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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3:03:25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네 공녀

<colbgcolor=#D9E0CC><colcolor=#000> 올버니 공작부인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네 공녀
Prinzessin Helene zu Waldeck und Pyrmont
파일:Princess_Helena,_later_Duchess_of_Albany_(1861-1922),_in_her_wedding_dress.png
이름 독일어 헬레네 프리데리케 아우구스테
(Helene Friederike Auguste)
영어 헬레나[1] 프레데리카 어거스타
(Helena Frederica Augusta)
출생 1861년 2월 17일
발데크피르몬트 후국 아롤젠
사망 1922년 9월 8일 (향년 61세)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티롤
배우자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 (1882년 결혼 / 1884년 사망)
자녀 앨리스, 찰스 에드워드
아버지 발데크피르몬트 후작 게오르크 빅토어
어머니 나사우의 헬레네 공녀
형제 조피, 파울리네, 마리[2], 에마, 프리드리히[3], 엘리자베트
파일: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네.jpg
초상화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어린 시절3.2. 영국의 왕자비3.3. 여생과 사망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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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왕자비. 발데크피르몬트 후작 게오르크 빅토어와 나사우의 헬레네 공녀의 1남 6녀 중 5녀이자 여섯째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어머니로,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외증조모이자, 네덜란드 빌헬미나 여왕의 이모이다.[4] 유일한 남동생 프리드리히는 발데크피르몬트 후작이 되었으며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의 아버지다.

2. 작위

3. 생애

3.1. 어린 시절

헬레네는 독일 발데크피르몬트 후국의 수도인 아롤젠에서 태어났다. 발데크피르몬트의 마지막 통치 왕자인 프리드리히의 누나였다.

3.2. 영국의 왕자비

파일:1675145015570.jpg
결혼식 날의 헬레네
1882년, 빅토리아 여왕의 4남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와 결혼했다. 그 전인 1881년에 영국의 헬레나 공주가 남편 크리스티안과 그의 조카들을 데리고 영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이때 크리스티안의 조카 중 하나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카롤리네 마틸데와 레오폴드의 결혼에 대한 말이 나왔었다. 그러나 레오폴드의 혈우병으로 인한 주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5]

막내아들이 안쓰러웠던 빅토리아 여왕은 열심히 며느릿감을 찾았다. 어느 날 여왕은 발데크피르몬트 후국의 후작에게 5명의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중 위의 3명은 이미 시집을 갔고[6] 헬레네는 20살에 아직 오가는 혼담은 없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바로 레오폴드와 헬레네의 만남을 주선했다.

둘째 언니인 파울리네, 셋째 언니 에마와 함께 헬레네는 먼 사촌인 네덜란드의 빌럼 3세의 두 번째 왕비로 후보에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 어머니 나사우의 헬레네의 제안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아들인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를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1881년 11월에 약혼했다.
파일:1675145112063.jpg
올버니 공작 부부
레오폴드는 만난 지 두 달 만에 헬레네에게 청혼했고 1882년 4월 27일,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결혼했다. 결혼식 후 클레어몬트 하우스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10달 후에 1883년 2월 25일에 맏이이자 장녀인 올버니의 앨리스 공녀를 낳았다.

1884년, 둘째 아이를 가졌고 이때 레오폴드는 관절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의사들은 레오폴드에게 따뜻한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요양할 것을 추천했다. 임신한 헬레네를 집에 두고 레오폴드는 프랑스 으로 향했다. 칸에 머물던 레오폴드는 계단에서 추락해 무릎과 머리를 다쳤고, 그 다음날에 뇌출혈로 갑작스레 사망했다.[7]

사망 당시 레오폴드는 30살이었으며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들 중 두 번째로 사망하였다.[8] 레오폴드가 사망할 당시 헬레네는 임신 중이었다. 아이는 약 4개월 후 태어났는데, 유복자카를 에두아르트였다.

헬레네의 딸 애슬론 백작부인 앨리스의 회고록에 따르면 헬레네는 매우 총명했고 의무감이 강했으며 복지 사업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가졌다. 빅토리아 여왕은 처음에 헬레네가 전형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독일 공국의 공주일까봐 걱정했고, 장녀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헬레네가 '사람들 사이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곧 헬레네를 큰 존경과 애정으로 대하게 되었지만, 헬레네가 "지적"이라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우려했었다.

그녀가 결혼하기 전, 헬레네의 아버지는 발데크피르몬트 후국에서 그녀를 유아 학교의 교육감으로 삼았고 이 위치에서 공주는 학생들의 교육 커리큘럼을 고안했다. 헬레네는 특히 수학 문제 해결과 철학 읽기를 즐겼다. 2년 간의 짧은 결혼 생활 동안 레오폴드 왕자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친구가 된 학계에 아내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헬레네는 남은 생애 동안 이러한 우정을 유지했다.

1894년 헬레네는 Deptford의 지역 사회를 돕기 위한 많은 프로젝트를 주도한 Deptford Fund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1899년 헬레네는 Albany Institute를 열었다. 이것은 나중에 Albany Empire로 알려진 극장 장소와 결합된 커뮤니티/공연 센터로 확장되었다. 1970년대 반파시스트 활동과 Racism Against Racism의 중심지였던 Empire and Institute 건물은 1978년 방화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새로운 올버니 극장은 1982년 웨일스 공비 알렉산드라에 의해 문을 열었다.

헬레네는 또한 여러 병원 자선 단체와 인신매매 종식을 위해 헌신하는 단체에도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그녀는 시누이인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비 베아트리스 공주와 남편의 조카인 마리 루이즈 공주[9]와 함께 많은 자선 활동을 조직하여 왕족의 전쟁 프로젝트가 충돌하는(때로는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는) 문제를 피했다.

