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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무어/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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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2.1. 1958-59 시즌2.2. 1959-60 시즌2.3. 1960-61 시즌2.4. 1961-62 시즌2.5. 1962-63 시즌2.6. 1963-64 시즌2.7. 1964-65 시즌2.8. 1965-66 시즌2.9. 1966-67 시즌2.10. 1967-68 시즌2.11. 1968-69 시즌2.12. 1969-70 시즌2.13. 1970-71 시즌2.14. 1971-72 시즌2.15. 1972-73 시즌2.16. 1973-74 시즌
3. 풀럼 FC
3.1. 1973-74 시즌3.2. 1974-75 시즌3.3. 1975-76 시즌3.4. 샌 안토니오 선더 (임대)3.5. 1976-77 시즌
4. 잠정 은퇴 기간5. 시애틀 사운더스 FC6. 헤르닝 프레마드7. 캐롤라이나 라이트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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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mooreforwestham.jpg
Bobby Moore
바비 무어의 클럽 경력을 설명하는 문서이다.

2.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2.1. 1958-59 시즌

파일:1958moorewithandysmillieandtonyscott.jpg
웨스트햄 1군 팀 콜업 당시 앤디 스마일리, 토니 스콧과 함께
무어의 멘토이자 1군 선수였던 말콤 앨리슨이 결핵으로 인해 커리어를 중단하게 되면서 빈자리가 생겼고, 그 빈자리로 무어가 들어왔다. 무어는 당시 17세였고 포지션은 레프트 하프였다. 1958년 9월 8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경기에서 역사적인 1군 팀 데뷔전을 가졌다. 무어는 데뷔하자마자 등번호 6번을 달았다. 이 시즌, 리그에서 5경기 출전했고 FA컵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웨스트햄은 이 시즌 리그 6위에 올랐고, FA컵에서는 3라운드에서 토트넘을 만나 2-0으로 패배하며 탈락했다.

2.2. 1959-60 시즌

1959-60 시즌, 무어는 리그에서 출전 수를 좀 더 늘렸다. 이번 시즌에는 리그 13경기에 출전했다. FA컵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는 리그 14위를 기록했고, FA컵에서도 3라운드에 바로 진출했지만 허더스필드 타운 FC와 무승부를 기록한 후 재경기에서 패하며 탈락을 맛보았다.

앞으로 많은 경기를 함께하게 될 동지 제프 허스트가 이 시즌에 웨스트햄 1군 데뷔 경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2.3. 1960-61 시즌

이 시즌, 잉글랜드 축구계에는 의미있는 변화가 있었다. 풋볼 리그 컵이 출범한 것이 그것이다. 무어에게도 의미가 있는 해였다. 1960년 12월 17일에는 리그에서 울버햄튼 원더러스 FC를 상대로 데뷔골을 득점하며 5-0 승리에 기여했다. 1961년 3월에는 웨스트햄의 사령탑에 1950년부터 약 11년동안이나 머물러 있던 전임 감독 테드 펜튼이 리그에서의 부진으로 인해 조용히 경질된다. 구단주 레지널드 프렛은 그 자리에 론 그린우드를 불러오게 된다. 무어의 실력은 그린우드의 눈에 띄게 된다. 그린우드는 무어를 구단의 핵심 선수로 키우기로 결정했다.

무어는 이 시즌 리그 42경기 중 38경기에 출전하며 웨스트햄의 확고한 주전 하프백으로 올라섰고, FA컵에서는 데뷔전을 치름과 더불어 모든 경기를 뛰었다. 다만 작년과 마찬가지로, 3라운드부터 바로 경기를 진행했으나 스토크 시티 FC에게 2-2무승부 이후 2차전에서 0-1 패배를 당하며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리그컵에서는 두 경기를 뛰었고, 한 골을 넣었다. 1960-61시즌 총 42경기 2골을 기록했다. 무어는 시즌이 끝난 시점에서 만 20세를 갓 넘긴 선수였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유나이티드 FC는 1960-61시즌 FA컵 3라운드, 리그 16위, 리그컵 2라운드의 성적을 냈다.

2.4. 1961-62 시즌

파일:1961-62moore.jpg
1961년 9월, 업튼 파크에서
20대가 된 무어는 어느새 팀의 부주장이 되었다.

하지만 웨스트햄의 성적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시즌에는 무어와 제프 허스트 등 젊은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재구성했다는 데에 의의를 두어야 했다. 1959년 1군 팀에 처음으로 올라왔던 마틴 피터스가 1961-62시즌에 리그에서 데뷔하기도 했다. 리그에서는 8위에 올라서며 성적이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FA컵 3라운드에서 플리머스 아가일 FC에 3-0으로 패하며 또 조기 탈락했다. 그와 반대로, 리그컵에서는 플리머스 아가일을 3-2로 꺾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다음 라운드에서 아스톤 빌라에 3-1로 패하며 또 떨어졌기 때문이다.

1958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었다. 비단 17세의 펠레 뿐만이 아니고, 공격형 풀백과 센터백 두 명을 두어 새로운 4-2-4 포메이션을 사용했다. 축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유럽의 몇몇 팀은 이를 자신들의 전술에 녹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SL 벤피카의 구트만 벨러 감독은 4-2-4 포메이션을 완벽하게 완성시켰고, 마리우 콜루나, 에우제비우 등의 선수들과 함께 큰 성공을 거두었다. 무어의 소속팀 웨스트햄 역시 그렇게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던 팀 중 하나였다.

1군 팀에서 무어는 주로 고전적인 스타일의 하프백으로 기용되어 왔었다. 1962년 2월 어느 날 그린우드는 레스터 시티와의 경기를 앞두고 무어를 훈련장 한쪽으로 끌어냈다. 그는 무어에게 '나는 네가 뒤로 물러나서, 더 깊게 플레이하고, 여유로운 플레이를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무어는 곧장 경기장에 들어가 그린우드가 시킨 대로 했다. 무어는 켄 브라운과 함께 센터 하프로 뛰면서 수비라인을 사실상 포 백 라인으로 만들었다.

그 당시 아무도 무어의 새로운 역할을 반기지 않았고 이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예상한 사람 또한 없었다. 그러나 론 그린우드는 중앙 미드필더였던 제프 허스트에게 공격수로 뛸 것을 권유하여 대성공을 거둔 바 있었다. 무어에게도 그린우드의 한방이 먹혔다. 무어는 즉시 파트너 켄 브라운의 문제점을 보완해 주었다. 브라운이 센터 포워드들과 맞설 때, 무어는 뒷공간에서 다음 플레이를 준비했다. 혼잡한 중원 싸움에서 뒤로 빠진 것 덕에 무어의 훌륭한 판단력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어는 말콤 앨리슨의 가르침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항상 통찰력이 있었고, 경기장에서 그것을 십분 활용했다.

