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width=400px><table align=right><tablebgcolor=#FFFFFF><tablebordercolor=#CC0000><#CC0000><width=100> ||<-2><:><#CC0000>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명칭 | 한국어 | 백마사 |
간체 | 白马寺 | |
번체 | 白馬寺 | |
영어 | White Horse Temple | |
분류 | 고건축 (古建筑) | |
시대 | 금~원 | |
일련번호 | 1-0092-3-045 | |
주소 | 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뤄양시 찬허후이족구 뤄바이루6호 (河南省洛阳市瀍河回族区洛白路6号) | |
등재 | 1961년 | |
차수 |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 |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 AAAA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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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마사 산문 | 924년경 후당 장종이 건립한 후 1175년 금나라 대에 증축된 13층탑(제원탑, 齊元塔) |
백마사 주요부. 대웅전, 대불전 등 5개의 전각이 배치되어 있다. |
중국 뤄양시의 유서깊은 절. 중국 최초의 사찰로,[1] 후한 명제 대인 서기 68년에 창건되었다. 인도의 두 승려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백마에 불경을 싣고 낙양에 당도, 불경을 한역하며 머물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황명으로 후한대 낙양성 서쪽에 건립되었다. 중국 불교의 전성기인 남북조 시기와 수당 시기에 번영하였고, 안세고에서 축법호에 이르는 기라성과 같은 고승들이 활동하며 동아시아 불교 정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한때 3천의 승려가 머물렀으며, 중국은 물론 일본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 각지에서 온 구법승들도 있었다. 다만 자주 전란에 휩쌓인 낙양의 특성상 남북조, 안사의 난, 5대 10국, 태평천국의 난 등의 혼란기를 거치며 파괴와 중창을 번복하다가 명대에 현재의 가람 구조가 정립되었다.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제일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에 지정되었으나, 1966년 문화대혁명 당시 주요 유물이 훼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1973년 저우언라이의 주도로 복원 작업에 착수, 1984년 일반에 공개하여 현재에 이른다. 찾아가는 방법은 뤄양 시내에서 백마사를 종점으로 운행하는 56, 58번 버스를 1시간 가량 타는 것이 유일했으나 2021년 개통한 뤄양 지하철 1호선의 동쪽 종착역인 양완역(杨湾站)이 6km 거리에 생긴 후로는 접근성이 개선되었다. 뤄양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불교 성지[2]로, 사찰을 중심으로 형성된 소도시인 바이마스진(白马寺镇)이 있을 정도다. 인접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1~6세기의 낙양성과 한때 세계 최고층 불탑이 있던 영녕사와 함께 뤄양 동부의 대규모 역사 관광지로 조성될 예정이다.
2. 역사
6세기 북위 대에 조성된 석불좌상 | 1175년 금나라 대에 세워진 제운탑 |
후한 명제 11년(68년), 인도 승려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대월지에서 만난 한나라 사신 왕준, 채음과 함께 흰 말에 사십이장경과 불상을 싣고 낙양에 다다른 후 머무르며 가져온 불경을 번역한 홍려관(鴻臚館)[3] 자리에 사찰이 조성된 것이 백마사의 기원이다. 후한대 낙양성의 서쪽, 서양문(西陽門) 밖으로 불과 3리 거리에 있던 백마사는 자연히 황실의 후원을 받는 왕립 사찰로 중시되었다. 후한 ~ 조위 ~ 서진 시대에 백마사에서는 중국, 더 나아가 동아시아 불교의 기반을 다진 기라성과 같은 고승들이 활약하였다. 대표적으로 안세고, 지루가침, 담가가라, 주사행, 축법호 등이 있다. 불교가 크게 융성했던 북위 시절 낙양에는 무려 1367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백마사는 그중에서 가장 번성하였다.
비록 532-34 영희 연간 내란으로 인근 영녕사와 함께 폐허가 되었고, 부분적으로 재건되었으나 570년대 무제의 북주파불(北周破佛) 등의 탄압 등에 의해 중소규모로 유지되는데 그쳤다. 그러다 당나라 수공 원년(685년) 황태후
이후 재건되어 9세기 초엽 일본 불교의 주류 진언종의 창시자인 구카이(空海)가 유학하기도 하였다. 2000년 무렵 중일 우호 25주년 기념으로 사찰 경내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후 배불론과 신유학의 영향으로 840년대 당무종의 회창폐불과 950년대 후주 세종의 불교 탄압이 이루어지고 5대 10국의 전란을 겪으며 백마사는 또다시 쇠퇴하였다. 992년 송태종이 재차 중건하였으나 송대에는 신유학 기류에 밀려 번성하지 못하였고, 1103년 송휘종이 중창을 벌였으나 곧 정강의 변이 벌어졌다. 금나라 대에는 큰 중창은 없었지만 1175년 기존 후당 시기의 9층탑을 13층으로 확장한 제원탑(齊元塔)이 세워졌다. 원나라 대의 일부 보수를 거쳐 명나라 대에는 승려 출신인 태조 주원장이 수리하였다.
