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박용업(朴用業), 박용래(朴用萊, 朴用來) |
자 / 호 | 윤일(允一) / 학암(鶴巖) |
본관 | 밀양 박씨[1] |
출생 | 1876년 10월 27일 |
경상도 문경현 가현면 수예리 (現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수예리[2] 34번지) | |
사망 | 1907년 8월 1일 (향년 30세)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11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 1876년 10월 27일, 경상도 문경현 가현면 수예리(現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수예리 34번지)에서 아버지 박광문(朴光文)과 어머니 경주 이씨[3] 사이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대한제국군 시위대에 입대하였으며 한성부 서부 황화방 서소문계 서소문 근처(現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에 거주했다.
- 1907년 대한제국군 시위대 참교(參校)로 복무하던 중, 그해 8월 1일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군대해산을 당하자, 이에 분격하여 대한제국군 동료들과 함께 한성부 중심으로 진출해 군대 해산과 무기 접수를 위하여 파견된 일본군에 대항하여 접전하였다.
- 그러나 아군의 열세가 확정되던 사이, 일본군의 총탄에 맞았고 '대한만세'를 세 번 외친 뒤 장렬히 전사하였다.
- 전사 후 칙령(勅令)에 의하여 장충단에 이름이 새겨졌다.
-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6년 4월 2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