보다 깊은 위치에서 플레이하게 된 무어는 부족한 속도를 뛰어난 판단력으로 커버할 수 있게 되었다. 파트너 켄 브라운이 공중볼 경합을 대부분 해 주었기 때문에, 헤더를 싫어하는 성향 역시 더 이상 단점이 아니었다. 무어는 헤더를 익히는 대신 가슴 트래핑을 완벽하게 마스터했다.

존 모이니한의 표현대로, 무어는 '4-2-4, 4-3-3. 즉 '새로운 시대의 축구'를 위해 만들어진, 모델 같은, 부드러운 런던 축구선수'였다. 축구계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무어는 그것에 적응할 수 있는 모든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론 그린우드는 자부심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무어는 자신의 니치를 찾아냈어."

무어는 리그 42경기 중 41경기에서 뛰면서 3골을 기록했다. FA컵에서는 1경기 0골, 리그컵에서는 2경기 0골을 기록했다. 무어는 1961-62시즌이 끝나고 바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2.5. 1962-63 시즌

파일:1962-63 moore.jpg
1962년 8월, 업튼 파크에서
론 그린우드는 잉글랜드 유스 대표팀 지도자 생활을 할 당시 유스 선수들에 대한 안목을 상당히 높여둔 감독이었고, 무어에게 엄청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하였다. 그 결과, 무어는 아직 21살에 불과했지만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의 주장에 선임되었다.

야심차게 찬 주장 완장이었으나 1962-63 시즌의 시작은 좋지 않았다. 리그 1라운드부터 5라운드까지 한 경기도 승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6라운드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며 좋지 않은 흐름을 끊어냈다. 무어는 1962년 11월 3일 웨스트햄의 홈구장에서 진행된 리그 16라운드 경기에서 볼튼 원더러스를 상대로 한 골을 득점했지만 팀은 패했다.

20라운드부터 23라운드까지 4연속 무승부를 기록했고, 시즌 후반기에는 전체적으로 들쑥날쑥한 성적을 냈다. 웨스트햄은 24라운드부터 42라운드까지 19경기동안 무승부 2개만을 기록했고, 9승 8패를 기록했다. 무어는 20라운드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전에서 1962-63 시즌 두 번째 리그 득점을 올렸으며, 24라운드에서는 노팅엄 포레스트를 상대로 결승골을 득점하며 4-1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리그 최종 순위는 12위였다.

웨스트햄이 이 시즌에 보여준 FA컵에서의 도전은 괄목할 만 했다. 무어가 데뷔한 후 매번 빛의 속도로 탈락했던 웨스트햄이었지만, 이번 시즌만큼은 달랐다. 바로 진출한 3라운드에서는 풀럼을 재경기 끝에 꺾어버리더니, 다음 라운드에서는 스완지 타운를 꺾으며 5라운드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4라운드에서는 무려 에버튼을 꺾어버렸다. 엄청난 기세였다. 어느새 8강전이었다. 하지만 8강전 상대는 빌 샹클리 감독이 이끄는 리버풀이었다. 웨스트햄 선수들은 상당히 분전했지만 1-0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FA컵에서 오랜만에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은 다음 시즌의 모습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역시 리그컵에서는 별 성과가 없었다. 2라운드에 바로 진출하여 플리머스 아가일을 또 만났고 6-0으로 대승을 거두며 3라운드에 손쉽게 진출했지만, 3라운드에서 로더햄 유나이티드에 3-1로 패배하며 무너졌다.

1961-62 시즌에는 제프 허스트, 1962-63 시즌에는 마틴 피터스가 각각 웨스트햄의 주전 선수로 올라섰다. 많은 것이 변하고 있었다. 웨스트햄은 상당히 젊은 팀이었다. 그리고 이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성적은 별로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축구를 하는 팀'으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무어는 이 시즌 모든 대회 합쳐서 47경기를 뛰었고, 켄 브라운과 함께 1962-63 시즌 팀 내 최다 출전 기록자로 이름을 남겼다.

2.6. 1963-64 시즌

1963-64시즌 리그 성적은 평범했다. 14위를 기록했다. 무어는 37경기에 출전해 두 골을 넣으며 평범한 활약을 했다. 별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 시즌의 웨스트햄은 컵대회 깡패였다. 먼저 리그컵에서는 바로 진출한 2라운드에서 레이튼 오리엔트를 꺾더니 3라운드에서는 아스톤 빌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4라운드에서는 스윈든 타운을 상대로 재경기 끝에 승리했고 5라운드에서는 워킹튼을 상대로 6-0 대승을 거둔다. 대회 내내 무어를 중심으로 제프 허스트, 마틴 피터스, 골키퍼 짐 스탠든, 10대의 윙어 존 시슨스 등이 특히 맹활약했다. 준결승전 상대는 레스터 시티였다. 하지만 레스터 시티에는 국가대표팀에서 알프 램지의 신임을 얻어 주전 자리를 보장받은 최고의 수문장 뱅크스가 있었다. 물론 무어 역시 국가대표였지만 말이다. 이 경기는 상당한 빅 매치였다. 먼저 1차전에서는 레스터 시티가 4-3으로 진땀승을 거두었다. 웨스트햄은 궁지에 몰렸다. 2차전에서 승리해야 했다. 홈에서 야심차게 2차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레스터 시티는 강했다. 결국 1964년 3월 23일에 펼쳐진 2차전에서도 0-2로 패하며 또 고배를 마셨다. 그래도 훌륭한 도전이었다. 여담으로, 웨스트햄을 꺾고 결승전에 진출한 레스터 시티가 리그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래도 FA컵이 남아 있었다. 웨스트햄은 FA컵에서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선전하며 찰튼 애슬래틱, 레이튼 오리엔트, 스윈든 타운, 번리를 차례로 꺾었다. 그리고 준결승전에서 데니스 로[1], 바비 찰튼이 버티고 있던 리그 2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만났음에도 3-1로 승리를 거두었다.
맨유를 무너뜨린 웨스트햄
이로써 웨스트햄은 1922-23 시즌에 이어 41년만에, 팀 역사상 두 번째로 FA컵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바비 무어, 제프 허스트 등의 황금 멤버진을 갖춘 만큼 꼭 우승해야 했다.
파일:1963-64beforefacupfinal.jpg
FA컵 결승전을 앞두고 유쾌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는 해머스
웸블리에서 열리는 결승전의 상대는 랭커셔 주 프레스턴에 연고를 둔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였다. 맨유보다는 확실히 쉬운 상대였지만 방심해서는 절대 안 되는 강력한 팀이었다.
무어의 FA컵 결승전 활약상
무어는 태클 4회, 인터셉트 7회, 20회 이상의 롱패스 성공을 기록하는 등 공수 양면으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팀의 3-2승리를 이끌었다. 이는 그의 첫 우승 트로피였으며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의 긴 역사에서도 처음으로 획득한 메이저 대회 트로피였다.[2]
파일:FA컵을 들어올리는 부어.png
FA컵을 들어 올리는 바비 무어
리그컵과 FA컵에서 웨스트햄이 일으킨 돌풍은 센세이셔널했고, 그 중심에 있던 캡틴 무어는 시즌 종료 후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 무렵, 알프 램지의 신임을 얻어 국가대표팀에서 공식 주장이 되기도 했다.

