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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0:03:47

조지 베스트

조지 베스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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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3년 수상 당시 국명[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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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의 前 축구 선수
파일:kkk.jpg
<colbgcolor=#eee><colcolor=#000> 이름 조지 베스트
George Best
출생 1946년 5월 22일
벨파스트
사망 2005년 11월 25일 (향년 59세)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북아일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4cm
직업 축구 선수 (윙어 / 은퇴)
주발 오른발(양발)
소속 <colbgcolor=#eee><colcolor=#000> 유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61~1963)
선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63~1974)
쥬이시 길드 (1974 / 임대)
던스터블 타운 (1974 / 임대)
스톡포트 카운티 FC (1975)
코크 셀틱 (1975~1976)
로스앤젤레스 아즈텍스 (1976)
풀럼 FC (1976~1977)
로스앤젤레스 아즈텍스 (1977~1978)
포트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 (1978~1979)
히버니언 FC (1979~1980)
새너제이 어스퀘이크스 (1980~1981)
해봉 (1982)
홍콩 레인저스 FC (1982)
AFC 본머스 (1983)
브리즈번 라이언즈 (1983)
오스본 파크 갈렙 (1983)
너니턴 버러 FC (1983)
토버모어 유나이티드 FC (1984)
국가대표 37경기 9골 (북아일랜드 / 1964~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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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
2.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2.2. 이후
3. 은퇴 후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5.3. 수훈
6. 베스트에 대한 언사7. 여담

[clearfix]

1. 개요


북아일랜드의 前 축구 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윙어.[1]

10대 시절부터 남다른 재능을 뽐내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전으로 올라선 축구 신동이었다. 바비 찰튼, 데니스 로 등과 함께 활약하며 잉글랜드 팀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견인했다.

잘생긴 외모와 출중한 실력을 겸비하여 대중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스타였다.[2] 그 엄청난 인기로 인해 '비틀즈의 5번째 멤버(El Beatle)'라는 별명을 얻었다.[3]

2. 선수 경력

2.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50~60년대에 걸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첫번째 황금기를 준비하고 있던 맷 버스비의 눈에 띄어 1961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소년 팀에 입단. 1963년 17세의 나이로 1군에 승격하고 곧바로 주전자리를 꿰찼다는 점에서 그 재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감히 짐작할수가 있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58년 뮌헨 비행기 참사로 팀 전력이 가루가 되어버린 상황이었고, 간신히 살아남은 버스비 감독과 바비 찰튼, 데니스 바이올렛, 빌 폴크스를 중심으로 조금씩 조금씩 팀 리빌딩을 해 나가던 상황이었다. 앞서 1961년 데니스 로[4]를 공수해온 버스비는 마침내 베스트를 1군에 끌어올렸고, 드디어 맨유 역사상 뿐만 아니라 세계 축구 역사상 최강의 트리오 중 하나인[5] 로-베스트-찰튼라인이 완성되었다.[6]

로-베스트-찰튼 라인은 뮌헨 참사 후 재기불능 판정을 받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965년, 8년 만에 잉글랜드 1부리그(現 프리미어 리그) 정상에 올려놓는 데 성공한다. 2년 후인 66-67 시즌에 다시 한번 트로피를 들어올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는 10년 전 비극적인 사고로 인해 이루지 못했던 유럽 정벌에의 꿈을 다시금 외친다.
파일:external/ichef.bbci.co.uk/_86868773_best.jpg
그리고 1967-68 시즌, 마침내 클럽 역사상 최초이자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빅 이어를 들어올리는데 성공한다. 당시 결승전 상대는 흑표범 에우제비우가 버티고 있던 포르투갈의 벤피카였는데,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맨유는 찰튼 경의 선제골과 베스트의 쐐기골, 그리고 다시 한번 찰튼의 마무리로 벤피카를 4-1로 떡실신시켜버린다. 이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저 트리오의 압도적인 경기력에 매혹된 사람들은 그 때부터 맨유를 붉은 악마(Red Devils)라 부르기 시작했고, 베스트는 해당 시즌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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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 대로 조지 베스트는 1968년 유러피언컵 우승 및 발롱도르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이어 68-69 시즌에도 변함없는 활약으로 맨유 팬들을 열광케 만들었다.

