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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6:57:53

밸러리 솔라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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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밸러리 솔라나스
Valerie Solanas
파일:6-valerie-solanas-emma.webp
본명 밸러리 진 솔라나스
Valerie Jean Solanas
출생 1936년 4월 9일
미국 뉴저지주 벤트너 시티
사망 1988년 4월 25일 (향년 52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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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작가
성향 래디컬 페미니즘
학력 메릴랜드 대학교 (심리학)
자녀 1명
서명 파일:Solanas-signature.png

1. 개요2. SCUM 선언문3. 앤디 워홀 총격 사건4. 이후의 삶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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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래디컬 페미니스트이자 앤디 워홀에게 총격을 가한 살인미수범.

솔라나스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어린 시절 그녀는 친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어렸을 때 이혼했으며 솔라나스가 그녀의 의붓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자 조부모에게 보내졌다. 그녀는 알코올 의존증이었던 할아버지에게 주기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불우한 가정 환경으로 인해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매춘을 시작했고 가출해 결국 떠돌이가 되었다가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심리학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그러나 이런 불우한 성장 배경이 사실이 아니라 솔라나스가 주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라는 의혹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후술된 ‘평가’ 문단에 설명되어 있다.

2. SCUM 선언문

이 사회에서의 삶은, 최상의 경우에도 지루하기 짝이 없으며, 사회의 모든 측면은 여성을 배제하고 있으므로, 시민의식이 있으며, 책임감 있고, 모험을 원하는 여성에게 남은 길은 정부를 전복하고, 화폐 체계를 무너뜨리고, 산업의 완전 자동화[1]를 이루고 모든 남성을 제거하는 것 뿐이다.
...(중략)...
남성의 존재는 생물학적 실패이다. 남성 유전자 Y는 여성 유전자 X의 불완전한 형태이며 이는 남성이 유전적으로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남성은 불완전한 여성이며, 유전자 단계에서부터 실패한, 걸어다니는 실패작이다. 남성은 결핍이며, 정서적 결함이다. 남성성은 결함있는 질병이며, 남자들은 정서적인 불구이다.
- SCUM 선언문

1968년 그녀는 SCUM[2] 선언문을 썼다. 이 선언문에서 그녀는 남성과 여성은 태생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오직 폭력적 혁명으로만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과학 기술을 이용해 남성 없이도 인류를 생산할 수단을 확보한 후에 전세계의 모든 남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더해 남성의 존재는 생물학적 실패이며 남성은 유전자 단계에서부터 여성에 비해 열등하다는 우생학적 주장과 남성 절멸 후 단일성별사회 건설을 주장했다.

어떤 사람들은 SCUM 선언문이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풍자와 패러디일 뿐이므로 진지하게 남성 학살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 책이 올림피아 출판사에서 처음 출판되었을 때 편집자 모리스 지로디아스(Maurice Girodias)는 '그냥 농담'으로 생각하였다.[3] 그러나 정작 솔라나스 본인은 당시 이 글을 '정말 진지하게(dead serious)'[4] 쓴 것이라고 주장했고 풍자나 패러디의 의미는 없다고 밝혔다. 영어 위키백과 그리고 후술할 사건으로 그것은 풍자나 패러디가 아닌 진심이었음이 확실히 드러났다.

한편 솔라나스는 이 SCUM 선언문을 출판할 즈음인 1967년 SCUM 공개 포럼(A public forum on SCUM)을 조직했는데 대회장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체로 페미니스트와는 거리가 먼 쓰레기 내지는 매저키스트 남성들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SCUM은 솔라나스 혼자만의 행동이었고 현재 페미니스트 운동가들도 SCUM이 실재하는 조직이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3. 앤디 워홀 총격 사건

밸러리 솔라나스는 앤디 워홀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1967년에 그의 영화 촬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어느 시점에서 그녀는 앤디 워홀에게 'Up Your Ass'라는 제목의 연극 대본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앤디 워홀이 그 작품을 공연해 주길 원했지만 그녀의 작품은 지나치게 외설적이었기 때문에 앤디 워홀은 그것이 경찰의 함정수사라고 생각했다.[5] 앤디 워홀은 그 대본을 방치했고 30년이 지나서 겨우 발견되어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되었다. 이 무렵 밸러리 솔라나스는 극심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앤디 워홀이 의도적으로 그녀를 배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워홀이 자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고 느꼈던 그녀는 1968년 6월 3일 워홀의 작업실 '팩토리'에서 워홀에게 총을 쏘았다. 또 워홀 옆에 있던 미술 평론가 마리오 아마야도 쏘았으며 워홀의 매니저인 프레드 휴스 또한 쏘려고 했으나 탄환이 걸려 포기하고 작업실을 떠났다. 그녀는 그 날 바로 경찰서에 찾아가 자수했다.