1964년은 무어에게 있어 정말 환상적인 해였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주 위험했던 해이기도 했다. 1964년, 23세밖에 안 된 나이에 고환암 진단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무어는 연말에 수술을 통해 종양을 제거했지만, 그 후 5년동안 정기적으로 암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검진을 받아야 했다.

2.7. 1964-65 시즌

웨스트햄은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1964년 8월 15일에 열린 FA 채리티 실드에 참가했다. 상대팀은 리그 우승팀 리버풀이었고 경기는 안필드에서 열렸다. 웨스트햄은 리버풀을 상대로 잘 버텼고, 2-2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리고 실드를 공유했다. 그래서 1964년 채리티 실드의 우승팀은 두 팀이다.

1964-65 시즌에도 리그에서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승점 42점으로 9위에 올랐다. 재미있는 점은 홈에서 14승 2무 5패로 강한 모습을 보인 반면 원정에서 5승 2무 14패를 기록하며 홈&원정 성적이 서로를 거울에 비춘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무어는 리그 초반에 부상으로 빠져 전반기의 절반 정도를 그대로 날려먹었으나 후반기에 거의 모든 경기에서 출전하며 28경기 1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1964년 연말의 발롱도르 투표에서, 무어는 5위표 한 장을 받으면서 공동 19위에 이름을 올렸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라는 약소팀 소속으로 가장 권위있는 상의 후보에 이름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득표를 기록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23세였다.

무어가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FA컵이 진행되었다. 웨스트햄은 3라운드에 바로 진출했고, 3라운드 상대였던 버밍엄 시티 FC를 상대로 4-2승리를 거두었다. 무어가 없어도 해볼 만 한 것 같았다. 다음 상대는 같은 런던에 연고를 둔 첼시 FC였다. 첼시는 만만치 않은 팀이었다. 웨스트햄에는 무어가 없었고, 결국 0-1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래서 무어는 이 시즌 FA컵 출전 기록이 없다. 리그컵도 마찬가지였다. 무어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었으며 웨스트햄은 2라운드에 바로 진출했지만 첫 상대였던 선덜랜드에 4-1로 완패하며 굴욕을 맛봤다.

웨스트햄은 1963-64 시즌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1964-65 시즌의 UEFA 컵 위너스컵에도 참가했다. 무어가 이끄는 웨스트햄은 1라운드에서부터 벨기에 컵 우승팀 K. A. A. 겐트를 꺾었고, 2라운드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컵 우승팀인 스파르타크 프라하 소콜로보를 꺾었다. 8강에서 스위스의 로잔 스포르트에게도 승리를 거두었고, 4강전에서는 코파 델 레이 우승팀인 레알 사라고사까지 꺾어버렸다! 즉, 웨스트햄은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참가한 UEFA 주관 대회에서 한 번에 결승전에 오른 셈이 된다.
바비 무어 vs TSV 1860 뮌헨
그리고 TSV 1860 뮌헨을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어 결국 첫 참가한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되었다. 위 영상에서는 누락되었지만, 무어는 앨런 실리의 결승골이 터지기 직전 간접 프리킥을 정확하게 처리하여 골에 크게 기여했다. 3년 전만 해도 리그 중하위권+컵대회에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는 팀이었으나, 어느새 UEFA가 주관하는 대회의 트로피까지 들어올리는 수준의 성과를 만들어 낸 웨스트햄은 유럽에서 꽤 주목받는 팀이 되었다.
파일:1964-65cupwinnerscupcelebrate.jpg
마틴 피터스와 제프 허스트의 어깨 위에 올라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무어

2.8. 1965-66 시즌

파일:1965-66withpeters.jpg
1965년 8월, 마틴 피터스와 함께
리그 순위는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이번 시즌에도 12위에 그쳤다. 무어는 리그 37경기에 출전해 0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웨스트햄은 컵대회에서 항상 강한 면모를 보였다. 리그컵에서 특히 이 부분이 두드러졌다. 웨스트햄은 1부 리그 팀이어서 2라운드부터 합류했고, 브리스톨 로버스 FC와 맞붙었다. 재경기 끝에 웨스트햄이 3라운드에 진출했다. 3라운드 상대는 맨즈필드 타운 FC였다. 웨스트햄은 손쉽게 승리했다. 4라운드에서는 로더햄 유나이티드와 맞붙어 승리했다. 5라운드는 그림스비 타운과의 경기였고 재경기 끝에 웨스트햄이 승리했다. 4강전부터는 홈과 원정에서 한 경기씩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4강 상대는 카디프 시티였다. 웨스트햄은 홈경기에서 5-2로 승리했고, 2개월 후 펼쳐진 원정 경기에서는 1-5로 승리했다. 합산 스코어 10-3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1963-64시즌에는 레스터 시티에 막혔으나 이번 시즌만큼은 웨스트햄을 막아서던 레스터도 없었다. 결승 상대는 WBA였다.

무어는 결승 1차전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며 2-1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결승 2차전에서 4골을 실점하며 패배했다. 웨스트햄은 득실차 때문에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에게 우승컵을 내주고 말았다.

FA컵에서는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웨스트햄은 3라운드에 직행했지만 올덤 애슬래틱을 상대로 승리를 따내지 못했고, 재경기 끝에 힘겹게 4라운드에 진출했다. 4라운드 상대는 블랙번 로버스였다. 웨스트햄의 홈인 업튼 파크에서 3-3무승부가 나와버렸고, 원정 경기는 당연히 불리했다. 결국 블랙번의 승리. 이번에도 빠르게 탈락했다.

UEFA 컵 위너스 컵에도 또 참가했다. 웨스트햄은 디펜딩 챔피언이라서 2라운드부터 경기를 치렀다. 그리고 올림피아코스 CFP를 상대로 1, 2차전 합산 스코어 6-2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과연 디펜딩 챔피언다웠다. 8강 상대는 FDGB-포칼 챔피언 1. FC 마그데부르크였다. 이번에는 1, 2차전 합산 스코어 2-1로 승리를 거두었다. 4강 상대는 DFB-포칼 우승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였다. 업튼 파크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피터스가 골을 넣었음에도 에머리히에게 두 골을 연달아 내주며 패했다. 아쉬운 결과였다.
바비 무어 vs 보루시아 도르트문트[3]
2차전은 BVB의 홈구장 슈타디온 로테 에어데에서 열렸다. 무어는 아주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결국 에머리히에게 또 멀티골을 허용하며 3-1로 패했고 합산 스코어 5-2가 되어 별 수 없이 탈락했다. 웨스트햄을 꺾고 결승에 오른 도르트문트는 결국 1964-65 시즌 FA컵 챔피언인 리버풀 FC를 꺾고 우승했다.