하지만 1969년 버스비가 감독직을 은퇴한 직후 팀 성적이 곤두박질 치고 강등 될 위기에 처하자 팀의 주축 선수들이 대거 이탈하게 되고 남아있는 선수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 조지 베스트는 누군가의 롤모델이 된다는 부담감이 컸다, 그후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되며 과도한 음주, 폭행 등 기행만을 일삼으며 그라운드에서도 모습을 잘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베스트가 마지막으로 올드 트래포드에 모습을 보인날엔 감독이 그를 선발로 내보내려 했는데 갑자기 락커룸의 문을 누가 두들기고 열어보니 여자와 함께 있는 베스트의 모습이 나타났다. 베스트는 전날부터 엄청나게 술을 마신것인지 술에 쩔어 몸이 무거웠기 때문에 그를 선발에서 제외 시키겠다고 했다. 그러고 베스트는 그럼 경기를 뛰지 않겠다며 떠나고 다신 올드 트래포드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팀 프런트는 1974년, 그런 베스트를 방출하기에 이른다.[7]

중앙 공격수가 아닌 윙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맨유 시절 쌓은 스탯은 361경기 138골. 팀 주전 공격수였던 데니스 로의 307경기 171골과 비교해도 그렇게 큰 차이가 없는 수치다.

2.2. 이후

이후 조지 베스트는 축구계의 '저니맨' 하면 빼놓지 않고 이름을 올리는 철새가 되어 버리는데...

보다시피, 한 팀에서 1년도 못 버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선수 말기에 이르러서는 시즌 동안 단 1경기만 출전하고 마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3. 은퇴 후

은퇴한 후에도 반복되는 기행으로 인해 2번에 걸친 이혼알코올 중독 등 방탕한 사생활까지 겹치며 그의 삶은 피폐해져 갔고, 결국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얻은 병으로 2005년, 향년 59세에 축구사에 남을 위대한 천재 플레이어 조지 베스트는 영원한 잠에 들었다.
파일:external/images.teinteresa.es/Funeral-primer-ministro-Bulent-Ecevit_TINIMA20130307_0539_3.jpg
생전 갖은 기행과 물의를 일으켰으나, 필드 플레이어 조지 베스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너무도 안타까워했고, 그의 고향인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는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애도 행렬이 이어졌으며, 그의 사후 잉글랜드에서 열린 모든 경기에서는 1분 간의 묵념이 행해졌다.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2417824-1BC3219F000005DC-363_964x598.jpg
파일:external/i.dailymail.co.uk/2EC8D04B00000578-3332292-image-a-136_1448409422075.jpg