아마야는 경상으로 당일 퇴원했지만 워홀은 이 총격으로 인해 흉부를 열고 심장 마사지를 해야 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평생 의료용 보호대를 차고 살아야 하는 장애를 겪게 되었고 이는 이후 그의 삶과 작품 활동에 큰 그늘을 드리우게 되었다. 반면 솔라나스는 살인미수죄로 기소되었으나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는 점이 참작되어 처벌은 3년간 정신병원에서 치료받는 정도로 끝나게 되었다.

4. 이후의 삶

워홀을 쏜 뒤 정신이상자로서 3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지낸 그녀는 1971년 석방 이후에도 워홀을 죽인다고 말하다가 정신병원에 다시 갇혔다.

정신병원에서 풀려난 이후 그녀는 워홀을 미행하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이렇게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하던 끝에 사회로부터 미친 여자로 무시 당했다. 페미니스트 예술가 울트라 바이올렛[6]은 늘그막의 그녀를 만났는데 솔라나스는 집도 없이 자서전과 여러 책을 낸 수익금으로 여전히 여러 호텔을 오가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직접 만나 본 바이올렛은 '이런 미친 여자가 무슨 페미니스트란 말이냐? 아무래도 정신이상 환자를 미화한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1987년 워홀이 죽고 나서 솔라나스와 만난 바이올렛의 회고에 의하면 솔라나스는 여전히 워홀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고 이에 바이올렛이 워홀은 이미 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하자 못 믿는다고 했다고 한다.

결국 1988년 4월 25일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텐덜로앵의 한 허름한 호텔에서 돌보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갑자기 폐렴으로 죽었다. 솔라나스는 죽기 직전까지도 여전히 워홀을 어찌 죽일까 따위의 소리만 했다.

5. 평가

솔라나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경우도 있었다. 전미여성기구(NOW)에서는 그녀를 정신병원에서 석방하라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전미여성협회 대표 티그레이스 앳킨슨은 그녀를 "여성운동계 최초의 챔피언"[7]이라고 평가하였다. 솔라나스의 변호사 플로린스 케네디는 솔라나스가 "여성운동계에서 가장 중요한 대변인"이라고 평가했다. 정작 NOW의 수장인 베티 프리댄은 밸러리 솔라나스를 거부했다.[8]앤디 워홀을 총격으로 테러한 밸러리 솔라나스를 미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티그레이스 앳킨슨은 밸러리 솔라리스에 대해 "여성 권위의 첫 번째 탁월한 챔피언", "페미니스트 운동의 주인공"'''이라고 발언했다. # # ]

물론 솔라나스를 직접 만나온 여자들은 솔라나스에 대해 혐오감만 들었고 대체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도 못 하는 정신병자일 뿐이라고 하는 이들도 많았다. 위에 울트라 바이올렛도 좋게 평가했다가 직접 만나보고 혐오감만 들었다고 할 정도.

1996년에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I Shot Andy Warhol)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되었다.[9] 제법 작품성을 인정받아 여러 영화제에서 상도 여럿 받았다. 물론 테러범 미화라는 악평도 장난아니게 받고 영화의 형평성 또한 논란이 되었으며, 1500만 달러로 만들어 전세계 흥행은 190만 달러를 벌어들여 흥행은 참혹하게 망했다. 감독인 메리 헤런은 그 다음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가 흥행과 평에서 훨씬 더 대박을 거둬들였는데 우습게도 이 영화는 페미니스트들이 반발하던 영화라서 반대 시위도 벌였다는 것이다.