두 개의 컵 대회에서 4강 이상의 성적을 냈지만 무관으로 마친 아쉬운 시즌이었다. 무어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주장이었기 때문에, 시즌 종료 후 곧바로 월드컵을 준비했다.

2.9. 1966-67 시즌

무어는 1966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축구계의 주류 전술로 완전히 자리매김한 포 백 시스템에 적응하여 좀 더 수비적인 위치에 고정되어 플레이하게 된다. 이제는 완전히 센터백이 된 것이다.
파일:HurstMoorePeters.jpg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을 이끈 웨스트햄 3인방
무어는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의 주장을 맡아 서독을 4-2로 꺾고 우승함으로써 1965-66 시즌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준결승전에서 웨스트햄을 제대로 물 먹였던 로타어 에머리히에게 제대로 복수했다.
웨스트햄&첼시 팬들에게 크게 환영받는 웨스트햄 3인방 [4]
8월에는 영국에서 자체적으로 선정한 '월드컵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래는 그 상을 들고 자세를 잡는 무어의 사진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Player of the World Cup이라는 글씨가 잘 보인다.
파일:1966-67playeroftheworldcupaward.jpg
월드컵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한 무어
1966-67 시즌, 무어는 특이하게 등번호 5번을 선택하고 시즌을 진행했다.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려는 뜻이었을까? 하지만 웨스트햄의 1966-67 시즌 리그 성적은 다른 시즌과 다를 것 없이 평범했다. 최종 16위를 기록했다. 무어는 리그 40경기에 출전해 두 골을 득점했다.

리그컵에서는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1부 리그 팀인지라 2라운드에 바로 진출했고, 1966년 9월 14일에 펼쳐진 2라운드 경기는 토트넘 핫스퍼전이었다. 나름 중상위권 클럽인 토트넘을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며 나쁘지 않은 출발을 알렸다. 3라운드 상대는 30년대의 강자 아스널 FC였다. 웨스트햄은 무어가 종횡무진 활약하는 가운데 아스널을 1-3 으로 눌러 버렸다. 그것도 하이버리에서. 그리고 다음 라운드 상대는 리즈 유나이티드였다. 돈 레비가 이끄는 리즈는 엄청나게 강한 팀이었다. 승격 시즌인 1964-65시즌에 리그 2위를 기록했고 1965-66시즌에도 리그 2위를 기록했던 잉글랜드의 떠오르는 강호였다. 빌리 브렘너, 잭 찰튼 등 유수의 스타플레이어들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즈 유나이티드는 1966-67시즌 리그컵 4라운드에서 웨스트햄에게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무려 7-0으로 깨져버린 것. 웨스트햄은 5라운드에서도 블랙풀 원정 경기에서 1-3 승리를 챙기며 준결승에 도달했다. 준결승전 상대는 작년에 웨스트햄의 리그컵 우승을 좌절시켰던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이었다. 그러나 경기 양상은 지난번과 똑같았다. 원정에서 4-0으로 깨지고 홈에서 2-2로 비기면서 합산 스코어 6-2로 패했다. 결국 4강에 그치며 꿈을 또 접어야 했다. 토트넘, 첼시, 아스널 탈락시켜 놓고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에게 졌던 특이한 시즌이다. 물론 그 때는 지금보다 팀 간 전력 차이가 훨씬 적긴 했다.

1966년 연말, 무어는 웨스트햄의 컵대회 선전을 이끈 공로와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을 이끈 공로를 통해 발롱도르 투표에서 상당히 많은 표를 얻어내며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4위에 올랐고[5] 'BBC 올해의 스포츠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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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무어와 에우제비우
FA컵에서는 3라운드에 바로 진출했으나 스윈든 타운에 승리를 거두지 못하더니 이어진 재경기에서 3-1 충격패를 당하며 체면을 구겼다. 사실 이 시즌에 거둔 성적이 무어 시절 웨스트햄의 가장 평균적인 모습이었다. 국가대표팀 주전 멤버가 세 명이나 될 정도로 멤버 구성이 좋았지만 희한하게도 그다지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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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리그 경기 시작 전 악수하는 찰튼과 무어

2.10. 1967-68 시즌

1967년에 무어는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6]을 받기도 했다. #

1967-68 시즌, 웨스트햄은 순위를 조금 끌어올렸다. 12위로 반등하며 1966-67시즌에 비해 네 계단 더 오른 순위를 기록했고, 나름 평범한 시즌을 보냈다. 무어는 리그 40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득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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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리그 경기에서 데니스 로에게 태클을 시도하는 무어
리그컵에서는 2라운드부터 월솔 FC, 볼튼 원더러스 FC를 큰 점수차로 꺾으며 또다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4라운드 상대인 허더스필드 타운에게 2-0으로 패하고 만다. 기회는 또 무산되었다.

FA컵에서는 번리와 스토크 시티를 상대로 무실점 승리를 거두며 5라운드에 진출했다. 하지만 5라운드에서 셰필드 유나이티드에게 1-2로 아쉽게 패해 탈락하고 말았다. 무어에게는 별 수가 없었다. 1967년 열렸던 유로 1968예선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낸 덕에 유로 본선에서 뛸 기회가 생겼고, 무어는 시즌 종료 후 곧바로 유로 1968을 준비하게 된다.

2.11. 1968-69 시즌

유로 1968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결국 3위에 그친 잉글랜드 대표팀. 무어는 대회 베스트팀에 오르며 활약을 인정받았으나 우승컵을 들지 못한다면 역시 베스트팀 따위는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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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7월, 업튼 파크에서
웨스트햄은 리그에서 승점 44점을 쌓으며 8위에 올랐다. 오랜만에 리그 10위 안에 들었으니 나름 좋은 성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무어는 41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득점했다.

리그컵에서는 망신이 계속되었다. 볼튼을 7-2로 뭉개버리며 좋은 출발을 하는가 싶더니, 2라운드에서 코벤트리 시티를 못 잡고 재경기까지 해서 결국 졌다.

FA컵에서도 마찬가지다. 3라운드에서는 브리스톨에게 승리했고 4라운드에서는 허더스필드 타운 원정에서 0-2 승리를 얻어냈지만, 5라운드에서 맨즈필드 타운에 3-0으로 패배하며 체면을 구겼다.