4. 플레이 스타일

당시의 일반적인 윙어들과 비교하여 베스트가 가진 특출난 점은 바로 득점력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군 팀에서 활약한 11 시즌 동안 361경기 138골을 득점했으며, 특히 1967-68 시즌에는 리그 41경기 28골을 기록하며 잉글랜드 1부 리그 득점왕 자리에 올랐다. 토탈 풋볼 이전의 축구판에서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자신의 포지션에서 정적인 움직임을 가져갔으므로, 베스트의 경우처럼 윙어가 득점왕을 차지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런 득점력의 기반이 된 것은 베스트의 자유로운 움직임이다. 베스트는 자신의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공격 진영 전체에서 자유롭게 움직였다. 몇 분 전에는 왼쪽에서 중앙으로 치고 들어오며 슈팅을 시도하더니 난데없이 오른쪽 측면에 나타나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리곤 했다. 말 그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 필연적으로 중앙에도 자주 머물렀는데, 이는 다른 윙어들에 비해 베스트가 훨씬 많은 득점을 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베스트는 윙어도 득점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는 슈팅을 통해 득점을 노리는 유형의 윙어들이 대거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스트는 간단한 기술을 조합한 효율적이고도 폭발적인 드리블로 상대 선수들을 농락했다. 펠레가린샤처럼 기상천외한 테크닉을 총동원하여 드리블하는 타입은 아니었고, 최대한 기본기에 의존한 드리블을 했다. 탄탄한 엉덩이를 바탕으로 낮은 무게중심을 유지하며 매우 날렵하게 방향을 바꾸었으며, 간결한 속임 동작으로 상대 선수의 시선을 분산시킨 후 반대 방향으로 짧게 치고 나가는 데에 능했다. 양 발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드리블했기 때문에, 수비수들에게 있어서 베스트의 드리블 방향을 읽어내는 것이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베스트는 이런 드리블 능력을 바탕으로 수비진 전체를 마구 흔들 수 있었다. 점진적으로 스피드를 올리며 수비수 여러 명을 한꺼번에 제치고 중앙으로 치고 들어가 슈팅하는 것은 아르연 로번의 '매크로 돌파'와 같은 베스트만의 주특기였다.

그렇다고 그가 개인 플레이에만 능했다면 애초에 현재와 같은 평가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베스트는 환상적인 패스 센스를 보유한 선수였다. 자신이 직접 공격 작업의 중심이 되곤 했으며,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동료 선수를 효과적으로 이용해 수비수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크로스에도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양 발을 모두 능숙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중앙을 향해 크로스를 올릴 수 있었다. 베스트는 훌륭한 코너킥 키커이기도 했다.

수비 기여도 역시 매우 높았다. 경기장을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미드필더와 수비수들을 도왔다. 직접 득점을 노리는 윙어로써는 이레적인 사례인데 팀이 자신을 바탕으로 침착하게 공격을 전개할 수 있도록 항상 낮은 위치에 내려가 있었다. 낮은 위치에서 공을 받은 후에는 순식간에 동료들과 함께 라인을 올리며 상기한 공격 작업들을 진행했다. 독보적인 드리블러이자 훌륭한 팀 플레이어였기에, 정말 막을 방법이 없는 선수였다. 그리고 자기관리에 실패하고 전성기가 지난 후에도 플레이 스타일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베스트의 전성기가 지난 시점인 1970년대 중반의 경기를 봐도 그렇다. 전성기가 지난 후에도 훌륭한 드리블을 보여주었으며 많은 활동량을 자랑했다.[9]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수훈

6. 베스트에 대한 언사

Pele Good, Maradona Better, George BEST[11]
그를 막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선수가 그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태클을 타고 마치 나뭇잎이 바람에 미끄러지듯 나아갈 뿐이었다.
조 머서
당신이 거명할 수 있는 그 어떤 플레이어와도 최소 동등, 혹은 그 이상이다.
바비 찰튼
전술을 무시할 수 있는 그라운드의 천재이자 자유인은 아마 베스트 뿐일 것이다.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는 역대 최고의 재능이다. 또한 그는 월드컵 본선에 가 본 적이 없는 선수 중에서 단연 최고의 선수이다.
프란츠 베켄바워
세계 최고의 선수는 조지 베스트입니다.
펠레
어린 시절 내게 영감을 준 선수다. 화려하고 현란한 플레이로 팀 동료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나는 그와 내가 비슷한 유형의 선수였다고 생각한다. 드리블을 통해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디에고 마라도나
조지 베스트! 위대하지. 한 번도 플레이를 본 적은 없는데 후회된다. 왜냐면 그를 본 사람들이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하나라고 말했거든. 1968년에 TV가 있었냐고? 물론, 하지만 난 여섯살이었다고!
루드 굴리트 출처