브렌 파스 교수는 '솔라나스는 '자신들에게 지지의사를 보내준' 이들의 운동에 동참하고자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전미여성기구 사람들을 조롱하면서 그들의 운동을 분열시키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파스는 솔라나스의 삶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의 모순도 주장한다. 레즈비언이면서 남성을 상대로 매춘을 했고 나중에는 혼동 끝에 스스로 무성애자라고 주장했고, 퀴어 문화를 거부했고, 타인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면서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애초에 솔라나스가 주장한 본인의 '불행한 과거'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솔라나스의 사촌은 그녀가 20대 말에서 30대까지는 웨이트리스로 일했고 매춘은 하지 않았다고 하며 그녀의 친구였던 제프리 라기어는 그녀가 멋진 유년기를 보냈다고 말한다. 실제로 솔라나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녀는 15살 때 할아버지의 학대를 피해 가출한 뒤 노숙자가 되었고, 매춘을 하다 유부남의 아이도 낳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뭔 수를 썼는지 그녀는 제 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메릴랜드 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고,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까지 밟았다. 도저히 매춘으로 살아가는 가출 청소년의 경력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경로며,[10] 실제로 당시 그녀의 과거를 추적하던 이들의 증언으로는 벨러리가 주장한 내용과 일치하는게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녀가 그렇게 주장하던 불행한 과거등 모든 것이 다른이들의 동정과 관심을 받기 위한 거짓말이었던 것.

요약하자면 벨러리 솔라나스라는 인물은 자신을 혁명가 또는 선지자라 지칭하지만 실상은 본인의 확증편향과 자신만의 세계에서만 안주하며 자신과 같은 부류의 관심과 동정을 받고,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는 착각 속에 빠져, 현실을 인지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에 휘둘린 사이비이자 사기꾼이며, 앤디 워홀이라는 천재에게 자신의 모든것이 부정당했다는 망상에 빠져 범죄를 저지른 관심종자이자 공상허언증에 뮌하우젠 증후군 환자였다.

때문에 페미니즘계에서 이단자 혹은 혁명가로 평가가 갈렸으나, 이후 벨러리의 과거가 논란이 되면서 지금은 일부 극단적이고 몰상식적인 래디컬 패미니스트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저 당시의 그녀를 칭송한 자들도 정신병원에 갇힌 솔라나스에게 적절한 의료적 지원이나 사후 지원을 취하긴커녕 그녀가 주장한 암울한 과거 및 정신적 고통과 그녀가 벌인 범죄를 왜곡해 미화한 다음, 포커스를 맞춰 자신들의 이익에 이용해먹는 것에 급급하기만 했고, 이후 밸러리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곧바로 손절하는 모습을 보였다.


[1] 솔라나스는 기계를 이용해 인류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2] Society for Cutting Up Men(남성 거세 단체)의 약자이다. 영어에서 'scum'은 '액체 표면에 떠 있는 불순물 거품' 혹은 '인간 쓰레기'라는 뜻의 욕설이기도 하다.[3] Girodias, Maurice, Publisher's Preface (N.Y.: 1968), in Solanas, Valerie, SCUM Manifesto (London: Olympia Press, 1971 (ISBN 0 700 410 30 9)), p. xi.[4] Marmorstein, Robert (June 13, 1968). "A winter memory of Valerie Solanis (sic): scum goddess". The Village Voice. New York, NY. XIII (35): 9–10, 20.[5] 실제로 워홀의 작품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몇 차례 경찰에 의해 공연이 중단된 적이 있다고 한다.[6] 본명은 이사벨 듀프레인(Isabelle Dufresne,1935~2014)[7] Nickels, Thom (2005). Out in History: Collected Essays. STARbooks Press. ISBN 978-1-891855-58-0.[8] 베티 프리댄과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대립한 대표적 사례가 티그레이스 앳킨슨이다. 티그레이스 앳킨슨은 원래 베티 프리댄에 동조해서 NOW에서 활동했으나 프리댄이 거절해서 NOW를 나간 인물인데 프리댄이 티그레이스 앳킨슨을 거절한 이유는 티그레이스 앳킨슨이[9] 참고로 이 영화의 음악감독이 앤디 워홀이 후원했던 록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전 멤버인 존 케일이다. 사실 존 케일 본인도 밴드가 앤디 워홀의 명성에 묻어가는 데 불만이 컸다고 한다.[10] 그도 그럴게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것 자체가 엄청난 돈과 시간이 소비되고 입학하는 조건도 상당히 까다롭기로 유명해 돈많은 이들이나 공부쫌 한다는 이들이 다닌다는 인식이있다. 게다가 입학생의 성적과 등록금같은 자본은 물론, 가정환경, 성장환경 같은 스펙 또한 중요한 심사기준이며, 특히 밸러리가 나왔다던 메릴랜드 대학교와 미네소타 대학교는 퍼블릭 아이비 리그라 불리는 미국 내에서도 나름 상위권에 속하는 명문대이기 때문에 이 심사기준이 매우 엄격하다. 즉, GED를 통해 입시에 합격하고 후원을 받는다고 해도 매춘으로 생계를 꾸리는 가출 청소년이 대학은 물론 대학원 과정까지 수행하는건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