2.12. 1969-7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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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축구 월간지의 앞면을 장식한 무어와 피터스
웨스트햄의 리그 잔혹사는 끝날 줄을 몰랐다. 홈에서 강하고 원정에서는 극단적으로 약해지는 성향이 매 시즌을 진행할 때마다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홈에서 치른 21경기에서는 8승 8무 5패를 기록했으며 원정에서 치른 21경기에서는 4승 4무 13패를 기록했다. 그리고 리그 22개 팀 중 17위밖에 기록하지 못하며 최악의 부진을 겪었다. 무어는 40경기에 출전하여 0골을 기록했다.

웨스트햄은 리그컵과 FA컵에서도 부진했다. 말 그대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리그컵에서는 할리팍스 타운에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3라운드에서 노팅엄 포레스트에 1-0으로 패하며 조기 탈락했고, FA컵에서는 3라운드에서 바로 미들스브로 FC에 2-1로 패하며 탈락했다. 그러나 웨스트햄의 성적이 아무리 형편없었어도 무어, 허스트, 피터스 이 3인방만큼은 국가대표팀에서 대체가 불가능한 핵심 자원이었다.

무어는 웨스트햄의 거지같은 리그 순위에도 불구하고 1970년 4월, 이 달의 선수상 개념의 개인상을 하나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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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 개인상을 수상하는 무어
알프 램지 감독도 당연히 이들을 월드컵 대표팀에 승선시켰다.

무어는 1970년 월드컵을 앞두고 귀금속 절도 사건에 연루되며 체포되었고 언론의 집중 포격을 당했다. 이후 잘못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 풀려났다.

2.13. 1970-71 시즌

월드컵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며 그 실력을 만천하에 증명한 무어. 그러나 1970년의 무어는 개인적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다. 월드컵 기간이 끝난 이후, 익명의 괴한이 무어의 아내를 납치해 무어에게 1만 파운드를 요구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잘 해결되긴 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은 무어는 1970년 프리시즌의 친선경기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1970년 시즌 중에 진행된 산투스와의 친선경기에는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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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황제와 함께
여기에서 무어는 월드컵에서 만났던 펠레를 한 번 더 만났다. 두 선수는 양 팀에서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펼치며 2-2무승부를 이끌었다. 산투스는 웨스트햄과 마찬가지로 월드컵 영웅 세 명[7]을 보유한 팀이었다. 그 선수들이 모두 월드컵 전 경기에 출장하며 피로해진 탓에 1970년 후반기에 진행된 주립 리그와 전국 대회에서는 왕년의 산투스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1970년 월드컵에서 모든 것을 불태워 국가대표팀 3인방의 폼이 일시적으로 떨어진 것은 웨스트햄도 마찬가지였다. 1970-71 시즌, 웨스트햄의 리그 순위는 정말 나락으로 떨어졌다. 22팀 중 20위를 기록하여 정말 아슬아슬아게 강등을 면했다. 충격적인 순위였다. 무어는 39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넣었지만, 많이 출전하고 많은 골을 넣어도 순위가 이 따위라면 기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리그컵에서는 다행히 2라운드에서 바로 탈락하지는 않았다. 헐 시티를 상대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라운드에서 코벤트리 시티에 패했다. 웨스트햄은 더 이상 컵 대회의 다크호스가 아니었다.

무어는 1970년 월드컵의 모든 경기에서 어마어마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기에 유력한 발롱도르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리그와 국내 대회에서의 부진은 무어를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게 만들었고, 결국 연말의 발롱도르 투표에서 FC 바이에른 뮌헨 소속의 게르트 뮐러에게 7점 차이로 밀리며 최종 2위에 그쳤다. 그래도 수비수가 발롱도르 2위에 오른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아무도 며칠 뒤에 있을 충격적인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1970-71 시즌 FA컵은 '영웅의 굴욕' 그 자체였다. 웨스트햄은 1부 리그 팀이었고 3라운드부터 참가했다. 상대는 블랙풀 FC이었다. 무어는 경기를 앞두고 지미 그리브스, 브라이언 디어, 클라이드 베스트와 함께 밤늦게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며 통금시간을 어겼고 웨스트햄 감독 론 그린우드에게 벌금을 냈다. 당시 블랙풀 FC는 1970-71시즌 잉글랜드 1부 리그 최하위였고 시즌 말에 결국 강등된 팀이었는데, 웨스트햄은 당시 중위권 정도의 순위를 늘 지키던 팀이었으므로 웨스트햄 팬들은 당연히 웨스트햄이 승리하고 무난히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것으로 예상했다.
영웅의 굴욕
...그리고 로버트 무어의 암담한 모습입니다.[8]
블랙풀과의 경기 당시 해설자
그러나 전날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잔뜩 마신 무어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최악의 경기력을 보였고, 주장이 흔들린 웨스트햄은 리그 최하위 블랙풀에 4-0으로 패배하며 제대로 굴욕을 맛본다. 이 패배의 대가로 무어와 웨스트햄 선수들은 일주일 동안 구단으로부터 임금을 지불받지 못했다. 이 경기가 열린 날짜는 1971년 1월 3일, 그러니까 무어가 발롱도르 2위에 오른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이었다.

무어가 징계로 인해 경기에 나오지 못할 때, 브라이언 클러프가 무어를 더비 카운티에 영입하기 위해 상당히 애썼으나 무위에 그쳤다.

2.14. 1971-7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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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0월,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과의 리그 경기에서
지난 시즌의 부진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노력한 웨스트햄은 1971-72 시즌에는 리그에서 어느 정도 반등하는 데에 성공했다. 리그 14위에 올랐다. 지난 시즌보다는 확실히 나은 성적이었다. 무어는 리그 40경기에 출전하였고 리그 10라운드 스토크시티전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활약했다.

1971-72시즌, 웨스트햄의 풋볼 리그 컵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바로 진출한 2라운드에서는 카디프 시티를 상대로 고전했으나 결국 재경기 끝에 승리하며 3라운드에 진출했고, 3라운드에서는 리즈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0-0 무승부를 기록했으며 원정에서 재경기를 치른 끝에 0-1 승리를 챙겼다. 4라운드 상대는 리버풀이었다. 웨스트햄은 이변을 일으키며 리버풀을 2-1로 무너뜨렸다. 5라운드는 셰필드 유나이티드였다. 리버풀보다 훨씬 쉬운 상대였고, 웨스트햄은 5-0으로 승리했다. 무어는 리그컵에서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모든 경기에 출전했다. 준결승전 상대는 스토크 시티 FC였다. 두 팀의 전력은 비슷했다. 웨스트햄은 무어를 데리고 있었고 스토크 시티는 뱅크스를 데리고 있었다. 리그 성적은 스토크가 좀 더 좋았지만 스토크는 1971-72시즌 웨스트햄을 상대로 리그 전적이 1무 1패였기 때문에 막상막하의 승부가 예상되었다.

