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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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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박기태
공식 웹사이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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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 및 활동3. 동해 표기 정정 활동4. 한국 홍보자료 제작 및 배포5. 비판과 오해
5.1. 동해/명칭 문제 관련5.2. 중국의 역사왜곡백두산 공정 관련5.3. 한국사 고토 관련5.4. Apple 지도 정보 오류 지적5.5. 'Siri 망언' 오해 및 언론 오제보
6. 글로벌 청원7. 글로벌 포스터8. 교내 반크 동아리가 개설된 학교
8.1. 반크 공식 승인 동아리8.2. 반크 명칭을 사용하는 미승인 동아리
9. 기타10. 반크 소속 인물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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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을 알리는 민간 사회 기여 단체다. 독도 관련 활동이 중점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 측의 동북공정 관련 역사왜곡도 반박하고 있다.

중국 측 역사왜곡 대응
일본 측 역사왜곡 대응
해외 한국 관광 오류 대응

2. 설명 및 활동

1999년 외국에 대해 국가 홍보와 교류를 통한 사이버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위해 박기태 단장에 의해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비정부 민간 단체이다.

잘못된 국가 정보에 대한 알림과 함께 교정 권고까지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으며, 직지심체요절 홍보와 일본의 방위백서 소개, 동북공정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비판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그중 동해독도의 국제 표기를 수정하려는 활동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2019년부터 3.1 독립선언서를 쉬운 우리말 번역 및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아랍어등 전세계 12개 외국어로 번역해 전세계를 대상으로 홍보하고 있다. 또한 2.8 독립선언서도 5개 국어로 번역해 전세계에 알리고 있다.##

또한 미국 국적의 재미교포들 가운데도 반크의 운동을 돕는 사람들이 있으며, 2014년에는 미국 버지니아 주 의회가 모든 공립학교 교과서에 동해와 일본해를 모두 명시하도록 동해 병기 법안을 채택했고 이를 통해 버지니아 소재의 유명 미국 교과서, 세계 지도 회사들은 이후 동해가 병기된 출판물을 발행하고 있다. 2019년 8월에는 미국 뉴욕 주 교육국이 뉴욕 전역의 모든 공립학교 학군에 '동해/일본해 교육 지침'(Guidance of Sea of Japan/East Sea)을 하달했다. 지침에는 가을학기부터 동해와 일본해 명칭을 함께 사용해 학생들에게 가르치도록 권고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를 기반으로 2020년 11월 발표에 따르면 전세계 지도에서 2000년대에 3% 대였던 동해 표기가 40%로 증가된것이 이를 반영한다.

2021년 4월 19일에 반크는 김치를 파오차이로 번역한 문화체육관광부 훈령이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다며 재차 시정을 촉구했다.# 2024년 최근에는 경기도와 함께 기후대사 육성을 위해 협력을 강화하였고 박기태 반크 사장과 김동연도지사가 만나 협약 체결을 하였다.#

3. 동해 표기 정정 활동

동해와 독도 관련해서 일본 정부는 반크의 활동에 매우 부정적이다. 또한 중국은 중국의 역사왜곡 공정과 해외 중국 역사왜곡을 지지하는 학자들에 대한 로비에 반대하는 반크에 매우 부정적이며 대만 역시 중국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찬성 입장이라서 대만 역시 반크에 매우 부정적이다. 현재 해외 거주 중국, 대만계에 의해 역사 왜곡과 이를 지지하는 어용 학자들과 분청, 우마오당들의 편향된 의견으로 역사 왜곡이 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한국내에서도 환빠, 신천지 뿐만 아니라 대동아 공영권 옹호자들에 의한 역사 왜곡이 적지 않은 수준이다.

