졌을 때는 반대로 좌막파 세력인 쇼세이당이 집권해서 신정부한테 응징을 당했다. 그러니까 미토 번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서 처참한 보복만 연속으로 당했다. 또한 중앙정부로 진출해서 영향력이라도 행사한 다른 번들에 비해 미토 번은 번 내에서 내전을 치루느라 중앙정부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가문이 번창하여 에도 시대는 물론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이후, 심지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계 후사가 전혀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으며[1], 오히려 많은 아들들이 대가 끊긴 다른 가문에 양자로 입적했다. 대표적인 예가 고산쿄 히토쓰바시 가문을 이은 도쿠가와 요시노부. 심지어 막말로 가면 미토 본가에 더해 쇼군 요시노부, 고산케의 오와리 도쿠가와가, 고산쿄의 히토쓰바시가와 시미즈가까지 모두 미토 가문 출신 양자 또는 그 후손들로 채워질 정도가 되었다.[2]

미토 번은 본디 에도 막부의 시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가의 직계혈통이 끊길 경우를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방계혈통 가문으로서 본래는 본가를 보필하는 분가이자 친위세력인데, 정작 이 미토 번에서 퍼진 사상이 에도 막부를 종식시키는 시대정신이 되어버렸고 본가가 멸망당한 후 당연히 분가인 자신들도 메이지 신정부에 같이 토벌당했으니 에도 막부 입장에선 아이러니컬하다. 하지만 미토 가문이 없었다면 친번 대부분이 애초에 후손이 없어서 망했고, 요시노부나 미토계 다이묘들 또한 도쿠가와 가문이 제때 항복하여 가문을 그나마 잘 보존하고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는 데 기여했으니 미토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일본 옛이야기의 주인공인 미토 고몬, 도쿠가와 막부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미토 도쿠가와 가문 출신이다.

3. 역대 미토 번주

4. 메이지 시대 이후 역대 미토 도쿠가와 가문 당주


[1] 물론 양자를 받아온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미토의 지번이자 분가 중 하나인 사누키 타카마츠 번에서 가주의 친조카 또는 종손자(조카의 아들)뻘 되는 친척을 양자로 받아서 초대 요리후사의 혈통 자체는 끊어지지 않았다. 본가뿐 아니라 미토의 분가인 타카마츠, 모리야마, 후츄, 시시도 마츠다이라의 4개 지번 또한 직계가 끊긴 경우는 있어도 그때마다 미토 본가 또는 미토계 분가에서만 양자를 받아들여 후사를 이었기 때문에 이들 가문 또한 미토 본가처럼 여전히 요리후사의 혈통이 이어지고 있다.[2] 최종적으로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화족제도 도입 이후 작위를 수여받은 구 도쿠가와 성의 친번 가문 중 미토 계 혈통의 당주를 받아들인 역사가 없는 곳은 후작가인 구 고산케 키슈와 백작가인 구 고산쿄 타야스, 단 2가문뿐이었다.[3] 이 사람의 대에 대일본사(大日本史)가 완성되었다.[4] 現 미토 도쿠가와 가문 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