이 맞대결은 1차전에서 1-2로 원정팀 웨스트햄이 승리했다. 2차전에서는 원정팀 스토크 시티가 1-0으로 앞선 채 정규시간이 끝났고 합산 2-2의 점수였기 때문에 연장전이 진행되었으나, 이 연장전에서 제프 허스트의 페널티킥을 고든 뱅크스가 막아버리며 제 3의 구장에서 3차전을 치르게 되었다. 대결은 해를 넘겼다. 1972년 1월에 진행된 3차전 역시 연장 승부 끝에 0:0 무승부가 터져나오며 또 비겼다. 그래서 또 다른 구장에서 4차전이 진행되었다.

바로 올드 트래포드...

이미 지겹게 서로의 얼굴을 봤으므로 더 이상 서로의 얼굴을 보기 싫어서라도 온 힘을 다했고, 그 결과 어마어마한 명승부가 펼쳐졌다. 당시 비가 잔뜩 내린 그라운드 위에서 경기가 펼쳐졌고, 아니나 다를까 부상자가 발생한다. 경기 초반에 웨스트햄 골키퍼 '바비 퍼거슨'이 심하게 미끄러지면서 부상을 입어 잠시 필드 밖으로 빠지게 되었다.

당시 EFL컵의 교체 시스템은 그야말로 '남자의 축구'를 대변했다. 교체명단에는 단 한 명만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웨스트햄 감독 론 그린우드는 한 명만 올릴 수 있는 교체명단에 당연하게도 골키퍼를 올리지 않았고, 때문에 교체할 골키퍼가 없어서 바비 퍼거슨이 부상에서 돌아올 때까지 웨스트햄 선수 한 명이 대신 골키퍼 자리에 있어야 했는데, 별 일 없을 것이라 생각한 웨스트햄 주장 바비 무어가 대신 골키퍼 위치에 들어갔다. 그런데... 페널티 박스 안에서 웨스트햄 수비진이 금세 파울을 저지르고 말았다. 골대에 서서 반칙을 바라보던 무어는 당연히 매우 당황했다. 아무 생각 없이 장갑 꼈다가 졸지에 페널티킥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 어쩔 수 없이 서게 된 골대... 11m의 거리에서 날아오는 슛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무어. 그리고 슈팅이 날아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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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대에 선 무어
무어가 페널티 킥을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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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탈해하는 무어
하지만 아쉽게도 세컨볼을 막지 못했고 그대로 실점하고 말았다. 그 후로 골을 주고받다가 3-2로 스토크 시티가 승리를 거두어 결승전에 진출했다. 1971-72 시즌의 풋볼 리그컵 준결승전은 4차전에 이르는 기간동안 수많은 명장면들을 만들어냈고, 그래서 대회 역사상 가장 인상깊은 대결로 손꼽힌다. 그리고 3월 4일의 결승전에서, 스토크 시티는 첼시 FC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FA 주관 대회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되었다. 무어는 이 시즌 웨스트햄의 리그컵 10경기에 모두 출전하였다.

1966년 이후 컵대회에서도 영 기를 못 쓰던 웨스트햄이었지만, 1971-72시즌에는 FA컵에서도 나름 선전했다. 바로 진출한 3라운드에서는 루튼 타운에 2-1로 승리했고, 4라운드에서는 히어포드 유나이티드와 맞붙어 재경기 끝에 승리하며 5라운드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허더스필드 타운에 또 4-2로 패배하고 만다.

나름 열심히 했던 시즌이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무어는 시즌 종료 후 여전히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주장이었고, 베켄바워가 이끄는 서독과의 유로 1972 플레이오프를 준비했다.

2.15. 1972-73 시즌

유로 본선을 야심차게 준비했던 잉글랜드는 '람바참바' 서독에 패하며 4강 진출의 꿈을 접어야 했다. 무어는 빠르게 소속팀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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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9월, 스탬포드 브릿지로 입장하는 무어와 웨스트햄 선수들 [9]
1972-73시즌, 웨스트햄은 리그에서 이전 시즌들에 비해 엄청나게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홈에서 열린 21경기에서 12승 5무 4패로 홈 깡패다운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었고, 원정에서는 부진했으나 다른 시즌에 비하면 무난한 성적인 5승 7무 9패를 기록했다. 승점은 46점이었고, 최종 성적은 6위였다. 무어가 데뷔한 이후 두 번째로 경험해 본 리그 6위였다. 아주 좋은 성적이었다. 1958-59 시즌에도 한 번 기록해본 적이 있으나 그 때는 주전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었다. 리그에서 42경기를 전부 뛰며 전 경기 출장을 기록했고 골을 3개 집어넣었다.

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준 대신, 이번 시즌에는 컵대회에서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각 대회에서 한 번씩만 승리하고 다음 라운드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리그컵은 3라운드, FA컵은 4라운드에 진출하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무어는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뛰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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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햄 역대 최다 출전 기록을 경신하며 이전 기록 보유자 지미 러펠과 찍은 사진
1973년 2월은 무어에게 있어서 상당히 의미 있는 기간이었다. 국가대표팀에서 100번째 A매치에 참여함으로써 FIFA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으며, 웨스트햄에서도 통산 509경기를 기록하여 통산 508경기에 출전했던 지미 러펠의 기록을 넘어섰고, 마침내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역대 최다 출전 기록자가 되었다.[10]

무어는 1972-73 시즌의 모든 대회에서 전 경기 출전을 기록하며 의미 있는 시즌을 보냈다.

2.16. 1973-74 시즌

1973-74 시즌에도 무어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주장이었다. 1973년 8월에는 더비 카운티 FC의 감독인 브라이언 클러프가 무어를 영입하기 위해 3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제시했으나 웨스트햄 구단 측에서 거절했다.

팀에 남은 무어는 리그에서 열심히 뛰었지만, 그와 반대로 성적은 계속해서 떨어져 갔다. 웨스트햄이 1973-74 시즌 전반기에 리그에서 거둔 성적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21경기 1승 7무 13패. 꼴찌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무어는 1973년 12월 8일, 리그 22라운드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전했는데 이것이 무어의 마지막 1부 리그 출전 기록이다. 리그컵에서는 2라운드부터 리버풀을 만나는 바람에 바로 탈락하고 말았다. FA컵에서는 3라운드에 바로 진출했지만 1974년 1월 5일 경기에서 히어포드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승리를 따내지 못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어가 부상을 당했다. 재경기가 열렸고 웨스트햄은 충격패를 당했다.