4. 한국 홍보자료 제작 및 배포

반크는 전 세계 교과서와 웹사이트를 대상으로 한국 관련 잘못된 내용을 고치는 활동을 넘어 올바른 한국 홍보 자료를 제작해서 전 세계에 배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반크 홈페이지에 따르면 전 세계 수많은 세계사 교과서, 세계지도, 백과사전, 관광안내책자, 한국 소개 웹사이트에서 한국 전체 역사가 마치 중국의 식민지 혹은 속국이었던 마냥 왜곡된 내용이 서술되고 있으며, 중국 정부 또한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 백제 등 한국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가짜 뉴스를 퍼트리는 데 일조한다. 일본 정부 역시 오랜 기간 동안 독도를 다케시마라 일컬으며 영유권 주장에서 자국의 입장을 전파하고 있으며, 비단 일제강점기만이 아니더라도 고대사에서 한국이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는 식의 왜곡을 일삼는다.

이에 대응하고자 반크는 독도, 동해, 한국 역사가 올바로 서술된 세계지도, 한국지도, 엽서, 잡지 등 다양한 한국 소개 자료를 제작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105가지의 한국 홍보자료 150만 부를 인쇄해 전 세계에 배포했다. 이 자료들은 전 세계 유수 대학의 한국(어)학과, 한글학교, 교환학생, 외국 파견 봉사단 등에 배포되어 각국 혹은 각 지역의 한국 관련 수업 자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2018년 브리태니커, 위키피디아 등 백과사전과 유명 역사교육 사이트에 중국 한(漢)나라를 소개하는 세계지도에 고구려 영토까지 포함한 사실을 조사했다. 반크는 또한 2018년 미국 유명 박물관이며 과학 역사책을 발행하는 스미소니언(Smithsoniian)과 세계사 책을 발행하는 영국의 유명 출판사인 돌링킨더슬리(DorlingKindersley, DK)가 공동으로 최근 발행한 유명 역사책인 '히스토리(History)'와 '역사의 타임라인(Timeslines of History)'에 한국 역사속 고구려 시기인 중국 한 왕조를 설명하면서 곳곳에서 한국 전체 영토가 중국의 영토로 왜곡됐다는 것을 발견하고 시정을 요구했다.

그 외에 일제강점기 유출 우리나라 문화재 환수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다.#

5. 비판과 오해

5.1. 동해/명칭 문제 관련

해외 대학 도서관의 장서 지도에 East Sea 수정 스티커를 마구 붙여 상당수의 도서를 훼손한 테러를 저질렀다는 오해가 있다. 문제의 원인인 동해의 국제 표기가 East Sea여야 한다는 주장을 위해 해외 책을 훼손했다는 것. 하지만 해외 대학 도서관 장서 지도에 동해수정 스티커를 붙이는 것은 해외 대학이 아닌 국내 대학이고, 스티커를 붙이는 단체또한 반크가 아닌 반크와 어떤 관련이 없는 독도수호국제연대라는 단체이다. 이런 내용은 반크 활동을 폄하하고 왜곡하기 위해 일본의 혐한 유튜버가 만들어낸 가짜 뉴스이다. 실제로 네이버 검색을 해 보면 반크 관련 게시물 중 해외 도서관에 스티커를 부착했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 독도수호국제연대 도서관 독도 동해 스티커의 진실, 혐안 일본 유튜버의 역사왜곡

다만 반크 또한 East sea 스티커를 제작한 적은 있었으며 관련 활동을 장려했었던건 사실이다.

* 반크 블로그의 동해스티커 아카이브


이건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반크 회원들은 수시로 영어 위키백과 Sea of Japan 문서의 토론 페이지에 가서 Sea of Japan을 East Sea로 바꿔 달라는 요청을 남긴다. 물론 이 요청은 거절당한다. 영어 위키백과에는 '현재 영어에서 널리/흔히 쓰이는 명칭'을 우선하라는 권고 사항이 있고, 다른 언어에서 어떻게 부르는지 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명칭이나 상황이 역사적으로 이러했다'나 '한국어에서 이렇게 부른다' 식의 주장은 씨알도 안 먹힌다. 얼마나 시달렸는지 영어 위키백과임에도 토론 페이지에 한국어로 왜 문서 제목이 Sea of Japan인지 설명되어 있으며 이름 변경 요청은 거부된다고 고지되어 있다. 페이지 중간 자세한 것은 동해/명칭 문제 참조.

