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82년 11월 6일 |
경상도 예안현 읍내면 만촌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304번지) | |
사망 | 1968년 1월 30일 |
경상북도 문경군 점촌읍 | |
본관 | 여흥 민씨[1]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12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82년 11월 6일 경상도 예안현 읍내면 만촌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304번지)에서 아버지 민병일(閔丙鎰, 1865 ~ 1909.9.20.)[2]과 어머니 영천 이씨(1860 ~ 1913.11.25.)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민병석(閔丙錫, 1856 ~ 1904. 12. 6)에 입양되었다.#1919년 3월 17일 예안면장인 신상면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여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그러던 중 일본 경찰들이 군중 25명을 연행하자, 그는 격분해 군중의 선두에 서서 주재소로 달려가 그곳을 포위하고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무력을 행사하며 제지하자, 투석으로 맞서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고 일본 경찰 3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시위대열의 앞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곧 안동 주둔 일본군 수비대가 나타나서 공포를 쏘아대며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고, 이어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펼쳤다.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문경군 점촌읍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8년 1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민태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를 1989년 10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