3.3. 여생과 사망

레오폴드가 사망한 후 헬레네와 두 자녀인 앨리스와 찰스 에드워드는 계속해서 클레어몬트 하우스에서 거주했다. 1899년 시조카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세자 알프레드[10]가 사망한 후 헬레네의 16세 된 아들 찰스 에드워드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위를 이어받아, 독일식 이름인 카를 에두아르트로 불리게 되었고 그곳에 거주하게 되면서 어머니, 누나와 헤어지게 되었다.[11]

14년 후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카를 에두아르트는 자신이 독일군에서 싸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카를 에두아르트는 1917년 의회 법령에 따라 영국 작위를 박탈당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헬레나의 딸 앨리스는 영국에 남아 있었고 1904년 조지 5세의 왕비 테크의 메리의 남동생 테크의 알렉산더 공자와 결혼하였다.

헬레네는 1922년 9월 1일 오스트리아 티롤의 Hinterriss에서 사랑하는 아들 카를 에두아르트를 방문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후 1차 세계 대전이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패배로 종전되면서 독일 제국 측에 가담한 카를 에두아르트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위에서 폐위되었지만[12], 그의 딸이자 헬레네의 손녀 베스테르보텐 공작부인 지빌라를 통해[13] 스웨덴 왕실로 자손이 이어졌으며 현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는 헬레네의 외증손자다. 사망했을 당시 헬레네의 재산은 £177,312로 평가되었다.[14]

Chiswick 거리 발데크 길와 피르몬트 길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서 명명되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네 공녀
(Princess Helen of Waldeck and Pyrmont)
<colbgcolor=#fff3e4,#331c00> 발데크피르몬트 후작 게오르크 빅토어
(George Victor, Prince of Waldeck and Pyrmont)
<colbgcolor=#ffffe4,#323300> 발데크피르몬트 후작 게오르크 2세
(George II, Prince of Waldeck and Pyrmont)
발데크피르몬트 후작 게오르크 1세
(George I, Prince of Waldeck and Pyrmont)
슈바르츠부르크존더스하우젠의 아우구스테 공녀
(Princess Auguste of Schwarzburg-Sondershausen)
안할트베른부르크샤움부르크호임의 에마 공녀
(Princess Emma of Anhalt-Bernburg-Schaumburg-Hoym)
안할트베른부르크샤움부르크호임 후작 빅토어 2세
(Victor II, Prince of Anhalt-Bernburg-Schaumburg-Hoym)
나사우바일부르크의 아말리 공녀
(Princess Amalie of Nassau-Weilburg)
나사우의 헬레네 공녀
(Princess Helena of Nassau)
나사우 공작 빌헬름
(William, Duke of Nassau)
나사우바일부르크 후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Frederick William, Prince of Nassau-Weilburg)
키르히베르크의 루이제 이사벨라 여백작
(Burgravine Louise Isabelle of Kirchberg)
뷔르템베르크의 파울리네 공주
(Princess Pauline of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의 파울 왕자[15]
(Prince Paul of Württemberg)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샤를로테 공녀
(Princess Charlotte of Saxe-Hildburghausen)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올버니의 앨리스 공녀 1883년 2월 25일 1981년 1월 3일 애슬론 백작 알렉산더
슬하 2남 1녀
1남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 1884년 7월 19일 1954년 3월 6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빅토리아 아델하이트 공녀
슬하 3남 2녀[16]

[1] 헬렌(Helen)으로 쓰기도 한다.[2] 뷔르템베르크 국왕 빌헬름 2세의 아내[3]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의 아버지[4] 넷째 언니인 에마는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의 2번째 왕비가 되어 빌헬미나 여왕을 낳았기 때문이다.[5] 카롤리네 마틸데는 글뤽스보르 공작(글뤽스부르크 왕조 참고) 프레데리크 빌헬름의 손자(차남 프리드리히의 장남)인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와 결혼하여 1남 5녀를 두었다. 레오폴드 왕자 사후의 일이지만 카롤리네 마틸데의 큰딸 빅토리아 아델하이트가 레오폴드 왕자의 아들 카를 에두아르트와 결혼하였다.[6] 그 중 한 명인 에마는 네덜란드 왕국으로 시집을 가서 빌럼 3세의 왕비(두 번째 부인)가 되었다.[7] 혈우병이 있어서 출혈이 잘 멎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8] 첫 번째는 헤센 대공비 앨리스 공주로 레오폴드보다 6년 먼저 사망하였다.[9] 영국의 헬레나 공주의 차녀.[10] 애칭은 영 애피(Young Affie)였고 부모님의 은혼식 날 자살 시도를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11] 둘째 큰아버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겸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1844년 ~ 1900년)의 1남 4녀 중 유일한 아들 알프레드(1874년 ~ 1899년)가 1899년 2월 6일에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살리카법에 따라 알프레드의 딸들이 아닌 조카 카를 에두아르트가 물려받게 되었다.[12] 비단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뿐만 아니라 독일 11월 혁명으로 독일의 모든 군주제가 폐지되었다. 헬레네의 친정인 발데크피르몬트 후국도 예외는 아니었다.[13]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장남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와 결혼해 스웨덴의 왕세손비가 되어 칼 16세 구스타프를 낳았다.[14] (재선서 £183,053 및 2022년 기준 £7.2 백만에 해당한다.)[15] 프리드리히 1세의 차남이다.[16]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지빌라 공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