5.2. 중국의 역사왜곡백두산 공정 관련

반크의 박기태 단장은 백두산장백산으로 둔갑되어서는 안 되며, "고유명사나 지명은 그 나라가 칭하는 대로 부르는 게 통념인데 남북한 합의도 없이 국경선에 걸쳐 있는", ‘압록강’(Amnok River)과 ‘두만강(Duman River)’을 중국식 지명 ‘야루강’(Yalu River)과 ‘투먼강’(Tumen River)으로 소개하고 있어 과거 ‘동해’를 ‘일본해’로 뒤바뀐 사례를 답습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장차 전 세계가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호칭하게 되면 중국령, 즉 중국의 소유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될 것"이라며 "특히 이 이름들은 향후 간도 문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좌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 # #

1960년대 초기까지만 해도 중국은 ‘백두산’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거나, ‘장백산’보다는 ‘백두산’ 지명이 더 일반적이었다고 생각할 만큼 일반적이었다.[1]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백두산 명칭의 퇴출과 중국이 '장백산'이나 '중국 장백산'이라는 명칭의 일원화가 추진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1980년대 중국 둥베이을 둘러싼 국제환경의 변화[2] 및 “만주와 몽골이 예부터 독립 국가였다”, “주체사관”, “남북국시대론”, 극동과 시베리아의 “문화독립성” 등의 주장을 꺼리던 중국이 한국인들의 둥베이 인식, 가령 “선조의 토지”, “우리 고대의 영토”, “북방의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 “고토를 회복”하자는 등의 내용들에 경계를 기울이기 시작했다.[3] 거기다 1990년대 전반기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이후 많은 한국인이 중국을 방문하고 둥베이 지역이나 백두산을 관광하면서 둥베이 지역 사회, 특히 조선족 사회에 한국인들의 입을 통해 만주의 고대사나 백두산에 대한 한반도의 역사적 귀속권이나 문화적 연고권 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조선족 사회에 퍼져나가기 시작하면서 동북지역의 지방당국을 비롯한 중국정부를 자극했기 때문이다.[4]

2007년 작성된 "‘중국 장백산’에 대한 남북한의 도모행위에 대한 길림성국가안전영도소조(吉林省國家安全領導小組)의 조사·연구보고서"(吉林省國家安全領導小組朝韓對我國長白山圖謀的調硏報告) 문건에 따르면 시진핑을 조장으로 한 길림성국가안전영도소조는 “장백산은 국가(중국)의 영토 주권에 관한 근본 문제이며, 동북지구는 중국의 영토”라는 전제 전에, “남북한이 줄곧 중국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지니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중국은 소위 ‘장백산문화론’에 입각해 백두산을 중국 영토로 단정하고 있다. “남북한의 일부 학자와 정객들은 신문이나 저작물을 통해 당조(唐朝) 때 발해 정권을 세운 사람들이 ‘만주족선조’인데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떠들면서 중국을 ‘침략자’로 매도하고 중국에 대해 영토를 요구하고 있다”고 비판하거나 “장백산에 오는 한국 관광객들은 장백산의 뿌리를 찾거나 제사지내기 위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기도 하기까지 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중국은 만주족이 장백산을 발상지로 하여 동북지구에 찬란한 문화를 창조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적극 선전하고, 국경 밖(남북한) 일부 야심가의 허무맹랑한 소리를 잠재워야 한다”는 비전을 강경하게 제시하고 있다. 즉, 남북통일 이후 백두산을 둘러싼 영유권 분쟁에 대비하려는 중국의 전략적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5]



반크는 '압록강'과 '두만강' 알리기를 보다 확대시켜 간도 문제에 대해서도 중국을 비판한다. 반크는 1712년 백두산정계에서 압록강과 토문강(백두산 북쪽)으로 국경선 합의한 것을 중국은 두만강이 당시 토문강으로 둔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기태는 "중국정부는 토문강과 두만강은 똑같은 강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당시 조선의 국경영역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국한시키고자 한다"면서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둔갑하는 "발상은 간도지역 영역을 조선 영토에서 제외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음모”라고 비난했다.