무어는 이후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했고, 계속해서 팀에 없었다. 그래서 경기 전 라인 업 때마다 늘 무어의 옆자리에 서곤 했던 수비형 미드필더 빌리 본즈가 부상당한 무어 대신 주장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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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햄 소속으로 뛰는 마지막 경기
그리고 무어가 빠져 있는 기간동안 본즈가 팀을 잘 이끌며 어느 정도 순위를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고, 웨스트햄은 강등권에서 벗어났다. 무어는 2군 팀에서 연습 경기를 통해 폼을 끌어올리며 회복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없이도 잘 헤쳐나가는 팀을 보며 이제 웨스트햄에 자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느꼈다. 웨스트햄의 부상당한 리더는 1974년 3월 9일에 리저브 팀 소속으로 플리머스 아가일과 마지막 경기를 진행했다. 그리고 5일 후인 3월 14일, 잉글랜드의 원로 축구인 알렉 스톡 감독이 이끄는 2부 리그의 풀럼 FC와 계약을 맺었다.

무어는 웨스트햄에서 1958-59 시즌부터 1973-74 시즌까지 총 16시즌을 뛰었고, 500경기가 넘는 경기 수를 기록했다. 웨스트햄에서 무어가 얻은 트로피는 총 3개. 웨스트햄이 무어가 뛰기 이전에 리그, 컵대회 가리지 않고 중하위권만 기록하는 팀이었고 무어 이전까지 내세울 만한 타이틀이 전무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굉장한 수준의 트로피들을 모은 셈이다.

3. 풀럼 FC

3.1. 1973-7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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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럼과의 계약 후, 팀 감독인 알렉 스톡과 함께
그렇게 무어는 1974년 3월 14일부터 정든 자주색 유니폼을 벗고 하얀색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2부 리그 소속팀인 풀럼에게 있어서 국가대표팀 주장이었던 무어는 당연히 즉시 전력으로 사용할 만한 자원이었다. 무어는 풀럼으로 이적한 지 5일밖에 안 된 3월 19일 경기부터 바로 2부 리그 경기에 투입되었다. 경기는 풀럼의 홈인 크레이븐 코티지에서 열렸고, 상대는 미들스보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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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럼 유니폼을 입고 뛴 첫 경기
하지만 첫 경기부터 0-4로 대판 깨졌다. 역시 풀럼은 강팀이 아니었다. 무어는 나머지 경기에서 풀럼의 주전으로 뛰었고, 10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집어넣었다. 무어가 합류한 시점에는 이미 컵대회에서 전부 탈락한 상황이었고, 무어는 풀럼의 1973-74시즌 컵대회에 기여할 수 없었다.

3.2. 1974-75 시즌

무어는 리그에서 42경기 중 41경기에 출전했다. 풀럼은 22개 팀 중 9위를 기록하며 승격에는 실패했지만, 무난한 성적을 거두었다.

리그컵에서는 2라운드에서 울버햄튼을 3-1로 꺾었고, 3라운드에서는 운명의 장난으로 친정팀 웨스트햄과 맞붙게 되었다. 무어는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웨스트햄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4라운드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만나 3-0으로 패배하며 여정을 마감했다.

그리고 FA컵. 풀럼은 이 시즌 FA컵에서 전설적인 행보를 썼다. 풀럼은 3라운드에 바로 참가했는데, 3라운드 상대는 헐 시티였다. 1-1 무승부 후 재경기를 진행했음에도 재차 무승부가 나왔고, 세 번째 경기를 하고 나서야 승부가 갈렸다. 결과는 풀럼의 1-0 진땀승이었다. 4라운드에서는 노팅엄 포레스트를 만났는데, 이번 라운드에서도 어마어마하게 불똥 튀는 승부를 벌였다. 첫 경기는 0-0 무승부였고, 재경기는 1-1 무승부였다. 세 번째 경기에서 또 1-1 스코어가 나왔고 네 번째 경기에서야 풀럼이 노팅엄 원정에서 1-2 승리를 거두며 승리를 거두었다. 어느새 5라운드였고 남은 팀은 16팀이었다. 5라운드 상대는 무려 에버튼 FC. 그런데 풀럼은 원정 경기에서 에버튼을 1-2로 무너뜨리는 이변을 연출했다. 6라운드 상대는 칼라일 유나이티드. 풀럼은 승리했다. 어느 새 준결승전까지 왔다. 준결승 상대는 버밍엄이었고 풀럼과 비슷한 행보를 거쳐 올라온 상태였다. 풀럼은 재경기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역사적인 FA컵 결승전 진출이었다. 구단 역사상 최초였다. 올라오는 동안 무려 여섯 차례의 재경기를 진행하며 올라온 풀럼은 많이 피로해 있었다. 그래도 무어는 팀 주장 멀레리와 함께 리더 역할을 하며 팀을 다잡았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 상대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였다.
바비 무어 vs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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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종료 후, 오랜 동료들과 함께 [11]
우리는 웸블리 바깥으로 걸어나가고 있었고, 나는 기분이 좀 우울했다. 나를 본 무어가 다가와서 한 팔을 걸치고 이야기했다. "경기를 즐겼니?" 나는 우리가 그동안 엄청난 일정을 뚫고 올라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니, 나는 그러지 못했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친구, 우리 나이는 컵 결승전에서 뛸 나이가 아니야. 그러니 즐겨는 편이 좋지." 그가 한 사람으로서 생각하는 방식은 그랬다.
앨런 멀레리, 당시 풀럼의 주장이자 전 국가대표팀 동료
리그컵에서는 풀럼이 이겼지만, FA컵에서는 웨스트햄이 풀럼을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었다. 무어가 이끈 우승 이후 11년 만의 우승이었다. 풀럼은 역사적인 기회를 놓쳤지만 정말 좋은 경기를 펼쳤다.

3.3. 1975-7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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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가대표팀 동료였던 앨런 멀레리와 함께
무어는 이번 시즌에도 풀럼의 주전 멤버였다. 그러나 풀럼은 컵대회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작년의 모습과는 달랐다. 리그컵에서는 2라운드에서 재경기 끝에 승리했으나 3라운드에서 탈락했고, FA컵에서는 3라운드에서 바로 탈락했다.

당시 축구황제 펠레를 필두로 하여 에우제비우조지 베스트 등 대형 선수들이 유럽에서의 찬란한 커리어를 마무리짓고 미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잉글랜드 축구의 아이콘인 무어에게도 제안이 들어왔다. 무어를 영입하겠다고 나선 팀은 샌안토니오 선더였다. 풀럼은 무어의 임대 이적을 허용했고 무어는 1976-77 시즌 잉글랜드 풋볼 리그가 개막하기 전까지만 미국에서 축구를 하기로 했다.

