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행 Baek Seon Haeng | 白善行 | |
▲ 백선행기념관 앞에 세워진 백선행의 흉상 | |
출생 | 1848년 |
조선 경기도 수원 | |
사망 | 1933년 5월 8일 (향년 85세) |
평양부 중성동 | |
가족 | 아버지 백지용 |
종교 | 무교 |
직업 | 기업가, 사회적 기업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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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사회적 기업가.2. 생애
조선 후기 1848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수원시이지만, 출생 후 1년 뒤 평양으로 이주해 일생의 대부분을 평양시 중성동에서 살았다. 7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고 16살 때는 남편 안재욱과 사별하게 되었다. 이후 사업가 수완이 뛰어났는지, 근검절약을 바탕으로 평양의 대부호가 되었다. 평양 만달산 부지를 시멘트 공장부지로 팔아서 갑부가 된 사연은 유명하다.[1] 1908년에는 환갑을 기념하여, 대동군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백선교를 건설하였다. 1919년 3월 1일 운동에 충격을 받고, 본인의 자금을 사회기업에 투자하기로 선언하고, 1924년에는 문화시설인 대공회당을 착공하였다. 대공회당을 건설하는데 조언을 준 사람이 바로 조만식. 그 외에도 교육사업을 지원하며, 평양에 있는 광성보통학교 및 창덕보통학교에 농지를 희사하고,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에도 자금을 지원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 주는 훈장을 거절하였으며, 86세에 눈을 감았다.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룬다. 그리고 12년 뒤에 조선은 독립을 하게 된다.백선행이 지은 대공회당은 그녀가 죽자 백선행기념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북한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남아 있으며, 북한에서도 백선행은 '애국자본가'라고 높이 평가한다. 평양에 김씨일가 제외하고 개인 기념관으로서는 유일하다. 다만 그녀가 본래 남한 사람이었다는 건 남,북 어느 쪽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남한에서는 북한에서 활동한 그녀에 별 관심이 없으며[2] 북한에서는 그녀가 평양 중구역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때부터 착각이 지속된 거고 분단 되어 남측 증언과 교차검증이 안된 결과이다. 그 당시 1930년대 잡지에도 평양 출생으로 나온다. #
3. 여담
- 일제강점기의 여성 사회적 기업가라는 매우 특이한 타이틀 때문인지, 천일야사 57회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방영되기도 하였다.
- 사실 백선행은 본명이 아니며, 원래 백선행은 이름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백선행도 그 중 하나였다. 그래서 백선행으로 불리기 전에는 수원댁이나 백 과부로 불렸다고 하며, 선행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1908년 사재를 털어 백선교를 지어줬을 때 사람들이 그녀의 선행을 칭송하고자 붙혀준 이름이라고 한다.