1894년의 청일전쟁과 뒤이은 대한제국의 수립 이후 다시 부활하여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제1송화강 = 토문강설'은 논란이나 오해가 아주 많지만 사실 토문강(土門江)은 두만강의 별칭이지 결코 다른 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조선 측의 기록으로 보아도 명백하다. 백두산 정계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고 그 두 강이 양국의 국경이 된다는 종래부터 이어져 온 인식을 다시 확인하고 두 나라 강역을 분명하게 설정하는 결과였을 뿐이다. 당시 우라총관 목극등이 두만강 상류의 건천으로 지목한 골짜기[6]가 잘못된 오류였던 것이 토문강(흑석구)이 두만강 상류와 평지를 사이에 두고 직접 연결되지 않는 점 때문에 토문강과 두만강은 서로 다른 강이라는 수많은 오해를 낳은 것 뿐이었다.[7]

목극등은 두만강 수계 파악에 있어 실책을 범하였지만, 동쪽으로 내려가면서 두만강 수계를 따라 중하류를 따라 동해를 본 다음 훈춘을 통해 귀국했다. 하지만 이듬해 토석퇴와 목책을 설치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인들에 의해 목극등이 지목한 건천이 두만강 발원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확인했다. 이들은 정계비에서 시작된 경계표지물을 두만강 발원지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토퇴를 설치해버렸다. 어차피 장백산지구를을 실측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던 청 조정 그리고 목극등은 무관심을 보였고, 정계비의 정확한 위치가 강희제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두만강 수계에 대한 오류가 있음을 인지했을 때 논쟁이 많았지만, 청의 무관심 속에서 관계자들의 추가 공사를 추인해버리고 목극등의 실수를 청에 알리지 않은 채 덮어버렸다. 이것이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르다는 논리로 이어져 1880년대 분쟁을 촉발하는 매개로 작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1885년 정해감계에서도 공동감계의 결과 정계비에서의 토문강이 도리어 송화강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 1713년 두만강 발원지인 홍토수로 이어진 토퇴의 흔적을 발견한 점이 작용하여 조선은 토문강 하류의 송화강을 경계로 삼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은 분계강(해란강)이 토문강이고 곧 경계라는 논리를 포기하고 두만강으로 경계선을 양보했다.[8]
레지 자신도 조선 국경의 지리적 위치를 잘못 이해했다. "조선의 방어벽이자 자원이기도 한 가장 중요한 강"이라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는 국경이 두 강 북쪽에 있다고 묘사함으로써 두 강 양편이 마치 한국 영토에 포함된다는 듯 설명했다. 이러한 서술은 중국과 한국의 기록 대부분과 일치하지 않으며 바로 1년 전 국경을 조사한 목극등이 이러한 정보를 주었을 리 없었다. 18세기와 19세기 초 유럽에서 제작된 많은 지도는 한국의 국경에 대한 레지의 오해를 답습했다. 레지가 정확히 어떻게 해서 이러한 오해를 하게 되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가 유조변을 청 내부 울타리가 아닌 국경선으로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쑹녠선(2022),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p. 246.

레지나 당빌이 각각 청국과 조선의 국경선을 봉황성과 책문으로, 봉황성과 압록강의 중간지점으로 인식하는 등, 18~19세기 일부 서양인들이 압록강 서안을 국경으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상당수가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을 중심으로 한 중립지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동방학자 뀨네르(Кюнер Н.В.)와 같이 토문강(송화강)이 국경설에 관련한 언급은 1880년대 분쟁 이후에 나타날 뿐이다.[9] 그리고 실질적으로 1760년대 길림장군에 의해 압록강과 두만강 수원지에 대한 조사가 수차례 이루어지는 등 18세기 초 강희제가 만주인 관리를 파견한 이래 19세기 말 조선과 공동으로 두만강 수원을 조사할 때까지 청이 조선과의 경계 및 범월 관리에 있어서 결코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었다. 압록강 서안 동변외 산장은 남북한의 ‘비무장지대’와 유사한 것으로, 한국의 GP처럼 동변외 각지에 카룬(karun)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인삼 채취 허가를 받은 심마니들에 한해서 출입이 허가되었다.[10] 이렇듯 두만강 북쪽의 광범위한 지역을 청조가 방기한 중립지역이자 무인지대라는 것은 매우 잘못된 발상으로,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은 결코 아무런 지배를 받지 않거나 '중립적인' 지역이 될 수 없다. 그 지역을 무정부적 상태로 보이게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청 정부의 정치적 조치였다.[11]