7. 여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WPGeorgeBest.jpg
파일:external/farm1.staticflickr.com/305712500_efb1ae4aa5_n.jpg
조지 베스트와 웨딩 프레전트 멤버들
파일:DAYuUgyXsAA41zy.jpg
파일:골닷컴 선정 시대별 공격수 5인.jpg


[1] 양쪽 윙어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선수였으며, 어느 쪽에 기용되더라도 상당히 넓게 움직이며 반대쪽 필드까지 자유롭게 커버했던 특이한 스타일이었다.[2] 그의 경기를 보기 위해 언제나 수많은 소녀 팬이 경기장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코너 플래그 위치에 많은 수의 여성 팬이 모여 있었는데, 이는 베스트가 코너킥을 차는 것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베스트의 플레이를 보고 오열하다 실신해 실려나간 팬도 있었다.[3] 그런데 정작 비틀즈 멤버 4인은 전부 맨유의 영원한 라이벌리버풀 출신이다.[4] 에릭 칸토나 이전 맨유에서 "KING"이라 불렸던, 맨유에서만 309경기 171골을 터트린 특급 공격수였다.[5] 과거 네덜란드AC 밀란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 오렌지 삼총사 정도가 베스트-찰튼-로 트리오에 견줄만 하다. 21세기 들어서는 히바우두-호나우두-호나우지뉴의 3R, FC 바르셀로나의 황금기를 이끈 리오넬 메시-다비드 비야-페드로 로드리게스의 MVP나 리오넬 메시-루이스 수아레스-네이마르 주니오르MSN, 사비 에르난데스-세르히오 부스케츠-안드레스 이니에스타의 세얼간이, 레알 마드리드 CF가레스 베일-카림 벤제마-크리스티아누 호날두BBC가 등장하여 묻히는 감이 있다.[6] 이 라인은 3인 전원 발롱도르 수상자라는 점에서 그 포스의 편린을 보여준다. 1964년 로, 1966년 찰튼 경, 1968년 베스트. 다른 트리오에서는 히바우두-호나우두-호나우지뉴의 3R이 전원 발롱도르 수상자이다.[7] 원래 버스비가 있던 시절부터 기행으로 유명했다. 15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던 당시만 해도 올드 트래포트 안 응접실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곤 하는 수줍음이 많은 소년이였으나 17세에 1군에 데뷔하고 슈퍼스타에 오르자 거만해지며 성격이 바뀌었다. 경기가 끝나면 훈련에 불참하고 집에 갔으며 보드진에게 원정경기가 끝날 때 마다 왕복항공권을 요구했고, 그라운드에서 거칠게 태클이 들어오자 보복으로 침을 뱉고 싸움을 벌이는 등 기행으로 유명했다. 특히나 1969년에는 새해 다짐으로 술과 여자를 포기했으나 새해가 시작된지 20분만에 지옥같다며 포기 할 정도로 원래 프로의식과는 담을 쌓은 선수였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기 보다는 버스비가 조지 베스트의 통제를 정말 잘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몇몇 맨유 팬들 사이에서는 만일 버스비가 10년만 더 젊었어서 계속 맨유의 감독으로 부임했었다면 조지 베스트가 저니맨으로 전락하지 않고 맨유에서 은퇴했을 가능성도 높았을 것이다라는 소리가 있었을 정도였으니.[8] 이때 서독 대표팀의 전설 게르트 뮐러와 같이 뛰기도 했었다.[9] 다만 게임 내에선 단순한 드리블러 스타일로 구현되어 공격쪽 활동량이랑 체력은 그렇게 높게 측정되지 않았다.[10] RW 3위[11] 물론 베스트가 펠레, 마라도나보다 뛰어나다는게 아니고 영국 말장난의 일종으로 단어의 연속성과 음율을 딴 영국식 언어유희로 유명하다. 사람들에 따라 펠레마라도나의 순서가 바뀌곤 한다. 하지만 어느 것이 됐든, George BEST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