한세기 반이 지난 1555년, 가정제 연간에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져 오늘날의 영역과 가람 배치가 확정되었다. 청나라 대에는 1713년 옹정제 연간에 보수가 이루어졌고, 19세기 중반 태평천국의 난 시기에 일부 파괴되었으나 1883년 재차 수리가 이루어졌다. 중화민국 대인 1930년 다시 보수가 있었고, 중일전쟁의 참화는 다행히 비껴갔다. 무교 성향의 사회주의에 기반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 위기를 맞는듯 했으나 1952년, 1954년, 1959년 보수가 이루어졌고 1961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제일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지정되며 국보급 문화재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1966년부터 벌어진 문화대혁명의 반달리즘 물결에 직격탄을 맞아 과거 폐불이나 성상파괴운동에 준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창건 당시에 인도에서 가져온 패엽경 전소하고, 성보인 옥마(玉馬)가 부서졌으며, 요나라 대의 18나한 등 여러 불상이 우상이라며 파괴되었다. 문혁 말엽인 1973년, 전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가 방중하여 백마사 참배를 신청하자 총리 저우언라이는 자금성 내의 패엽경과 베이징 근교 향산 벽운사(碧雲寺)의 청대 18나한상을 긴급히 뤄양으로 이송시키게 하여 파괴된 백마사의 성보를 대체하게 하였다고 한다. 같은해 저우언라인는 백마사에 대한 복원을 지시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1983년 중국 정부는 백마사를 ‘한족지구 불교전국중점사원’으로 지정하였고, 정비 끝에 1984년부터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인근 소림사와 함께 중국에서 스님들이 정식으로 수행하고 염불하는 몇 안되는 고찰 중 하나이다.
3. 관광정보
2015년 기준 입장료는 50위안, 전화번호는 86-379-63789090 이다. 자세히 둘러보려면 반나절은 걸리니 이를 유의하여 동선을 짜는 것을 추천한다.백마사는 뤄양시 소속이지만 뤄양시 시내가 아닌 외곽에 존재하며, 백마사 근처에는 바이마쓰역(白马寺站)이 있지만 해당 역은 화물역으로, 여객운송을 하지 않기에 도로교통만을 이용하여야 한다. 백마사의 이동 시간은 시내에서 버스로 약 1시간 ~ 1시간 20분 사이의 시간이 걸리며, 56/58/87/801/D58번 버스가 백마사를 경유한다.
참고로 한-위진남북조 당시의 낙양성터가 백마사의 동쪽으로부터 불과 542미터 거리에 있다 일부 궁전터를 제외하면 거의 밭으로 변한 상태다.
4. 매체에서
후한 대부터 중국 불교의 중심지 중 하나였기에 삼국지에서도 간혹 등장한다. 대군사 사마의에서 사마의가 집사인 후길에게 자신이 백마사의 주지와 친분이 있으니 혹시 마음이 있다면 출가하라고 권하기도 한다.5. 갤러리
백마사 산문
백마사의 명칭 유래인 산문 앞의 백마상. 6세기 북위 대에 조성되었다.
비로각.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머물며 사십이장경을 한역한 홍려관 자리이다.
백마사 경내의 정원
명대에 세워져 최근 복원된 대웅보전
중인 우호 교류의 산물로 절 인근에 세워진 인도식 파고다. 인근에 버마식 불당도 있다.
[1] 다만 삼국지에 나오는 박망파 지역에 이곳보다 먼저 지어진 '박망 백마사' 라는 절이 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해당 절의 스님은 그렇게 소개하고 있다.https://youtu.be/Kif8Vaxw_e4?si=28cFtkk2afkl3t6q&t=738[2] 중국 내부는 물론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국왕이 따로 찾을 정도였다[3] 현 백마사 비로각 자리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