거기다 반크가 대한제국이 일본 식민지 치하에서도 간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유지하였다고 주장했으나, 이미 1904년 한국 정부는 두만강 북안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하는 데 실패했다.[12] 그리고 애시당초 그 이전에도 대한제국 외부[13]은 1880년대 토문감계사 이중하의 석퇴, 토퇴 흔적 보고와 원세개와 협상한 외아문독판 김윤식으로부터 이어지는 두만강 경계론을 일관되게 계승하려는 원칙적 의지가 분명하였다. 내부의 후원과 지지를 받은 이범윤이 청병과 충돌하자, 청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범윤의 소환과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원수부는 양국 군사가 경계를 넘지 않도록 진위대에 지시하는 선에서 이범윤의 보고에 따라 설병규칙(設兵規則)을 마련하여 상주·반포 하였을 뿐이다.[14] 거기다 이범윤은 1904년 6월 15일에 함경북도 교계관 최남융 등은 연길청 당국자와 ‘한 청변계선후장정’을 맺으면서 사실상 축출되는 수순을 밟았다.[15]

1905~06년 주조선 일본군은 각각 '간도경계조사자료'와 '간도에 관한 개요 조사'라는 보고서를 올렸는데, 이때 이미 토문강은 해란강과 부르하퉁하로 지칭할 뿐이었다. 보고서는 송화강이 토문강이라는 것은 "필경 한국인들의 특유의 구실일 뿐이다"라고 일축했다.[16] 1907년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창설하고 헌병대를 진입한 일본은 1908년 2월 10일 일본외무성이 통감부파출소가 제시한 자료를 검토하고 유리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평가하였다. 1712년 백두산 정계 당시 양 측이 모두 두만강 국경을 인정했다는 점, 1887년 조선 측이 홍토수(두만강) 국경선을 주장하고, 두만강 경계를 합의했다는 점 등을 들었다. 결국 1908년 4월초 외무성과 통감부는 간도가 청국소속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내부방침을 정했다.[17] 그리고 이 정책적 배경에는 일본의 간도 영유권 주장이 미국의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과 ‘중국의 영토보전(the territorial integrity of China) 원칙’과 정면 배치되어 열강의 간섭과 견제 속에서 속도와 강도가 조절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08년 11월 30일 주미 일본대사 다카히라 코고로[高平小五郞]는 미 국무장관 루트(E. Root)와 중국의 영토 보전과 상업상의 기회 균등을 보장하는 ‘루트-다카히라 협정(The Root-Takahira Agreement of 1908)’을 체결함으로써 기존의 간도 영유권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18] 거기다 러시아 외무부도 1901년 이미 한인이 두만강 좌안에 이주하는 것과 별개로, 그곳은 "현재도 청국 영토의 일부로 인정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으며, 1902년 서울주차 러시아 공사였던 파블로프(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Павлов)는 간도를 '중국 측 연안'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면서 간도를 중국의 영토로 인정했다. 러시아는 의화단 사건 이후 해당 문제를 한인 이주민 문제로 축소했다.[19]

5.3. 한국사 고토 관련

2021년 6월 6일, 반크 페이스북 계정에 한국의 역사 속 영토를 알린다며 고구려의 영토를 표시한 지도를 게시했다.# 반크는 정작 옛 영토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은 역사왜곡이라고 했지만 정작 한민족의 영토를 기억하자는 것이 결국엔 자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5.4. Apple 지도 정보 오류 지적