3.4. 샌 안토니오 선더 (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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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안토니오 선더 선수단
무어는 샌 안토니오 선더에 합류하여 24경기를 뛰었다. 무어는 펠레가 뛰고 있는 뉴욕 코스모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득점하며 1-0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NASL에서 1976년에 3개 국가대표팀을 초청하여 재미있는 시리즈를 진행하기도 했다. 초청된 팀은 브라질, 이탈리아, 잉글랜드였다. NASL은 올스타팀을 선정하여 이 국가대표팀과 리그전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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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와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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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m America
당연하게도, 이 '팀 아메리카'는 세 경기 모두 졌다. 펠레, 무어, 베스트 말고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선수가 전무한 팀이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무어가 뛴 이 구단은 1976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이후 하와이로 연고를 옮겨버렸기 때문이다. 이 팀을 계승한 '팀 하와이' 역시 사정은 좋지 않았다. 1977년 창단하여 같은 해에 폐단했으니 말이다.

3.5. 1976-77 시즌

무어는 1976-77시즌이 시작되기 전 미국에서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무어는 미국에서 조지 베스트를 설득하여 1976-77 시즌에 풀럼에서 뛰게 만들기도 했다. 어느덧 35세가 되었으나 42경기 중 40경기에 출전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풀럼은 리그에서 특별한 성적을 내지 못했고, 컵대회에서는 역시나 별 성과가 없었다. 무어는 영국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에 47경기에 출전하였다. 아직 은퇴할 수준은 아니라는 의견도 많았지만, 무어는 이미 은퇴를 결심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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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코헨과 돈 레비의 축하를 받는 무어
1977년 5월 14일, 블랙번 로버스와의 리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수많은 축구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근 20년 길이의 선수생활을 마무리지었다.

4. 잠정 은퇴 기간

무어는 완전히 아저씨가 되었다. 9월에는 펠레의 은퇴를 축하해 주기 위해 특별 친선 경기에 참석하여 무하마드 알리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경기 종료 후 무어는 펠레와 진한 포옹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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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와 대화하는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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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와의 포옹

5. 시애틀 사운더스 FC

그런데 풀럼에서 선수생활 은퇴를 선언한 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무어는 돌연 축구계 복귀를 선언한다. 이번 무대는 잉글랜드가 아닌 미국이었다. 무어가 입단한 팀은 시애틀 사운더스 FC였다. 시애틀 사운더스에는 무어의 웨스트햄 시절 동료였던 바비 하우와 해리 레드냅이 머무르며 감독을 돕고 있었고, 무어는 팀 동료들도 만날 겸 해서 시애틀에 입단했다.

시애틀은 1977시즌 NASL 결승전에 올라 2만 2천 명이 넘는 좋은 관중들을 끌어 모았다. 그래서 1978년 팬들은 또 다른 성공적인 시즌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어는 팬들의 기대와 달리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는 않았다. 무어는 5경기에만 출전했다. 무어가 출전했던 중요한 경기에서, 시애틀은 뉴욕 코스모스 상대로 2-1로 패배를 기록했다. 이 시즌, 무어는 특이하게도 본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6번 셔츠를 입지 않고 9번 셔츠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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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의 어색한 9번 셔츠

6. 헤르닝 프레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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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에 간 무어
1978년 4월, 그는 프로 선수로서 그의 마지막 계약을 맺었는데, 덴마크의 헤르닝 프레마드[12]에 입단하여 덴마크 프로 축구 리그의 출범을 응원하며 축구 홍보 활동을 겸했다. 다만 현재와 같은 형식의 덴마크 프로축구 리그가 출범한 것은 1991년이다. 무어는 은퇴하기 전에 구단을 위해 9경기를 뛰었다. 그리고 계약 기간이 끝나고 나서 두 번째 선수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7. 캐롤라이나 라이트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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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니 마시와 함께
1983년, 무어는 풀럼 시절의 동료 로드니 마시가 이끄는 캐롤라이나 라이트닝에 코칭 스태프로 합류했다. 가벼운 제안이었고 별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어느 날, 캐롤라이나 라이트닝의 선수가 부상으로 쓰러졌다. 큰 규모의 구단이 아니었기에 선수가 부족했고 대신 뛸 선수는 없었다. 벤치에는 왕년의 전설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42세가 된 왕년의 전설이 축구화를 신고, 하얀 선을 넘어 경기장에 교체 투입된 것이었다. 코칭스태프 바비 무어가 경기장에 투입되는 말도 안 되는 현장을 지켜본 글렌 데이비스라는 상대 팀 선수는 나중에 미국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캐롤라이나는 부상자가 너무 많았어. 바비는 아마 43살이었을 것이고 분명히 제대로 뛸 수 없었어. 그는 경기장 안의 모든 것들을 다 걷어 차 버렸어. 그리고 우리는 그냥 "오 마이 갓! 바비 무어야!"라고 반응했지. 미친 상황이었어. 나는 우리가 2-0으로 앞서고 있다가 마지막 10분 동안 그들의 팬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완전히 무너졌던 걸 생생하게 기억해. 샬롯의 이 아기자기한 경기장에 약 7,000에서 8,000명의 팬들이 있었어. 메모리얼 스타디움이라고 불렸던 것 같은데 말이지. 우리는 팀으로서 완전히 무너졌고 3-2로 졌어.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에 타고 있던 주인이 우리 선수 중 한 명에게 소리를 지른 것을 기억한다. 여튼,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바비 무어가 그날 밤 경기를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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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결에 선수로 뛰게 된 42세의 코칭스태프
무어는 연봉을 따로 받지 않고 팀을 위해 이 경기를 포함해서 8경기나 뛰어 주었다. 시즌이 종료되는 시점에서, 무어의 나이는 43세에 가까웠다. 캐롤라이나 라이트닝은 1984년에 NASL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무어는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공식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1] 1963-64 시즌 42경기에서 46골을 때려박는 미친 득점력으로 발롱도르까지 수상했다.[2]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는 2부 리그 우승을 기록한 적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2부리그 우승은 어느 정도 급이 있는 구단에서는 트로피로 치지도 않는다.[3] 1965-66 시즌 UEFA 컵 위너스 컵 준결승 2차전에서의 활약상이다.[4] 영상 1분부터[5] 무어의 발롱도르 최고 순위 기록은 1970년에 2위를 차지함으로써 한 차례 더 경신된다.[6] 기사작위를 받았다고 아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기사 작위를 받은 바비 찰튼의 오인으로, 무어는 기사 작위를 받은 적이 없다.[7] 펠레,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클루두아우두[8] ...and that is disconsolate figure of Robert Moore.[9] 이 경기에서 무어는 결승골을 득점했다.[10] 무어의 뒤를 이은 웨스트햄의 주장 빌리 본즈가 799경기를 뛰면서 이 기록을 아득히 넘어서게 된다.[11] 왼쪽에 있는 머리 긴 선수가 무어의 주장완장을 이어받은 빌리 본즈이다.[12] 다름아닌 FC 미트윌란의 전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