2022년 7월 22일, 애플지도에서 백두산 천지 영토 전체를 중국영토로 표기하였고, 지도 설명에는 백두산 천지를 '중국, 창바이산 천지'로 일방적으로 중국입장에서 소개했다. 하지만 백두산 천지는 1962년 체결된 백두산 일대 국경 조약인 '조중변계조약'에 따라 북한 54.5%, 중국 45.5%로 분할되었다. 또한 천지의 서북부는 중국에, 동남부는 북한에 귀속된 상태다. 이에 반크는 7월 12일부터 8일간 애플에 항의 서한과 글로벌 청원사이트를 통해 표기 시정을 요구했다.
현재는 아이폰, 아이패드등 모든 애플 지도에서 백두산 천지의 영토 표기를 바꾸고, 절반은 북한, 절반은 중국 영토로 표기중이다. #

5.5. 'Siri 망언' 오해 및 언론 오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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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로벌 청원

반크에서는 2019년 9월부터 2020년 12월 현재까지 총 30개가 넘는 글로벌 청원을 진행하고 있다. 반크 홈페이지 소개에 따르면 반크 글로벌 청원은 4억명이 가입된 세계 최대 청원 사이트(change.org)를 대상으로 욱일기나 일본 교과서 왜곡 등 국제사회에 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일본의 행보를 경고하고 세계인들과 함께 일본의 역사왜곡을 막으려는 활동이다.

반크의 설명에 따르면, 글로벌 청원은 해외에 한국의 역사를 바로 알리는 활동을 넘어 아시아인들을 하나로 모아 서양의 인종차별과 혐오에 대응하며,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지구촌 문제를 한국청년들이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해결하자는 취지의 국제 외교활동이다. 세계 청원 사이트를 통한다면 해외 유명 방송과 언론을 통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쉽게 전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입장을 알려 국제사회의 협력과 지지를 얻을수가 있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또한 구글과 같은 세계적인 포탈 사이트에 해당 관련 청원 주제를 검색하면 빠르게 검색결과에 노출이 되어 전세계인들에게 관련 문제를 홍보할수 있다고 한다.

한국어와 영어로 등재한 글로벌 청원 목록(시간순)은 다음과 같으며, 간혹 프랑스어, 베트남어로 된 청원도 볼 수 있다.

7. 글로벌 포스터

글로벌 청원과 함께 반크는 또한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응하며 국제사회에 한국인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디지털 포스터를 제작 및 배포하고 있다고 한다. 반크는 2020년 12월 현재까지 30여 종의 디지털 포스터를 제작하였다. 반크에 따르면 과거에는 국제사회에 한국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들은 외교관으로 한정돼 있었지만, 지금은 SNS에서 의지와 영향력이 있는 1명이 1000명의 외교관을 능가할 수 있는 디지털 외교관 시대가 왔다고 한다. 반크가 제작한 디지털 포스터를 통한다면 누구나 쉽고 간단하게 세계인들에게 한국인의 입장을 알릴수 있다고 반크는 주장하며 구글과 같은 세계적인 포털 사이트에 해당 관련 주제를 이미지 검색하면 빠르게 검색결과에 노출되어 전세계인들에게 관련 문제를 홍보할수 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반크 글로벌 포스터 홈페이지를 확인하자.

8. 교내 반크 동아리가 개설된 학교

반크 본부에 따르면 반크 동아리 신청은 매년 초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동아리장이 '사이버외교관' 혹은 '월드체인저' 한 달 교육을 필수로 최종 임명 된 뒤에 반크 본부에 동아리 신청을 한 후, 공식 승인을 받아야 '반크 동아리'로 활동할 수 있다.# 한 해 활동 종료 후 다음 해 동아리장이 선발되면 해당 동아리장이 1,2월 안에 정회원 교육을 이수한 후 동아리 신청을 하면 3월 개학 후 바로 반크 공식 승인 동아리로 활동할 수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2021년 7월 기준 14개의 동아리가 공식 승인된 반크 동아리로 활동 중이다.

8.1. 반크 공식 승인 동아리

전체 목록
* 세종국제고등학교 - 정식승인[20]
* 양명여자고등학교 - 정식승인
* 부산국제고등학교 - 정식승인
* 경화여자고등학교 - 정식승인
* 인천해송중학교 - 정식승인
* 소현중학교 - 정식승인
* 속초설악고등학교 - 정식승인
* 부산진여자고등학교 - 정식승인
* 동해삼육중학교 - 정식승인
* 양정고등학교 - 정식승인
* 영덕중학교 - 정식승인
* 고양국제고등학교 - 정식승인
* 광교중학교 - 예비승인
* 대전외국어고등학교 - 예비승인
* 한수중학교 - 예비승인
* 상해한국학교 - 예비승인
* 칭다오청운한국학교 - 예비승인

8.2. 반크 명칭을 사용하는 미승인 동아리

9. 기타

10. 반크 소속 인물

11. 관련 문서



[1] 윤휘탁(2015), "중국의 ‘백두산의 중국화’ 전략", 《동북아역사논총》 48, p. 205.[2] 이병호(2008), "‘東北工程’ 前史 - 傅斯年의『東北史綱』비판", 《동북아역사논총》 20, p. 243.[3] 김지훈(2020), "2002년 전후 중국 동북공정의 추진과정과 추진 주체", 《白山學報》 117, p. 32.[4] 윤휘탁(2015), "중국의 ‘백두산의 중국화’ 전략", 《동북아역사논총》 48, p. 206.[5] 윤휘탁(2015), "중국의 ‘백두산의 중국화’ 전략", 《동북아역사논총》 48.[6] 황화송전자(黃花松溝子)나 흑석구라고 불리는 건천.[7] 김형종(2018), 《『1880년대 조선 - 청 공동감계와 국경회담의 연구》, p. 28; (2019), "문헌 연구와 실지 답사를 결합한 한 중 국경 문제의 재검토", 《東洋史學硏究》 151.[8] 李康源(2016), "임진정계 경계표지 토퇴의 분포와 목극등 지도에 표시된 ‘수출(水出)’의 위치", 《대한지리학회지》 52(1); (2016) "임진정계시 두만강 상류 수계 인식과 경계표지물의 종점", 《대한지리학회지》 52(6); Kim jaymin(2018), 《Asymmetry and Elastic Sovereignty in the Qing Tributary World: Criminals and Refugees in Three Borderlands, 1630s-1840s》, pp. 72~74; 김형종(2019), "문헌 연구와 실지 답사를 결합한 한 중 국경 문제의 재검토", 《東洋史學硏究》 151; (2020), "경계와 국경", 《주제로 보는 조선시대 한중관계사(중)》.[9] 김영수(2016), "근대 서양인이 바라본 한국의 영토와 해양: 간도와 독도를 중심으로", 《歷史學報》 232.[10] 구범진(2009), "19세기 성경 동변외 산장의 관리와 조·청 공동회초", 《근대 변경의 형성과 변경민의 삶》; 김선민(2016), "18세기 후반 청-조선의 범월문제와 경계관리: 金順丁·朴厚贊 사건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72.[11] 쑹녠선(2022),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p. 49.[12] 쑹녠선(2022),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p. 212.[13] 구 외부아문[14] 은정태(2009), "대한제국기 간도 정책 추진의 조건과 내·외부의 갈등", 《근대 변경의 형성과 변경민의 삶》.[15] 이명종(2013), "대한제국기 간도영토론의 등장과 종식", 《동아시아문화연구》 54.[16] 이화자(2019), 《백두산 답사와 한중 국경사》, pp. 241~242.[17] 이명종(2013), "대한제국기 간도영토론의 등장과 종식", 《동아시아문화연구》 54.[18] 최덕규(2009), "제국주의 열강의 만주정책과 간도협약(1905~1910)", 《근대 변경의 형성과 변경민의 삶》, pp. 233~234.[19] 김종헌(2009), "러시아의 극동정책과 간도", 《동북아역사논총》 25.[20] VANK가 아닌 VANKs를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